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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와 하느님 나라
김종길  |  kimzongg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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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6월 01일 (수) 00:25:33
최종편집 : 2017년 06월 03일 (토) 00:01:20 [조회수 : 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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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와 하나님 나라

 

김종길 / 구약학

 

I. 서언

 

한반도에 기독교 선교의 문이 열린 이래, 한국 개신교는 세계가 놀라는 양적 부흥을 이룩하였다. 그런데 성장의 이면에는 짙은 그늘이 있음을 숨길 수 없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은 한국 기독교가 섬기는 다섯 가지 우상을 지적하였다. ① 특정한 정치·경제 이념에 예속된 이데올로기, ② 경전과 교리를 절대화하는 성경문자주의, ③ 땅을 경시하고 하늘을 중시하는 내세관, ④ 무한 성장을 추구하는 기복신앙, ⑤ 돈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맘몬 숭배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 타계적 내세관은, 기독교의 구원관을 왜곡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인습적 내세관으로 말미암아 비성서적인 구원론에 집착하여왔다. 교인들은 잘못된 신앙으로 인하여 시한부 종말론에 집착하고, 탈사회적 행동으로 사회에 물의를 빚기도 한다. 한때 시중에서 <내가 본 천국>,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휴거> 등의 책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 적이 있었다. 말세론에 빠진 교인은 전철역 근처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며 절박하게 전도한다. 일부 교회에서는 천국과 지옥을 방문한 경험을 간증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한다. 다른 한편, 휴거 해프닝으로 이목을 끈 ‘다미선교회,’ 회개 없이 오직 믿음을 내세우는 ‘구원파,’ 왜곡된 메시아와 지상낙원을 내세우는 ‘신천지’ 등의 사이비 종파들이 교회의 음지에서 독버섯처럼 퍼져간다. 이러한 종교적 병증의 밑바닥에는 세대주의적 근본주의에 근거한 인습적 내세관이 깔려있다고 본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가 기여한 바도 있지만, 기독교가 이 사회에 작용한 역기능도 적지 않다. 본고에서는 한국 교회의 천국관과 아울러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 구태여 교회의 치부를 건드리는가? 탈무드에 따르면, “사람의 눈동자가 검은 것은 빛을 보기 위함이다.” 부디 한국 교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통하여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희망한다.

 

II. 한국 교회의 천국관

 

1. 세대주의적 근본주의

한국 교회의 천국관을 이해하려면 그 기저에 깔려있는 기독교 근본주의(fundamentalism)와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본주의’는 1850년대 미국의 보수적 신학자들이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면서 주창한 신학사조를 말한다.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를 비롯하여 식민지를 개척하고자 유럽을 떠난 이주민들은 종교의 자유를 추구하기보다는 종파적이었다. 식민지 내의 종파주의는 미국 근본주의 신앙의 토양이 되었다. 유럽으로부터 전통적인 교리에서 벗어난 신학사상이 들어오자, 이에 반발하여 성서무오설과 예수의 신성을 주장하는 원리주의 신학이 미국 기독교계에 등장하였다. 1910년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발행한 <근본: 진리를 향한 증언>이라는 소책자에 ‘근본주의’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성경의 문자주의를 고집하는 근본주의는 성서비평학을 거부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혐오하였다. 근본주의에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설, 대속론, 육체 부활, 재림, 천년왕국 등이 진리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 남부의 근본주의자들은 국수주의 및 반공주의 등을 내세워 기독교 우파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근본주의는 미국을 지배하는 시대사조가 되었다. 근본주의와 아울러 주목할 신학사조는 ‘세대주의’다. 1820년대 영국에서 다비(J. N. Darby)는 기성 교회를 비판하고 세대주의를 창시하였다. 다비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특이한 역사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역사의 시대를 무죄시대(Innocence), 양심시대(Conscience), 인간통치시대(Human Government), 약속시대(Promise), 율법시대(Law), 은혜시대(Grace), 왕국시대(Kingdom) 등 일곱 세대로 구분하여,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영국에서 건너온 세대주의는 1900년대 초에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고자, 근본주의와 세대주의가 전략적으로 연합하여 세대주의적 근본주의(dispensational fundamentalism)를 형성하였다. 그것은 문자적 성경 해석을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단절을 강조하고,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주장하며, 교회를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하였다. 또한 천년왕국설과 환난 전 휴거를 주장하여, 근래에 물의를 빚은 ‘시한부 종말론’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미국에서 형성된 세대주의적 근본주의는 구한말에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한반도에 이식되었다. 대다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하여 세대주의적 근본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이 땅에서 기독교 근본주의가 유교 근본주의를 대체하였고, 일제 식민지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그 입지를 강화하였다. 세대주의적 근본주의가 주장한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교리가 한국 교회를 지배해왔고, 개혁주의신학은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에야 보급되었다. 종교 근본주의는 역사의 반동으로 탄생하였다. 그것은 절망의 집단적 표출이거나 종교를 가장한 패권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도그마에 집착하는 근본주의는 위험하다. 근본주의는 그 폐쇄성과 경직성으로 인하여 역사를 퇴보시키고 평화를 위협한다. 유교 근본주의가 그랬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그러하며,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가 그렇다. 무지보다 그릇된 신념이 더욱 위험하다.

 

2. 한국 교회의 내세관

한국 교회에서 천국/하늘나라는 무속의 ‘저승’과 연결된다. 다시 말하면, 세대주의적 천국관과 무속적 저승관이 결합하여 타계적 내세신앙을 형성하게 되었다. 일반 교인의 내세관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요약된다. 천당은 저 위에 있고, 지옥은 저 아래에 있다. 천국은 요단강 저편에 있는 실체적 공간으로 인식된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리를 통하여 죄악된 세상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영역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찬송가에서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 구분되어 있다. 그중에 찬송가 234-249장에서 ‘천국’은 ‘내세’로 묘사되며, 주로 장례식장에서 불리고 있다. 구원이란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것인가? 영생이란 ‘나중에’ ‘거기서’ 불로장생하는 것인가?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현세와 아울러 사후세계에 동시에 집착한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이 땅에서 삼박자 복을 누리다가, 죽어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 사람들은 ‘오늘의 구원’에 관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판타지 드라마 같은 천국 간증에 마음이 끌린다. 서점에서는 토마스 주남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 신성종의 <내가 본 지옥과 천국>과 같은 서적이 꾸준히 팔린다. 많은 경우에 교회는 건전하게 사회를 비판하는 능력을 잃고, 사회 구조악과 싸우기를 외면한다. 부조리한 삶의 한복판에서 국가권력과 유착한 교회는 신도에게 정의를 위한 투쟁을 독려하는 대신에 묵종을 강요한다. 신앙의 이름으로 모순된 현실을 외면하고, 기존 질서에 순응하게 한다. 삶에 지친 교인들은 치료제를 거부하고 진통제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종교는 ‘노예의 도덕’과 ‘민중의 아편’으로 전락한다.

종교란 무엇인가? 일찍이 포이어바하(Ludwig Feuerbach)는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에서 다음과 같이 종교를 분석했다.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의식이다. 신 인식은 인간의 자기 인식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질을 대상화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인간학이다.” 그는 종교의 문제를 간파하고, 소외와 해방의 주제를 다루었다. 종교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 신은 인간의 본질을 대상화한 것이다. 긍정적인 면에서, 신이란 인간이 지닌 이상의 표상이다. 다른 한편, 신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내세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 이런 경우에 종교는 신앙하는 인간을 소외시킨다.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확보하는 종교는 참된 종교이지만, 인간을 비하하고 왜소하게 만드는 종교는 그릇된 종교이다. 포이어바하의 종교 이해를 수용한 마르크스(Karl Marx)는 <헤겔 법철학 비판(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에서 다음과 같이 종교를 비판했다. “종교는 번민하는 자의 한숨이고 인정 없는 세계의 심장이며 정신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그것은 민중의 아편이다. 환상적인 행복을 폐기하는 것은 현실적인 행복을 요구하는 일이다. 민중에게 그릇된 환상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버리라고 요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종교가 재생산하는 고통스러운 세계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저 세상의 환상적인 행복을 제시하며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를 변혁하지 못하도록 오도하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것이다. 포이어바하와 마르크스가 유물론에 입각하여 정신적 세계를 비판한 것은 오류이나, 그 비판에는 일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는 겸허하게 그들의 비판을 경청하여, 인간의 자기 소외를 심화하는 천국관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한국 교회의 천국관, 곧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며 현실에서 도피하는 타계관은 성서의 가르침을 곡해한 것이다. 이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살펴보겠다.

 

III.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대체로 하늘(신)과 땅(세계)의 관계를 보는 시각을 동일(同一), 분리(分離), 상관(相關) 등 세 가지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전통적 기독교는 주로 ‘분리’의 관점에서, 페르시아 종교의 이원론(dualism) 및 그리스 철학의 실체론(substantialism)에 근거하여 신학사상을 정립하였다. 이원론과 실체론은 기독교의 천국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근대에 대두한 세대주의적 근본주의는 그러한 교리의 모순을 극대화하였다.

 

1.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구약성서에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가 없지만, 하나님 나라 개념이 시편 및 예언서 도처에서 발견된다. ‘왕’을 뜻하는 멜렉(ךלמ)에서 파생한, ‘통치’ 또는 ‘왕국’이라는 뜻을 지닌 말루카(maluka), 말쿠트(malkut), 마믈라카(mmlaka) 등은 야웨와 결합하여 ‘하나님의 통치/지배’(Herrschaft Gottes)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말라크 야웨’(הוהי ךלמ), 곧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신다는 선언은 이스라엘 신앙의 초석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3). 하나님의 통치가 나중에 하나님 나라 신앙으로 발전했다. 시대에 따라서 하나님의 지배는 신정체제, 예언자적 희망, 묵시문학적 환상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1) 역사서는 ‘신정체제’로 표현된 하나님의 통치를 주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사사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렸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하면 비상시적으로 사사(판관)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왕정시대에는 상시적으로 왕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워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의 지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그의 주권을 행사했다. 신명기를 비롯한 오경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야웨의 요구 의지인 율법이 담겨 있다. 율법은 하나님 통치의 원리와 규범이다. 따라서 인간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2) 하나님 나라는 예언자의 정신과 활동을 통하여서도 나타났다. 예언자들은 세속적 왕권을 견제하며 야웨 하나님의 지배를 선포하였다. 왕권 체제가 왕정신학에 의해 지배자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지 못했을 때, 예언서는 ‘미래적 종말론’의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제시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지상의 왕국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시며, ‘새로운 출애굽’을 시행할 것이다. 야웨께서는 “새 언약”(렘 31:31)을 맺고, “새 영”(겔 11:19; 36:26)을 주며,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을 세울 것을 약속하신다. 예언자들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를 고대하였다.

 

(3) 묵시문학(Apocalyptic)은 예언자의 활동이 중단되고 민족적 위기가 심화된 시기에 등장했다. 신구약 중간기인 기원전 2세기에 셀류쿠스 왕조 안티오쿠스 4세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저항으로, 한편으로 묵시문학이 태동하고, 다른 한편으로 마카베오 혁명이 발생하였다. 묵시문학은 세상의 역사를 포기하고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환상을 보도하며, 현재의 경험을 초월하는 미래의 구원을 묘사하였다. 묵시문학에 따르면, 세계를 통일하고 제패한 열강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고난받는 이스라엘은 조만간에 구원받을 것이다. 다니엘과 같은 묵시가는 ‘묵시적 종말론’에 입각하여, 역사를 초월한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보았다(단 2:44; 3:33; 7:13-14).

 

(4) 히브리 종교는 현실적이다. 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 등 고대 근동의 종교가 내세에 관심한 것과는 달리, 히브리 성서에는 내세사상이 거의 없다. 죽은 자의 세계를 뜻하는 ‘스올’(לוֹא󰚉)에는 보상이나 처벌의 개념이 없다. 히브리 성서는 사후세계를 추구하기보다 현실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에 집중하였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절망의 상황에서 형성된 묵시문학도 내세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고난을 감내하고 시련을 극복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바벨론 포로기에 부활신앙 및 내세사상이 비로소 등장하고,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외경과 위경에서 그것이 강화되었다.

 

(5) 히브리 종교는 페르시아 시대를 거치면서 조로아스터교(Zoroastianism)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원론적인 조로아스터교에 따르면, 선신(Ahura Mazda)과 악신(Ahriman)이 세계의 지배권을 두고 싸운다. 인간은 선신과 악신 가운데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선한 신을 믿는 빛의 자녀들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지만, 악신의 지배를 받는 어둠의 자식들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사탄(ןטשׂ)’은 야웨 하나님에 맞서는 존재가 되었다. ‘스올(לוֹאשׁ)’은 지옥으로 변형되고, 하나님 나라는 사후 세계로 바뀌었다. 알렉산더(Alexandros the Great) 이후 그리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히브리 종교에서 이원론과 내세관이 심화되었다. 그러한 이교적 경향은 제2성전시대를 거쳐서 초기 교회에 전승되었다. 히브리 사상은 그리스 철학의 개념을 빌려서 기독교 신학으로 체계화되었다. 기독교 신학은 히브리 신앙과 그리스 철학의 충돌과 대화의 산물인 것이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초기 교회는 제2성전시대의 유대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도 예수는 예언자 전통과 함께 묵시적 세계관을 함께 수용하였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당시에 유포되어 있는 변질된 천국 개념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예수의 첫 설교에서 드러나듯이,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ύ θεού)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1) 하나님 나라(天國)는 언제 오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눅 17:20) 하는 물음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바이스(J. Weiss)와 슈바이처(A. Schweitzer)가 주장했듯이, 예수는 묵시적 종말론의 관점에서, 긴박하게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공관복음서 전반에서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난다. 묵시문학인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와 미래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을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는 잠정적인 상태이며, 최종 완성은 도달해야 할 목표로 남아있다.

다른 한편, 다드(C. H. Dodd)는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 실재라고 주장했다. 메시아, 곧 하나님의 대행자인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나타났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의 말씀을 읽은 예수께서 그 예언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였다(눅 4:21). 메시아 여부를 확인하고자 찾아온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이사야 35장 5-6절의 예언이 실현된다고 설명했다(마태 11:2-6).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마 12:28),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눅 17:21) 등의 구절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 사건임을 증언한다.

양자의 입장을 종합하면,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 사건이면서 또한 현재적 사건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ἤγγικεν ἡ βασιλεία)라는 문장에서 “가까이 왔다”(ἤγγικεν)라는 동사의 시제는 제1완료인데, 우리말로 과거이지만, 영어로는 현재 또는 현재완료로 서술된다. “The kingdom of God has come near”(NRSV)이라는 구절은 ‘이미 왔다’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뜻을 모두 담고 있다. 곧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왔으며, ‘아직’(not yet)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 비유를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기다려야 하는 천국의 속성을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도래했다. 하나님 나라는 실체적인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가리킨다. 그 나라는 예수 운동으로 ‘이미’ 실현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2)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주기도문의 첫 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에서 ‘하늘’은 어디인가? 하늘은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차원의 개념이다. 하늘은 초월, 완전, 거룩함 등을 상징한다. 마태복음에서 사용된 “하늘나라”(βασιλεία τών οὐρανών)에서 하늘(heaven)은 우주 공간(sky)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한 것이다. ‘나라’를 뜻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는 영토 개념이 아니라 주권, 통치를 뜻한다. 마태복음 13장, 25장 등에서 천국은 신앙자세 또는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 “거할 곳”(μονή) 또는 “거처”(τόπο󰐠)는 피안의 장소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이 용어는 공간 개념이 아니라 ‘관계성’으로 해석됨이 옳다. 여기서 거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떠남으로써 제자들이 하나님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고 교제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의 사후에 그의 가르침이 변경되었는데, 원시 기독교에 침투한 외래적 묵시사상의 흔적을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내세 개념은 이후에 기독교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히브리어 ‘멜루카,’ ‘말쿠트’ 등의 용어도 통치 상태 또는 존재 양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신약성서에 등장한 ‘바실레이아’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말라크 야웨(הוהי ךלמ), 곧 ‘하나님의 지배’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뜻한다. 랍벨(Rob Bell)이 <사랑이 이긴다(Love Wins)>에서 역설하듯이, 천국은 ‘천당’과 같은 피안의 영역을 가리키지 않는다. 천국은 실재(實在)한다. 그러나 이원론적 실체(substance)로서의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펄시 콜레가 본 천국이나 토마스 주남이 다녀왔다는 천국은 우주 공간 어디에도 없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천국은 초월적인 실재인 동시에 인간의 실존적 결단과 자발적 참여를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주체성이 만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태 6:33)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주체적 믿음으로 참여하라는 초청이다. 웨슬리(John Wesley)는 은총과 책임의 조화를 역설했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르치는 것이지, 하나님이 인간을 독단적으로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책임을 짓누르지 않고 인간의 자발성을 불러일으킨다. 틸리히(Paul Tillich)는 기독교의 속죄론이 ‘대속’의 개념에서 ‘참여’의 개념으로 나아가야, 구원의 의미를 올바르게 드러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실존적 소외에 참여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드러난 새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인간도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동참한다. 여기서 구원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뜻한다.

마태복음 6장 9-13절에 소개된 ‘주기도문’의 첫 문장은 명령법 3인칭 단수로 이루어져 있다. 3인칭 명령문은 말하는 이가 주체로서 화자의 의지를 표명한다. 따라서 첫 문장은 기원과 아울러 서원을 포함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ἐλθά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라는 문장은 “제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뜻으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며,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도록 힘쓰겠다는 다짐을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은, 내 나라가 끝난다는 것이다. 탐욕과 정욕을 따르는 사적 왕국을 포기할 때, 우리 가운데 천국이 실현된다. 예수님이 가르친 대로 기도하며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다.

 

(4) 신약성서는 ‘내세’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주전 2세기경에 박해와 순교의 상황에서 발생한 부활사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 그런데 하스몬(Hasmonean) 왕조를 지나면서, 부활신앙과 내세신앙은 바리새 사람들에 의해 현실도피적이고 현상유지적인 교리로 변질되었다. 페르시아 종교의 이원론적 내세관과 헬라철학에서 기인한 ‘이데아’와 ‘영혼불멸설’도 기독교로 수용되었다. 이러한 신앙과 사상은 초기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 종말과 내세는 세간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막 13:32)고 단언했다. 종말의 시기와 사후의 세계는 인간이 알 수 없고,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세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차원이다. 고차원의 세계는 존재한다. 물리학의 ‘끈 이론’(string theory)에 의하면, 우주에는 적어도 열 한 개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한다. 공간과 시간으로 구성된 4차원의 세계에서, 인간은 극히 일부분을 인식할 뿐이다. 차원이 전혀 다른 사후 세계는 인간의 인식 범위를 벗어난다. 고차원에 속하는 종말과 내세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왜 하나님의 영역에까지 침범하려 하는가? 인간이 임의로 말세의 날짜를 계산하거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억측하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기독교 역사에서 ‘내세’와 ‘영생’이 이교적 의미로 왜곡되었다. 복음서에서 ‘내세’란 무엇을 뜻하는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젊은이에게, 예수께서는 현세와 내세에서 누리는 복된 삶에 관하여 말씀했다(막 10:29-30).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현세와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ζωή αἰώνιος)을 누린다. 영생이란 양적 개념이 아니라 질적 개념이다. 여기서 ‘내세’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이온 에르코메논’(αἰών ερχομένον)은 저승이나 타계를 가리키지 않고,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시대를 말한다. ‘영원’(αἰών)이란 시간을 무한정으로 연장한 것이 아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예수께서 제시한 영생이란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삶, 미래를 현재로 끌어들이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삶을 뜻한다.

 

IV. 결언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심각한 병증을 보인다. 삼박자 축복이 보여주는 ‘번영신앙,’ 사후의 천국을 열망하는 ‘타계신앙,’ 그리고 국가조찬기도회로 나타난 ‘정교유착’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필자는 타계신앙과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를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질곡의 역사를 겪으면서 그릇된 내세신앙을 지니게 되었다. 구한말에 미국으로부터 무비판적으로 수입된 ‘세대주의적 근본주의’와 일제 식민정책 및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통하여 형성된 ‘역사인식의 오류,’ 그리고 한국인의 심층에 내재된 ‘샤머니즘’ 등으로 인하여 한국 교회는 종교적 병증에 부대끼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왜곡된 말세론 및 천국관은 일부 교회를 오도하며 사회에 물의를 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선택받은 특정인들만 하늘로 휴거하고, 그들만을 위한 특정한 공간으로 이동한다고 맹신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온갖 신흥 종교와 사이비 종파들이 배양되기에 좋은 환경을 구비하고 있다. 시한부 종말론과 내세의 행복을 강요하는 종교지도자일수록 자신은 현세의 재물과 쾌락과 권력에 집착한다. 소위 정통으로 자처하는 주류 교회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일부 제도를 손질한다고 해서, 교회가 제대로 갱신되지 않는다.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간절히 기도할수록, 오류에 빠진 신앙은 도리어 하나님의 뜻에서 더욱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예언자 예레미야가 선포한 대로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는”(렘 1:10) 것이 이 시대에 요구된다.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면, “교회가 죽어야 하나님 나라가 산다”는 것이다. 심판은 은혜의 다른 표현이다. 파괴와 전복은 건설의 시작이다. 교회는 겸손히 심판을 수용하고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거짓과 탐욕을 청산하고, 교회의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 특정 교파의 교리가 아니라 예수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선 한국 교회의 왜곡된 천국관을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로 바로잡아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페르시아 종교와 그리스 철학의 오류 및 자본주의적 탐욕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성서의 진리가 왜곡되었다. 근본주의와 문자주의는 성서본문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였다. 성서해석의 과제는 상징과 은유로 표현된 성서본문에서 비신화화(demythologizing)와 탈문자화(deliteralization) 작업을 통하여 말씀의 본래 의미를 찾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분리하는 이원론 및 천국을 피안의 공간으로 해석하는 실체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서는 ‘나중,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이제, 여기’에 집중한다. 성서는 ‘오늘의 구원’ 및 ‘영원한 현재’를 가르친다. 성서적 천국은 피안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카이로스’와 도래하는 시대의 ‘아이온’에 관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다(사 65:17; 계 21:1).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완성할 역사를 가리키며, 신인류에 의해 이루어질 이상사회를 상징한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신천지의 중심을 이룬다(계 21:9-22:5).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그날에 신인류에 의해 이상사회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그러나 ‘아직!’ ☯

 

 

   
 

 

※ 작품 해설:

위의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생 레미 요양원에 있을 때, 1889년에 완성한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입니다. 고흐에게 밤하늘은 신비와 무한을 표현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작품에서 밤하늘의 소용돌이는 역동적인 우주를 나타냅니다. 검푸른 하늘은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하고, 노란빛의 별과 불빛은 하나님의 현존과 은혜를 드러내지요. 사이프러스 나무가 오벨리스크(obelisk)처럼 하늘과 땅을 잇고 있습니다. 곧 신과 세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사는 집의 창문에서는 따스한 불빛이 비칩니다. 그런데 구원의 통로인 교회에는 불이 꺼져 있습니다. 아, 교회에 빛이 없다니요! 고흐의 그림은 소유와 권력을 추구하며 생명 없는 교리에 매여 있는 교회 안에 하나님이 부재한 우리의 현실을 고발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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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220.70.232.205)
2016-06-01 12:53:52
왜 자꾸 하느님이라고 하죠?
하느님 X

하나님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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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7
유다 (183.97.157.59)
2016-06-13 09:54:35
하나은행과는 거래하지 마세요. 왜?
하나님 이름에서 '님'짜를 뺀 불경을 저질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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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다림줄 (1.220.214.82)
2016-06-03 09:15:47
신앙과는 상관없이
철학이라는 그늘에 숨어서
엇비슷한 것 같으나 전혀 다른 것을
이슈화시키면 무지한 자 걸려들테고,
대충 봐주면 나중에 또 되뇌이고
그래도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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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면도날 (183.97.157.59)
2016-06-13 09:59:19
물을 마시면
소나 뱀이나 물을 마시면 오줌이 된다.

비유를 많이 늘어놓으면 글이 우스꽝스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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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포이멘 (183.109.98.239)
2016-06-03 23:31:36
.
무당과 목사의 차이를 잘 분별한 글 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목사가 과연 있을 지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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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이장옥 (221.162.101.213)
2016-06-03 10:49:43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잘 정리를 해준것 같습니다. 김종길 목사님의 글은 언제 보아도 글맛이 있고 재미가 있으며 계속적인 도전을 줍니다. 우리가 신학교에서는 이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배웠는데 목회현장에서는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는 잊어버리고 지나치게 내세관에 치중한 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의 목회를 다시한번 점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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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
공부 (14.43.7.225)
2016-06-03 09:25:00
필자의 하나님과 하느님(범신론) 아주 차별화된 뜻을 잘 모르시는것 같아요?
천국과 하늘나라도 잘 구분하셔야 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이 아니고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한국의 오류 성경 말씀이 너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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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
하느님?? (220.70.232.205)
2016-06-01 12:53:52
왜 자꾸 하느님이라고 하죠?
하느님 X

하나님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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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7
유다 (183.97.157.59)
2016-06-13 09:54:35
하나은행과는 거래하지 마세요. 왜?
하나님 이름에서 '님'짜를 뺀 불경을 저질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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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줄 (1.220.214.82)
2016-06-03 09:15:47
신앙과는 상관없이
철학이라는 그늘에 숨어서
엇비슷한 것 같으나 전혀 다른 것을
이슈화시키면 무지한 자 걸려들테고,
대충 봐주면 나중에 또 되뇌이고
그래도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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