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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으로?―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 이해 ―
김종길  |  jpic19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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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11월 11일 (수) 23:59:29
최종편집 : 2015년 12월 18일 (금) 18:21:37 [조회수 : 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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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으로?

―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 이해 ―

 

김종길(구약학 Ph. D.)

 

I. 서론

 

일반적으로 개신교회는 복음과 믿음을 강조하고 율법과 행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옛 법이고 신약성서는 새 법이라는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견해를 수용한 루터(Martin Luther)는 율법은 복음에 비하여 열등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율법과 행위는 옛 시대 이스라엘에게 해당하는 것이고, 죄 용서와 은혜는 새 시대의 교회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여겼지요. 이러한 루터의 주장이 오랫동안 기독교신학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신학의 영향 아래 있는 한국 교회는 대부분 루터의 칭의 사상을 편향되게 수용하여, 도덕과 윤리적 실천을 과소평가합니다. 율법과 복음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믿음과 행위의 분열을 초래하고, ‘율법주의’ 또는 ‘율법폐기론’으로 기울어집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 사상은 개신교회가 신앙 일변도로 나아가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지닌 문제점은 윤리적 실천이 결여되고, 신앙과 행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루터의 견해처럼,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상반될까요? 유대교는 행위 구원론에 입각하고, 기독교는 은혜 구원론에 근거할까요? 과연 바울이 믿음만을 강조하고, 행함을 배척했을까요? 구약 시대의 율법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것일까요?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필자는 로마서에서 율법의 긍정성을 입증하고, 사도 바울이 구원의 방편으로 ‘오직 믿음’(sola fide)을 내세우며 ‘행위 없는 구원’을 주장하지 않았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이 글은 “새로운 관점”(new perspective)에서 율법을 평가하고, 그리고 ‘사회학적 연구방법’(sociological approaches)을 수용하여, 바울이 로마 지역에 소재한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에 접근하겠습니다. 바울의 율법관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옛 관점(루터 신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으로 로마서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에서 언급한 대로, 종래의 로마서 해석이 주로 루터 신학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루터는 유대교를 은혜에 대립하는 율법주의로 보았습니다. 샌더스(E. P. Sanders)의 연구는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예수와 바울 시대의 유대교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했습니다. 샌더스에 따르면, 기원후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 존재한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유대교가 은총의 종교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구원 행동이 하나님의 주도로 선행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지요. 율법 준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목적은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살기 위한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은 율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합니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바울의 율법관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샌더스의 견해를 수용한 던(James D. G. Dunn)은 성서 연구에 ‘새로운 관점’을 설정합니다. 던은 선교적 관점, 변증적 관점, 목회적 관점에서 로마서의 기록 동기와 목적을 살피고, 상황에 따라서 율법의 용례가 다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는 율법을 토라(Torah)와 제의법으로 구분함으로써, 모순적으로 진술된 율법에 관한 난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관점’은 신약성서 연구에 획기적으로 기여합니다.

율법에 대한 모순된 진술은 로마의 교회가 처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본문을 제대로 읽으려면 로마 교회가 처한 사회적 정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따라서 성서 연구에 ‘사회학적 방법’도 요구됩니다. 그리하여 문맥에서 율법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지면 관계상 로마서 3장 21-31절, 8장 1-11절, 10장 4절, 5-8절, 13장 8-10절 등의 본문에 제한하여, 바울이 진술한 율법의 용례를 살펴볼 것입니다.

 

   
 

 

II. 로마서의 사회적 정황

 

성서의 문서들은 성서 기자와 사회의 상호관계에서 형성된 복합적인 작품입니다. 로마서는 바울과 로마제국 및 로마 교회의 역학 관계에서 저술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위압과 유대교도의 위협에 직면하여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은 위기상황에서 산출된 신학입니다. 성서는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상황을 바로 인식하고 대처하는 길을 제시하는 위기의 산물이지요. 바울이 전파한 메시지는 위기에 처한 교회가 고뇌하고 몸부림한 ‘생존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보편적이고 체계적인 신학 논문이 아니라, 로마 교회의 특별하고 실존적인 상황에서 발생한 작품입니다. 서중석에 따르면, 바울은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바울의 복음”에 따라 제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서본문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본문이 형성된 사회적 정황을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에 관하여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선교적 관점, 변증적 관점, 목회적 관점에서 로마서의 기록 목적을 설명한 던(James Dunn)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선교적 차원에서 바울은 로마 교회가 자신의 선교를 인정하여 주기를 바라면서 로마서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기에 앞서서, 복음을 소개하고 선교의 비전을 제시하려 했습니다. 변증적 차원에서 로마서는 오해와 비난을 받고 있는 신학사상에 대하여 변호했습니다. 특히 믿음과 율법에 대한 입장을 바울은 해명했습니다. 목회적 차원에서 로마서는 갈등하는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로 구성된 신앙 공동체의 내적 일치와 화해를 유도했습니다.

그러면 목회적인 차원에서, 로마서에 나타난 ‘강한 자’는 누구이고 ‘약한 자’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로마서 14장 1절부터 15장 13절까지의 본문에서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 있는 집단 간의 갈등을 다룹니다. 교회 안에는 믿음이 약한 자들(14:1)과 믿음이 강한 자들(15:1)이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음식을 가려 먹고(14:2, 21), 어떤 날을 거룩하게 지킵니다(14:5). 반면에 믿음이 강한 자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14:2), 특정한 날을 구별하지 않습니다(14:5). 박익수는 이러한 구절들을 근거로 하여 율법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강한 자와 약한 자를 구분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이란 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일 것이고, 강한 자들이란 율법의 제약 없이 복음을 받아들인 대부분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약한 자는 유대교의 관습을 준수하고, 믿음이 강한 자는 율법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율법에 대한 태도로써 믿음의 강약을 분별한다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무튼 본문에서는 믿음의 강약이라기보다는 입지의 강약으로 보는 것이 적합합니다. 어찌하여 로마 교회에서 입지의 강함과 약함이 발생했을까요? 로마 교회의 구성원을 파악하기 위하여 당시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정황을 고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따르면, 주후 49년에 로마제국의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령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로마 교회에 변화를 초래했지요. 애초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은 회당 출신의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추방된 이후에 로마 교회에는 이방인 신도만 남게 되었습니다. 주후 54년에 네로(Nero) 황제가 칙령을 철회한 후에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 로마 교회는 다수의 이방인 신자와 소수의 유대인 신자로 구성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추방 이전에 교회의 주류를 이루던 유대인들과 새롭게 부상하여 대세를 이룬 이방인들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였습니다. 정결법이나 절기법 등에 자유스런 입장을 지닌 이방인 신자와 유대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서로 친교하기를 꺼려했지요. 로마서 14장 1절부터 15장 13절까지의 본문에서 전자는 ‘강한 자’로 후자는 ‘약한 자’로 암시됩니다. 교회 안에서 두 집단은 불화하였습니다. 왓슨(Francis Watson)에 의하면, 로마 교회의 갈등은 단순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일어난 긴장이 아니고, 두 집단이 서로 의심하고 공동예배를 기피하는 문제였습니다. 정승우는 로마 교회에서 발생한 약한 자와 강한 자의 긴장을 교회의 지도력과 연관된 주도권 다툼에서 야기된 집단간의 알력으로 파악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칭의론’을 제시함으로써 양자의 갈등을 해소하고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자 하였습니다. 죄와 복음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등합니다. 두 집단의 균형을 이루고자 바울은 약한 자인 유대인 신자의 위치를 끌어 올리는 한편, 강한 자인 이방인 신자의 입지를 누르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학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를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서 대립하는 두 집단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서신을 기록하였습니다. 로마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복음입니다. 이방인이나(1:18-32) 유대인이나(2:1-29),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하느님 앞에서 죄인입니다(3:1-20). 그러므로 전자가 후자를 판단하거나, 후자가 전자를 경멸해서는 안 됩니다(14:10). 두 집단은 차별 없이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3:21-26).

이러한 환경에서 이른바 ‘칭의론’이 정립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차별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지요. 로마서의 칭의론은, 투쟁을 내세우는 갈라디아서와는 달리, 화해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교는 율법 준수와 의로움을 연결하는데, 바울은 선교 전략의 차원에서 믿음과 의로움을 결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으로 인한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대비시켰습니다. 여기서 ‘율법’에 대한 오해가 야기된 것이지요. 따라서 편견을 바로잡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III. 바울의 율법 이해

 

로마서에서 율법(νόμος/노모스)의 개념을 규정하기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관하여 경우에 따라서 상이하게 진술합니다. 어떤 부분에서 율법이 부정적으로 서술되고, 다른 부분에서는 율법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레이제넨(H. Raeisaenen)은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율법의 개념,’ ‘율법의 유효성,’ ‘율법의 성취,’ ‘율법의 기능,’ ‘율법과 그리스도’ 등 다섯 가지 주제를 예로 들어 바울의 비일관성을 입증합니다. 샌더스도 율법에 관한 바울의 진술에 상당 부분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그는 바울이 ‘율법’과 ‘죄’와 ‘하나님의 뜻’의 내적 상호 연관성을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진술했다고 지적합니다. ① 갈라디아서 3장 22-24절 및 로마서 5장 20절 이하에서 바울은 율법과 죄를 하나님의 뜻에 예속시킨다. ② 로마서 7장 7-13절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범죄를 일으키도록 죄에게 이용당한다. ③ 로마서 7장 14-15절은 율법과 범죄 사이의 연관성을 깨뜨리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율법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바울 사상의 유기적인 발전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샌더스의 입장을 수용한 던은 율법의 불일치를 설명하고자 율법을 ‘토라’와 ‘제의법’으로 구분합니다. 바울의 서신에서 율법이 상충하는 것은 문맥에 따라서 율법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바울은 토라로서의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배척한 것은 유대인의 신분을 표지하는 할례, 안식일, 음식 등에 관한 제의적 규례였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던의 견해를 수용하여 로마서를 읽고자 합니다. 이제 새로운 관점으로 본문에서 사용된 율법의 개념을 파악하고, 율법의 기능을 고찰하고자 합니다.

 

A. 토라와 율법의 행위(3:21-31)

로마서 3장 21-31절에서 바울은 칭의론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 외에”(21절) “믿음”(22절)에 나타났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고(21절),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22절). 27-28절에서 “행위의 법”과 “믿음[의 법]”이 대비되고, “율법의 행위”와 “믿음”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21절의 “율법 외에”는 28절에 있는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와 상응합니다. 루터는 “율법 외에”를 “율법의 도움 없이”로 읽음으로써, 구원에서 율법의 역할을 배제합니다. 율법과 토라를 동일시하면, 바울은 ‘행위 없는 구원’을 주장한 셈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21절)이라는 구절은 구약성서가 하나님의 의를 뒷받침함을 보여줍니다. 27절에 나타난 “행위[의 율법]”은 28절에 뒤따라 나오는 “율법의 행위”와 동의어로서 부정적인 의미로 진술됩니다. “율법”(21절), “행위의 법”(27절), “율법의 행위”(28절) 등은, 던의 구분을 따르면, 안식일, 할례, 음식물 등에 관한 제의적 법규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유대인이 독점한 율법, 민족적 편견으로 치우쳐 유대인의 표지로 내세우는 율법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믿음의 관점에서 율법을 재해석합니다. 21절에서 구약성서를 가리키는 “율법과 선지자” 및 31절에 나타난 “율법”은, 앞선 용례와는 달리, 넓은 의미의 율법인 ‘토라’(הרות)를 말합니다. 31절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세우는 율법’에 관한 진술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율법을 옹호합니다. 27절에 “믿음의 법”이라는 독특한 용어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사용된 ‘법’(νόμος/노모스)은 율법을 가리킬까요, 아니면 원리를 뜻할까요? 던은 믿음의 법을 믿음의 차원에서 이해된 율법이라고 설명합니다. 31절은 27절의 “믿음의 법”이 확장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토라로서의 율법이 긍정됩니다. 율법은 삶의 길입니다. 삶은 행위입니다. 신약학자 권연경은 ‘행위 없는 구원’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바울이 칭의의 유일한 근거로 제시하는 믿음은 도덕적 행위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율법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31절에서 사용된 ‘폐하다’와 ‘세우다’라는 용어는 마태복음 5장 17절에 있는 전승을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31절에 제시된 율법의 개념은 21b절에서 언급된 율법의 다른 개념으로서 구약성서에 계시된 복음의 기초가 됩니다. 따라서 믿음은 율법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31절의 의미는 신앙과 생활의 통합, 곧 윤리적 실천이 믿음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비판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문자와 형식에 구애받는 율법주의(legalism)입니다.

 

B. 율법과 영(8:1-11)

로마서 8장 1-11절은 어떻게 율법이 새로운 의미와 효력을 지니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율법과 ‘영’의 관계에 관하여 진술합니다. ‘영’(πνεύμα/프뉴마)이란 무엇일까요? 8장 9절에 따르면, “영”은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인간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죄로 인하여 변질된 인간의 본성 안에서, 영은 율법과 관련하여 어떤 역할을 하는가요?

 

1. 영의 법과 죄의 법(8:1-4)

로마서 8장 2절에서 “생명을 주는 영의 법”과 “사망으로 이끄는 죄의 법”이 대조됩니다. ‘영의 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원리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죄의 법’은 세상을 따르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법’은 율법(Torah)을 가리키지 않고, 인간의 행동을 주관하는 뭔가를 지칭합니다. 바르트는 영을 ‘결단’이라고 해석합니다. “영은 인간을 위해 하나님 안에서 내려진 결단이요, 하나님을 위해 인간 안에서 내려진 결단이다. … 육신은 하나님에 반하여 인간 안에서 내려진 시간적인 결정이고, 인간에 반하여 하나님 안에서 내려진 시간적인 결정이다.” 육신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율법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로 인하여 변질된 인간의 본성 안에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자아에게 율법은 도리어 죄와 사망의 법이 된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영의 법이 그러한 모순을 극복합니다. 영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본래의 의도를 회복하게 됩니다. 2절에서 바울은 영의 법이 죄의 법에서 인간을 해방하였다고 선언합니다. 이어서 3절에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진술합니다. 육신을 가진 우리가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지만, 영의 도움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4절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한다”고 서술합니다. 율법은 영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와 영 안에서 신자의 윤리가 됩니다. 슈미트(H. -W. Schmidt)는 3장 27절과 8장 2절을 결합시켜 ‘모세의 법’과 ‘그리스도의 법’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이 그 본래적 목적에서 계시된다. 그것은 ‘믿음의 법’(3:27)이든지 ‘영의 법’(8:2)이 된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진리의 증언으로서 다시 세워진다(3:31).”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의 지배를 받는 신자들에게 새롭고 긍정적인 기능을 지니게 됩니다. 영은 율법을 회복하는 원리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2. 영의 길과 육의 길(8:5-11)

대조법을 통하여 4절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로마서 8장 5-8절은 두 가지 삶의 방식, 곧 ‘육의 길’과 ‘영의 길’을 설명합니다. 5절에서는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과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이 대조되고, 6절에서는 “육신에 속한 생각”과 “영에 속한 생각”이 대조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영’과 ‘육’이란 “두 반대되는 세력들” 또는 “두 대조적인 존재 양태”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프롬(Erich Fromm)의 용어를 빌리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영의 길은 ‘존재적 실존양식’과 상응하고, 하나님과 소외 상태에 있는 육의 길은 ‘소유적 실존양식’을 가리킵니다. 신자의 삶은 ‘육’과 ‘영’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긴장입니다(4-5절). 둘은 전혀 다른 과정과 결과를 이끕니다.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7절),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8절). 육을 따르는 자는 육신에 속한 생각을 하고, ‘육신의 행실’(갈 5:19-20)을 초래합니다.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은 영에 속한 생각을 하고,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삶은 ‘영의 열매’(갈 5:22-23)를 맺습니다. 이어서 9-11절은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의 복과 정체성을 진술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C. 율법과 그리스도(10:4)

로마서 10장 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 율법의 마침”(10:4)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텔로스’(τέλος)를 해석하기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서 텔로스는 마침일까요, 이룸일까요? 아니면 둘 다를 뜻하는가요? 이에 대한 답변은 세 가지 입장으로 정리됩니다. 첫째 입장은 텔로스를 ‘종료’ 또는 ‘폐기’로 봅니다. 루터 신학의 영향 아래 있는 학자들은 대부분 첫 번째 입장을 따릅니다. 케제만에 따르면, “바울로는 아직은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는 율법과 복음을 상호배타적인 반명제로 보았다.” 여기서 율법과 그리스도는 대립관계에 있습니다. 두 번째 입장은 텔로스를 ‘목표’ 또는 ‘성취’로 해석합니다. 던은 바울이 사용한 텔로스가 목표를 의도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캠벨(W. S. Campbell) 및 바데나스(R. Badenas)는 텔로스를 시간상의 종국이기보다는 목적론적인 방법으로 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가져온 의는 율법이 지향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지요. 이 맥락에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 위해서 이루고자 한 율법의 요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세 번째 견해는 이중적 의미로 받아들여, 텔로스에 ‘종료’와 ‘성취’의 뜻이 공존한다고 봅니다. 슈라이너(T. R. Schreiner)는 율법을 ‘도덕적 율법’과 ‘제의적 율법’으로 구분합니다. 제의법이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도덕적 요구는 믿는 자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서중석도 텔로스의 이중적 의미를 지지합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는 그 배타적인 통로의 폐기이다. 동시에 바울이 이해한 율법의 목적, 곧 하나님의 포괄적인 의의 획득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배타성을 폐기하면서 율법의 목적을 완성했다는 것이지요.

본문의 문맥을 고려하면, 10장 4절의 텔로스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편으로, 율법을 좁은 의미로 한정하는 경우에, 그리스도는 종교적 행위와 관련된 율법을 종결시킵니다. 전후 구절에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두 가지 길, 곧 “믿음”과 “행위”(9:3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10:3절), “율법에 근거한 의”와 “믿음에 근거한 의”(10:5, 6)가 대립합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4절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이 대비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그리스도의 믿음’과 대립하는 ‘율법의 행위’로 한정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10장 4절을 마태복음 5장 17절과 연결하여 읽는다면,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자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 하나님이 수여한 토라는 하나님의 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D. 율법의 완성(13:8-10)

마태복음 5장 21-48절은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해석입니다. 예수는 옛 율법을 부분적으로 심화하기도 하고(5:22, 28), 부분적으로 교정하거나 폐기하기도 합니다(32, 34, 39, 44절). 유대의 전통을 중시하는 마태복음은 예수가 율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는 것임을 보여주려 합니다(17절). 율법을 완성한다(πληρώσαι/플레로사이)는 것은 율법을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하고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여기서 “계명”(ἐντολή/엔톨레, 19절)은 “율법”(νόμος/노모스, 17, 18절)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본문은 유대의 전통에 따라서 율법/계명과 의로움을 연결합니다(20절). 의로움의 기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마 22:37-39). 사랑은 율법을 완성합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입니다(22:40).

율법을 완성한다는 주제는 갈라디아서에도 나타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입니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에 다 들어 있습니다”(갈 5:14).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과 연결됩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갈 6:2).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홍인규는 “율법 전체”(5:3)와 “온 율법”(5:14) 그리고 “그리스도의 법”(6:2)이 동일하게 모세의 율법(토라)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율법을 성취한다는 진술은 “율법의 요구 사항들의 참된 목적이나 의도가 사랑을 통하여 완전히 만족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행위가 배제된 신앙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3장 8-10절에서 바울이 율법을 긍정하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 단락에서 8절은 바울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상기시키고, 이어서 9절은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반드시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수여한 본래적인 율법(토라)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살펴본 세 본문을 비교하면, 갈라디아서 6장 2절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법”과 로마서 13장 10절에 언급된 “율법”은 마태복음 5장 17절의 “율법”과 일맥상통합니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이 상충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 사랑은 율법을 완성합니다. ‘행실이 있는 믿음(fide cum opera)’을 역설한 바울의 선포는 근본적으로 예수의 복음과 일치합니다.

 

E. 신명기와 로마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공통적으로 구원의 진리를 증언합니다. 구약에도 은혜와 복음이 있고, 신약에도 율법과 계명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진술합니다. 로마서는 복음을 믿고 계명을 지킬 것을 선언합니다. 신명기 30장 11-14절과 로마서 10장 5-8절에서 모세의 율법은 바울의 복음과 만납니다. 신명기 30장 6-8절은 야웨의 은총을 통한 구원을 진술합니다. “야웨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의 마음과 너희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순종하는 마음을 주실 것이다”(30:6). ‘마음에 할례를 베푸심’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렘 31:31)을 뜻하며, 에스겔에서 ‘새 영’ 또는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둔다는 구절과 일치합니다.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겔 36:27). 새 언약을 상징하는 ‘마음의 할례’와 ‘마음에 둔 새 영’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초래된 마음의 변화로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10:5)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10:6)를 비교합니다. 전자는 제의적인 규정들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의로움을 얻고자 하는 율법주의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을 뜻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6-8절에서 신명기 30장 12-14절을 인용하면서, 율법 준수를 ‘복음’으로 해석합니다. 모세가 반포한 “하나님의 말씀”(신 30:14)은 바울이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롬 10:8)과 일치합니다. 실로 내면화된 명령/율법은 “믿음의 말씀”, 곧 “복음”(10:16)입니다. 신명기 30장 6-8에 나타난 마음의 할례는 그리스도 사건에 상응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6-8절에서 율법에 관한 신명기 30장 12-14절의 언급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 뜻에서 브라울릭(Georg Braulik)은 ‘마음의 할례’가 신학적으로 ‘칭의’(Rechtfertigung)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상기하고, 언약과 율법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야웨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유롭게 살 길이 열렸습니다. 언약은 자신을 제약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드러내며, 아울러 이스라엘의 책임을 요구합니다. 언약의 요구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언약 규정인 율법입니다. 율법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히브리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방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길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제시한 가장 큰 계명입니다(막 12:30, 31). 언약은 율법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옛 언약과 마찬가지로, 새 언약의 중심에 율법이 자리합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새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새 언약 안에서 율법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만약에 내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한다면, 율법은 인간을 속박하는 멍에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성령을 따라’ 율법에 순종하면, 율법은 생명과 자유의 길입니다. 야웨의 은총으로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율법에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아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믿음에 근거한 의가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율법을 종합하는 신명기의 메시지와 로마서의 복음이 근본적으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지요.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바울은 율법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전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만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서 비롯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엡 2:8). 바울의 구원신학은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에 표명되어 있습니다. 율법과 믿음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IV. 결론

 

로마제국의 정책에 의해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된 사건(기원후 49-54년)은 로마 교회에 변화를 초래하였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유대계 신자(약한 자)와 율법에 대하여 비교적 자유로운 견해를 지닌 이방계 신자(강한 자) 사이에 알력이 발생했습니다. 교회의 지도력과 연관된 집단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에 발생한 갈등에 당면하여, 두 집단의 화해를 도모하고 공동체의 일치를 목적으로 바울은 칭의론을 개진했습니다. 의로움의 근거를 율법 준수에 두는 유대교와는 달리, 바울은 선교 전략의 차원에서 의로움의 근거로 믿음을 내세웁니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누구나 평등하게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습니다. 두 집단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믿음’을 강조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율법’을 부정적으로 진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요. 다음과 같은 본문들에서 율법의 긍정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1-31절은 바울의 칭의론을 집약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 외에 ‘믿음’을 통하여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율법”(21절), “행위”(27절), “율법의 행위”(28절) 등은 제의법 내지 종교적 행위를 가리키는 용어들입니다. 반면에 21절과 31절에 나타난 토라로서의 율법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내세우는 할례, 안식일, 음식 등에 관한 제의법을 거부하였으나, 토라로서의 율법은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문자와 형식에 집착한 율법주의(legalism)이지요. 8장 1-11절은 ‘율법’과 ‘영’의 관계를 다룹니다. 영은 율법의 목적과 기능을 회복합니다. 죄가 율법을 악용하지만, 영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추구합니다. 율법은 영을 통하여 본래 기능을 회복하고 선한 목적을 달성합니다. 10장 4절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종결’이자 율법의 ‘성취’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는 종교적 행위에 집착하는 율법주의를 종결시키고, 율법의 본래적 의미와 목적을 회복하였습니다. 13장 8-10절은 율법을 적극적으로 권장합니다. 바울은 행위가 배제된 신앙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로마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움과 아울러, 사랑의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율법의 완성을 강조합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신명기가 은혜를 증거하고, 로마서는 계명 실천을 권장합니다. 야웨는 마음에 할례를 베풀고 마음에 새 영을 두심으로써, 야웨와 이스라엘은 새로운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은 율법에 순종하게 됩니다. 옛 언약(율법)과 새 언약(은혜)은 단절성과 아울러 연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은총과 아울러 인간의 책임을 내포합니다. 언약의 요구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삶의 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길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바울 사도는 율법을 부정하고 오직 믿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편향된 시각으로 바울의 율법관을 오해한 한국 교회가 ‘행위 없는 구원’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소위 ‘구원파’라는 사이비 종파가 주장하는 바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안식일교회’를 따르자는 것도 아니지요. 요컨대, 율법과 믿음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로마서는 행위 없는 구원을 복음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율법을 세우는 믿음은 행함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fide cum opera)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율법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본래 율법은 선하고 거룩합니다. 영은 율법의 본래성을 회복시킵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새롭게 작용합니다. 새 언약의 빛에서 보면, 율법은 곧 복음입니다.

(김종길 jpic19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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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옥 (221.162.101.213)
2015-11-13 11:16:44
오늘날 한국 교회에 매우 적절한 논문입니다. 삶속에서 믿음의 실천이 없는 신앙은 거짓되고 잘못된 믿음이지요. 바울의 칭의론은 믿음 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고 실천이 동반된 구원론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즉 행위 없는 믿음은 재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칭의 사상에 입각한 루터신학의 맹점을 발견하고 믿음과 실천을 강조한 웨슬리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종교개혁 500주년(2017년)을 맞이하면서 제2의 종교 개혁이 필요하다면 웨슬리 신학을 재발견하는 것으로 촛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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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시작 (211.63.204.48)
2015-11-12 11:48:07
행함있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말씀 백번 공감합니다. 4대째 감리교인으로서 감리교가 살아 있어 너무 기쁩니다.
그런데 신학도 모르는 자들이 이런 진리를 이단이라고 하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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