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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보낸 하느님, 새로 만난 하느님
김종길  |  kimzongg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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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5월 03일 (화) 13:35:27
최종편집 : 2016년 05월 06일 (금) 23:56:17 [조회수 : 8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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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보낸 하느님, 새로 만난 하느님

김종길(舊約學)


I. 머리말

오늘날 ‘하느님’은 무슨 뜻인가? 작금에 논의되는 근본적인 종교적 주제는, ‘하느님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에 따르면, “현대 세계는 하느님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하느님을 찾고 있다.” 현대 세계가 하느님을 상실하게 된 주된 원인은 전통적 하느님 개념과 현대적 세계관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전통적인 기독교신학에서 하느님 개념은 ‘히브리 예언자의 도덕적 심판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인자’ 그리고 ‘로마 제국의 신성 황제’ 등의 이미지를 조합하여 산출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참된 하느님을 나타내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로빈슨(John A. T. Robinson)은 ‘초자연적 유신론(supernatural theism)’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기독교는 “초자연주의적(supranaturalistic)이어야 하는가?” “신화적(mythical)이어야 하는가?” “종교적(religious)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은 전통적 유신론이 현대 세계에서 그 의미를 잃어간다는 것을 지적한다. 보그(Marcus J. Borg)는 어린 시절에 배운 초자연적 유신론을 “저 바깥에 계신 하느님”(초월적 존재)과 “손가락을 흔드는 하느님”(명령하고 심판하는 존재)으로 묘사했다. 그는 성년이 되어 초월하면서 내재하는 ‘범재신(凡在神)’을 새로 만난 하느님으로 고백한다. 스퐁(John Shelby Spong)은 초월적, 신화적, 종교적 신앙 체계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유배당한 신자(believer in exile)”라고 칭한다. 교회는 유배당한 신자들에게 복음전도라는 명분으로 구시대적 신관을 강요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올바른 세계관을 세우고 잃어버린 하느님을 찾는 일이다.

앞에서 제기한 로빈슨의 질문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만연한 신 인식에도 해당된다. 미국에서 성행한 기독교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성경문자주의’ 및 ‘초자연적 유신론’을 극대화하였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수용하는 인습적 기독교의 신관은 ‘신인 동형적(anthropomorphic)’이고, 초월적(transcendental)이며, ‘초자연적(supernatural)’이다. 의인화된 하느님은 세계 위에 존재하는 지배자다. 교회 안에서는 인습적 기준에 부합해야 믿음이 좋은 신자로 인정을 받는다. 그런데 교회 한구석에 또는 교회 울타리 밖에는 인습적인 신앙 체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이 글은 전통적인 신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실재관에서 하느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래서 히브리 성서의 야웨를 비롯하여 서양과 동양의 신관을 살펴볼 것이다. 그 기저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범재신론(panentheism)에 관심하고자 한다.


II. 실재관의 변이

각 시대의 하느님 개념은 그 시대의 실재관의 반영이다. 전통적인 기독교신학은 고전적인 실재관에 근거하고 있다. 고전적인 실재관은 사물의 본질을 ‘실체(substantia)’로 보았다. 실체는 ‘정신적 실체(res cogitance)’와 ‘물질적 실체(res extensa)’로 구분된다. 고정 불변의 원자로 구성된 물질은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안에서 인간의 주관에서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실체의 철학 및 기계론적 세계관은 중세의 기독교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고전적인 실체 철학에 입각한 교회는 하나의 기구(mechanism)이다. 실체 모형의 교회는 시대를 통하여 완전한 본질을 전승하는 안정되고 불변하는 제도이다. 하느님의 계시는 완결되었고, 교회의 교리는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진다. 교회(聖)와 세상(俗)은 분리되고, 성직자와 평신도는 엄연히 구별된다. 그러나 근대 세계는 중세의 질서를 거부하였다.

근대주의(modernism)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자유에 대한 형식적인 성실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근대는 주체와 이성의 시대이다. 근대인에게 주체의 자유와 이성이 전통과 복종에 앞선다. 따라서 중세의 가치는 거부되고, 신권정체(theocracy)는 민주주의(democracy)로 대체되었다. 둘째로, 근대주의는 실체적 가정들을 전제하고, 자연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이해한다. 기계적이고 유물론적인 자연관은 신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는 신성 체험은 직접적인 경험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근대인은 하느님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느님을 상실한 근대 세계는 상대주의, 허무주의, 유물론, 군국주의, 신종족주의 등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중세와 근대는 신에 대하여 상이한 태도를 보이지만, 저변에서 실체적 사유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오해하든지 하느님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세계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서 사유의 주제가 ‘동일’에서 ‘차이’로, ‘실체’에서 ‘사건’으로, ‘기계’에서 ‘생명’으로 바뀐다. 불변하고 배타하는 동일자는 변화하고 관계하는 ‘차이’로 대체된다. 독립된 존재인 개체와 영속적 존재인 본질을 의미하는 실체는 허상이다. 고립되고 불변하는 존재는 없다. 실재는 유기적이며 변화 과정에 있는 ‘사건’이다. 유기체인 ‘생명’은 부품의 합보다 크다. 근세를 지배하던 기계적 우주관은 현대 이후에는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바뀐다. 동일, 실체, 기계에서 차이, 사건, 생명으로 전환됨은 기존의 세계관을 전복시킨다. 실재관의 변이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낡은 실재관에 입각한 낡은 하느님 개념은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는 새로운 세계관에 입각하여, 진지하게 하느님의 실재를 논구해야 한다.

여기서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의 실재관을 주목하여 보자. 화이트헤드는 데까르뜨(René Descartes)와 뉴튼(Isaac Newton)의 실체 개념을 부정하고, 그 대신에 “현실존재(actual entity)” 또는 “현실계기(actual occasion)” 개념을 제시한다. 실재는 불변하고 고립된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경험적 사건들(experiential events)’이다. 현실계기는 ‘입자’가 아니라 ‘사건’이고, ‘물질의 조각들’이 아니라 복잡하고 상호 의존적인 ‘경험의 순간들’이다. 사건과 경험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흐름’이다. 또한 경험은 고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누구에 의해 경험된다. 경험은 앞선 경험을 요구하며 다음 사건에 영향을 준다. 사건과 경험의 순간들이 실재를 형성한다. 현실존재는 다른 현실존재들을 포착하고 서로를 받아들여, 새로운 현실존재를 형성한다. ‘포착’(prehension)이란 관계성의 구체적인 사실로서, 객체로 주어진 것을 주체 안으로 수용하는 작용을 말한다.

잠재태가 현실태로 되어, 새로운 현실존재를 형성하는 과정을 ‘합생(concrescence)’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는 질서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 합생은 세 단계의 변화 과정을 포함한다. 첫째는 ‘호응(response)’의 단계이다. 각자는 주어진 환경에 반응하여, 현실을 받아들인다. 현실존재는 주체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면서, 자신의 숙명을 수용한다. 둘째는 ‘보완(supplement)’의 단계이다. 현실존재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모색하고 선택한다. 저마다 스스로 욕망을 지니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얻고자 힘쓴다. 셋째는 ‘만족(satisfaction)’의 단계로, 합생 과정이 완결되는 사태이다. 현실존재는 자유와 아울러 숙명을 지닌다. 모든 이상과 목적이 현실화되지는 않는다. 현실존재가 애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자신을 초월하여 그 결과를 기꺼이 수용하여 ‘만족’을 이룬다.

요컨대, 새로운 실재관은 ‘변화’와 ‘관계’를 그 특성으로 지닌다. 실재는 연기적 사건이며, 일련의 상호 관련된 생성(becoming) 과정이다. 변화를 중심으로 보면 실재는 ‘과정(process)’이고, 관계를 중심으로 보면 ‘유기체(organism)’이다. 이것은 무상(無常), 무아(無我), 연기(緣起)를 그 특성으로 하는 불교의 ‘공(空)’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III. 전통적 신관 비판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를 대체로 동일(同一), 분리(分離), 상관(相關) 등 세 가지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신관이 달라진다.

① 동일의 관점은 하느님과 세계는 같다고 본다. 근대사상에서는 신(神)과 우주를 동일시하는 ‘범신론(pantheism)’이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는 신의 보편성과 내재성이 강조된다.

② 분리의 관점은 하늘과 땅은 전혀 다르고, 양자는 만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스 철학은 현상과 본질, 육체와 정신, 자연과 초자연 등 존재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였다. 이에 근거한 정통 신학은 초월적 유신론(transcendental theism) 또는 초자연적 유신론(supernatural theism)을 확립하였다. 하느님은 이 세계를 초월한 ‘전적 타자’(totaliter aliter)이다.

③ 상관의 관점에서 하느님과 세계는 서로 만난다. 하느님과 세계는 둘 다 비어 있고, 그래서 둘은 깊이 만날 수 있다. 주기도문 가운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 6:10)라는 구절에서 하늘과 땅의 소통이 강조된다. 바울은 하느님과 세계의 상호관계를 강조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고, 모든 것 위에 계시며,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신다”(에베 4:6). 여기서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동시에 긍정된다.

세 가지 관점 가운데 동일의 관점은 기독교에 수용되지 않았고, 상관의 관점은 간과되어왔다. 전통적 기독교는 주로 분리의 관점에서 신학 작업을 수행하였다. 기독교신학은 페르시아 종교의 이원론(dualism) 및 그리스 철학의 실체론(substantialism)에 근거하여 신론을 전개하였다. 중세의 신학은 그리스의 ‘이데아(Idea)’ 개념으로 신을 설명하였다. 이데아는 현상에 대하여 본질을, 상대에 대하여 절대를, 개별에 대하여 보편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하느님을 ‘선의 형상(the form of the good)’으로 인식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원인(ultimate cause)’ 또는 ‘부동의 동인자(unmoved mover)’로 이해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독교신학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세의 신학자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본질, 절대, 보편 등의 이데아 개념을 성서의 인격신에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은 ‘창조주’(본질)이고, ‘절대자’(절대)이며, ‘유일신’(보편)이라는 정통 신론을 정립하였다. 중세의 실체적 신론은 그 이후의 기독교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변적인 교리를 통하여 역동적인 하느님 경험은 간접적인 사건이 되고 관념화되었다. 그리스 철학에 경도된 기독교는 성서의 의도를 벗어난 신론을 체계화하였다. 중세의 초월적 신관은 종교개혁을 수행한 개신교 정통주의(orthodoxy)로 이어졌다.

이원론과 실체론에 정초한 기독교신학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실체 신학에서 비롯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니케아 신조’(325년)에 정초된 삼위일체론(trinitarian doctrine)이다. 기독교 교리에서 삼위일체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삼위-일체(tri-unity)는 초기 교회의 하느님 경험에 대한 해석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구체성’과 ‘궁극성’의 편차로 인하여 다양한 신관이 등장한다. 신의 관념에 대하여 구체성을 요구할 때 ‘다신론(polytheism)’이 발생하고, 궁극성을 강조하면 ‘유일신론(monotheism)’이 형성된다. 구체성과 궁극성의 균형을 추구하면 ‘삼위일체적 구조’가 창조된다. 삼위일체는 신앙고백의 언어다. 그런데 고백의 언어를 논리의 언어로 수용할 때, 사고의 혼란이 발생한다. 역동적인 하느님 경험을 문자로 고정된 교리로 대체한 중세 교회는 “세 인격, 한 실체”(tres presonae, una substantis)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삼위일체론은 ‘예수의 신격화’ 및 ‘실체적 하느님’ 이해의 산물이다. 하느님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다. 일신인가, 삼신인가? 중세 신학의 머릿돌인 ‘사도신경’은 로마 제국의 권력과 교회 정치의 산물이었다. 상징과 은유로 표현된 신앙고백을 문자적으로 읽을 때, 오해가 발생한다. 따라서 기존의 교리는 새로운 해석이 요구된다.

인격적이고 초자연적인 유신론은 하느님에 대하여 인간이 내린 하나의 정의다. 도킨스(Richard Dawkins)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도 기독교 전통이 붙들고 있는 신을 “틈을 채우는 자(Lueckenbuesser)” 내지 “작업가설(Arbeitshypothese)”이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신의 대상화이며,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다. 일찍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시대의 문을 연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신은 죽었다(Gott ist tot)”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신’은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세계와 기독교적인 가치를 총칭한다. 따라서 하느님이 죽었다는 것은 플라톤 이래의 형이상학적 세계, 특히 기독교적 최고 가치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가 부정한 것은 성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기독교의 왜곡된 신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교리화된 기독교가 인간의 본능과 생명력을 억압하며, 노예 도덕을 주입하여 인간이 주체적으로 가치를 창조할 기회를 박탈한다고 비판한다. 그의 하느님 죽음의 선언은 분리의 관점에서 전개된 기독교의 신론을 성찰할 것을 촉구한다. 중세의 신학을 비판하고 나온 문예부흥(Renaissance)은 신보다 인간에 관심하였고, 나중에 근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체와 이성을 강조한 근대인은 신앙보다 경험과 실증을 앞세웠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주된 이유는 하느님에 관한 전통적 개념과 현대의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 부재에 당면하여, 학자들은 전통적인 하느님의 개념을 재규정하거나, 전통적 하느님 개념과 현대적 세계관을 단절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실재를 재확증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당면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실재관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상실한 현대인들과 유배 당한 신자들에게 새로운 실재관에 적합한 하느님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제 히브리 성서에서 출발하여 서양과 동양의 하느님을 살펴보고자 한다.


IV.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

새로 만나는 하느님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히브리 성서에 고백된 궁극적 실재인 야웨 하느님을 살펴보는 것이 요구된다. 초기 이스라엘의 신관(하느님 체험)은 기독교 신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엘’과 ‘야웨’는 어떤 하느님일까? 히브리 성서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엘(לא)’ 또는 ‘야웨(הוהי)’로 호명되었다. ‘엘’ 또는 ‘엘로힘(אלהים)’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이지만, 단수의 의미로 사용된다. 엘이나 엘로힘은 문맥에 따라서 고유명사 또는 보통명사가 된다. 예를 들면, 창세기 33장 20절에 나오는 “엘엘로헤이스라엘(לארשׂי יהלא לא)”은 ‘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고 옮겨야 옳다. 앞의 엘은 고유명사이고, 뒤의 엘로힘은 보통명사이기 때문이다. ‘엘’은 가나안 지역에서 널리 통용되는 신명(神名)이다. “전능한 하나님”(6:3)으로 번역된 ‘엘 샤다이’는 가나안 산악지대에서 섬기는 하느님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야웨’는 출애굽 공동체의 신명이다. 야웨는 원래 남부 산악지방에서 유래한, 우레와 폭풍우를 이끌고 나타나는 하닷(hadad) 유형의 신이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을 히브리어로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היהא רשׁא היהא)”로 소개하고 있다. 대체로 예언자들의 하느님 인식은 이 구절로 요약된다. 번역 성경마다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를 다양하게 읽는다.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라는 구절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① ἐγὼ εἰμι ὁ ὤν(LXX). ② ego sum qui sum(Vulgata). ③ I am who I am(RSV, NIV). ④ Ich werde sein, der Ich sein werde(Luther). 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개역). ⑥ “나는 곧 나다”(새번역) 등등.

우리말 성서(개역)에서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를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리스의 신개념인 ‘제일원인,’ ‘부동의 동인’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역동적인 언어로 옮겨야 한다. 히브리어는 논리적인 언어이기보다 감성적이고 역동적인 언어다. 그래서 부버(Martin Buber)는 이 구절을 “나는 내가 현존하고자 하는 대로 현존할 것이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매순간 모든 곳에 현존한다는 것을 뜻한다.

야웨는 ‘에흐예’에서 유래하였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두 용어(야웨와 에흐예)는 모두 “~이다, 있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야(היה)’에 근거한다. ‘하야’ 동사는 ① 존재(Sein), ② 생성(Werden), ③ 작용(Wirken) 등의 뜻을 포함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야웨는 역동적이고 포괄적인 하느님이다.

엘과 야웨는 어떠한 관계인가? 엘/엘로힘은 족장들의 하느님을 가리키고(출 3:15), 야웨는 모세의 하느님을 뜻한다(출 3:18). 가나안의 산악 거민은 그들의 신을 ‘엘 샤다이’로 불렀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 사람들은 하느님을 야웨라고 불렀다. 신명의 결합은 서로 다른 신앙의 융합을 시사한다. 출애굽 공동체와 지배 세력에 대항한 가나안 농민군이 야웨 신앙을 중심으로 부족 연합인 이스라엘을 형성하였다. 두 집단이 연합하면서 엘 신앙과 야웨 신앙이 하나로 결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야웨와 엘 샤다이가 결합되어 등장하는 창세기 17장 1절은 그러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엘로힘과 야웨가 한 하느님으로 융합되어, 공동체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되고, 하느님 이름은 ‘야웨’로 통일되었다. 광야 및 가나안의 산악지역에서 밑바닥 사람들이 섬기던 신이 통합된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야웨’(출 3:18; 7:16; 9:1, 13; 10:3 등)라는 칭호는 이집트 및 가나안의 지배자에 맞서 약자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속성을 보여준다. 야웨는 가나안의 지배 계층이 섬기는 만신전의 엘과 싸운다. 민중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여호와는 용사’(출 15: 3), ‘만군의 여호와(삼상 1:3; 시 59:5),’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 24: 8) 등의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문자주의 관점에서 읽으면, 이러한 구절들에서 호전적이고 폭력적인 신관을 도출할 수도 있다. 히브리 사람의 하느님 야웨가 근본주의 신학에 의해 제국주의적인 전쟁신으로 둔갑하는 것을, 미국의 부시 정권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제3세계를 침공한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히브리 성서는 택일신론(henotheism)에서 발전된 유일신 신앙(monothrism)을 제시한다. 그러한 신앙고백은 신명기 6장 4절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난다: “야웨 엘로헤누 야웨 에하드(דחא הוהי וניהלא הוהי).”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개역).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새번역). 이 구절에서 ‘에하드’(דחא)는 야웨의 유일성을 강조한다. 야웨가 유일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유일’은 숫자상 하나의 개체를 뜻하지 않으며, 여러 신들 가운데 최고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유일한 여호와” 또는 “한 분”은 하느님의 궁극성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유일신이란 궁극적 실재를 뜻한다.


V. 현대 서구의 하느님 인식

기독교신학의 주도권이 서양에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인습적인 신론에 관한 서술은 생략하겠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서구의 신학은 이원론 및 실체론에 근거하였다. 그러한 신학으로부터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에 대하여 전통적인 신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신론을 전개한 철학자 화이트헤드와 신학자 틸리히의 사유를 살펴보겠다.

1. 화이트헤드의 신론

유기체 철학을 주창한 화이트헤드는 고전 실재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실재관에서 하느님을 논의한다. 그는 실체 개념 대신에 현실존재(actual entity) 또는 현실계기(actual occasion) 개념을 제시한다. 실재는 불변하고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경험적 사건들(experiential events)’이라는 것이다. 현실계기는 ‘입자’가 아니라 ‘사건’이고, ‘물질의 조각들’이 아니라 복잡하고 상호 의존적인 ‘경험의 순간들’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실재는 네 가지 궁극적 요소, 곧 현실존재, ‘영원대상(eternal object)’, ‘하느님(God)’ ‘창조성(creativity)’으로 구성된다. 이 세계는 현실존재로 있고, 나머지 세 가지는 형식적 범주이다. ‘영원대상’은 현실존재를 규정하는 한정의 형식이며 순수한 가능성이다. ‘하느님’은 구체화의 원리로서, 창조 과정에 질서를 부여하고, 세계의 생성 과정을 유도한다. ‘창조성’은 궁극적 원리이며 새로움의 원리이다. 창조성에 의해 각 현실존재는 여럿(다수의 개체)을 이루고, 여럿은 하나(복합적 통일체)를 이룬다. 이러한 요소들은 잠재적 가능태로서 현실존재와 더불어 합생 과정에 참여하여 구체적인 현실 세계를 창조한다.

화이트헤드는 하느님을 현실존재로 파악한다. 현실존재인 하느님은 이 세계의 생명 속으로 들어오는 ‘신적 과정(a divine process)’으로서, 만물과 더불어 있으며, 시간적인 세계와 함께 성장한다. 하느님은 만유 위에 있고, 만유 안에 있으며, 만유와 함께 일한다(에베 4:6). 하느님과 세계는 상호 실재적인(real) 내인적 관계(internal relation)에 있다. 하느님은 세계에 영향을 주고,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세계가 하느님 안에 있듯이, 하느님은 세계 안에 있다. 하느님이 세계를 초월하듯이, 세계는 하느님을 초월한다.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하듯이, 세계도 하느님을 창조한다. 세계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권능은 제한적이다. 모든 피조물도 자기 원인(causa sui) 및 고유의 목적을 지니고, 스스로의 힘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전통 신학에서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독재자로 인식된다. 그러나 과정으로서의 하느님은 스스로를 제한하여, 인내로써 세계를 설득하고 인도하는 사랑의 하느님이다. 전통적인 신관을 넘어서는 화이트헤드의 과정 형이상학은 동양적 사유를 지향한다.

2. 틸리히의 신론

틸리히(Paul Tillich)의 신학은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자연신학적 방법’을 채택한다. 그것은 위로부터(계시에서) 출발하지 않고 아래로부터(존재와 인간의 상황에서) 출발한다. 전통 신학과는 달리,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종교(인간 경험)에서 신학적 작업을 시작한다. 세계의 현상 일반은 경험적 사실에 근거한다. 종교 역시 현상의 하나로서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며, 따라서 하느님의 실재도 인간의 경험에 근거한다. 그는 상관적 방법(method of correlation)으로 신학 작업을 수행한다. 그것은 실존 상황에 내포된 문제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대하여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신학적으로 응답한다. 그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하느님을 전제하지 않고 하느님을 인간이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틸리히 신학의 특성은 변증적이며 철학적(존재론적)이다. 화이트헤드와 틸리히는 공통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나아가는 방법론으로 하느님의 실재를 탐구한다. 화이트헤드는 우주론으로 ‘신학적 철학’을 전개하고, 틸리히는 존재론으로 ‘철학적 신학’을 구성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인지와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분이다. 하느님은 다른 존재들과 나란히 있거나 다른 것들 위에 있는 한 존재의 실존으로 이해될 수 없다. 만일 하느님이 하나의 존재라면, 유한의 범주, 특히 공간과 실체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하느님을 높이가 아니라 깊이로 파악한다. 하느님은 한 존재의 실존이 아니다. “하나님은 실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실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최고의 존재가 아니라 궁극적 실재인 “존재자체(being-itself)”이다. 존재자체는 한 인격이나 한 존재가 아니라, 만물을 있게 하는 “존재의 근거”이며 “존재의 힘”이다. 궁극적 실재로서의 하느님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이다. 신비한 현존인 하느님은 생명의 무한한 중심으로서, 모든 존재에 참여하여 생명을 부여한다. 존재의 근거인 하느님은 궁극적인 동시에 구체적이며 거룩한 존재이다. 거룩한 하느님의 현실성은 ‘하느님은 존재자체이다’라는 비상징적 언어로 표현된다. 이에 근거하여 ‘하느님은 창조주이다,’ ‘하느님은 영이다,’ ‘하느님은 사랑이다’ 등의 상징적인 진술로 하느님의 현실성을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궁극적 실재로서의 하느님은 “하느님 위에 있는 하느님(God above God)”이다. 전통적인 신관을 극복하려는 틸리히의 ‘존재자체’도 동양의 사유에 접근한다.

3. 범재신론(panentheism)

위에서 살펴본 화이트헤드와 틸리히의 사유는 범재신론에 근접한다. 그러면 범재신론이란 무엇인가? 유신론(theism)에는 다신론(polytheism),  택일신론(henotheism),  유일신론(monothrism) 등이 있다. 성서는 ‘유일신’을 제시한다. 그런데 오늘날 유일신론이란 용어는 초월적 유신론 또는 초자연적 유신론으로 오해되고 있다. 따라서 유일신론 대신에 ‘범재신론’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범재신론(panentheism)이란 모든 것(pan)이 하느님(theos) 안에(en) 있다는 사상이다. 역으로 하느님(theos)은 모든 것(pan) 안에(en) 있다는 명제도 성립한다. 범재신론은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긍정한다. 과정신학자 하트숀(Charles Hartshorne)에 따르면, 세계는 하느님의 몸이고, 하느님은 세계의 영혼이다. 보그(Marcus J. Borg)는 하느님은 모든 것 이상이지만, 모든 것 안에 있다고 말했다. 이를 부등식(inequality)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Θ ≧ π. [하느님(theos)은 세계(pan)보다 크거나 세계와 같다.]

인습적인 교리에서 신은 이원적이고 실체적인 존재이다. 신은 세계와 분리된 최고의 실체이다. 이러한 신은 인간의 갈망이 투사된 것으로 만들어진 신, 곧 우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초월적이고 전지전능한 존재로 여겨지는 우상을 조종하여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고, 결국 우상에게 예속된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그런 신은 죽었다! 우상 신을 죽여야 참 신을 찾을 수 있다. 신은 하늘 위에서 군림하는 초자연적인 인격체가 아니다. 범재신론에서 신은 이원론적이고 실체론적 존재가 아니다. 에카르트(Meister Eckhart)에 따르면, 하느님은 인간 안에 있는 ‘신성(Godhead)’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에서 경험되는 거룩한 의지다. 신앙이란 어떤 대상을 숭배하고 그 대상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비본래적인 자기에서 벗어나 내 안에 있는 신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을 지닌 사람은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느끼며 행동한다. 신은 세계 안에서 자연과 인간을 생성하고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이러한 범재신론은 동양의 사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VI. 동양의 하느님 인식

1. 주역에 나타난 하느님

궁극적 실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서를 통하여 계시되었다. ‘야웨’는 히브리 사람의 독특한 하느님 경험을 표상한다. 그러나 계시는 이스라엘의 전유물이 아니다.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유일신의 흔적은 동양의 실재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양 고전인 주역(周易)을 통하여 궁극적 실재를 논하는 것도 가능하다. 주역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을 ‘역 자체(易自體)’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와 생성의 근원인 역 자체는 모든 변화의 현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원초적 역(primordial change), 움직이는 동인자(moving mover), 변화하는 변화자(changing changer)이다. 역의 하느님은 정통신학의 초월적 유신론보다 더 실재적이다. 궁극적 실재인 태극은 양극과 음극을 포괄한다. 하느님은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이다. 하느님은 부성과 아울러 모성을 지닌다. 하느님은 정의로 심판하면서, 자비로 용서한다. 양극성적인 역의 하느님은 양자택일을 지양한다.

독일의 자연철학자인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kolaus Cusanus)는 유한한 세계의 모순이 무한의 영역에서 해소된다는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를 제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절대자인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차별과 대립과 갈등은 소멸하여 일치한다는 것이다. 주역의 음양론에서 영감을 받은 보어(Niels Bohr)는 “반대되는 것은 서로 보완이 된다(Contraria sunt complementa)”고 주장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부분과 전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생각은 맞느냐 틀리느냐, 있느냐 없느냐, 선이냐 악이냐 등과 같은 양자택일의 생각이다. 우리가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한에는 어떠한 새로운 것도 창조할 수 없다.” 양자택일은 서양적 도식이다. 동양적 사고방식은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에서 ‘이것도 저것도’(both… and)에로 나아간다. 역의 하느님은 ‘이것과 저것을 모두’ 변증법적으로 통일한다. 그러므로 궁극적 실재로서의 태극과 히브리 성서의 야웨는 역동적이고 포괄적인 하느님으로서 만난다.

2. 한국의 전통사상에 나타난 하느님

한국의 전통사상에 나타난 ‘하늘님/한님’ 신앙에도 히브리 성서의 유일신을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준비되어 있다. 이를테면, <천부경>과 <삼일신고> 등에 나타난 종교사상, 구한말에 등장한 동학(東學)의 한울님 신앙은 히브리 성서에 계시된 야웨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유를 정리한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은 여러 종교와 진리의 모체가 된다. 거기에 나타난 일즉삼(一卽多), 삼즉일(多卽一)의 원리에 기초한 천(天)·지(地)·인(人)의 ‘삼신일체(三神一體)’ 사상은 유일신 논쟁을 해소할 논리구조와 패러다임을 담고 있다. <삼일신고(三一神誥)>는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이 모여서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執一含三 會三歸一)을 근본 뜻으로 삼는다. 天·地·人의 삼신일체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상응하는 논리구조를 내포한다. 구한말에 등장한 동학사상은 신성(神聖, numen)에 대한 깊은 체험과 통찰을 지니고 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는 탁월한 신인식이다. 이에 근거하여 하느님을 공경하듯 사람을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은 수준 높은 윤리사상을 보여준다. 이제까지 서양의 신학을 통하여 이스라엘 종교를 해석하여 왔다. 이제는 우리의 언어로 주체적으로 하느님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리하면, 동양의 종교와 철학을 통해서 성서의 계시를 수용하는 것도 타당하다고 본다. 화이트헤드가 지적한 대로, 동양의 사유는 과정 형이상학과 상통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성(Godhead), 주역의 태극(太極), 노자의 도(道), 불교의 공(空), 동학의 한울님은 모두 범재신론의 범주에 포함된다. 실체적 존재가 아닌 하느님은 이름이 없다. 이름할 수 있는 하느님은 참 하느님이 아니다. ‘이름 없는 하느님’은 ‘공(空)’ 또는 ‘절대무(絶對無)’이다. 이러한 뜻에서 유영모는 하느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 한 것이다.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하느님을 넘어선 하느님(God beyond God)’이다.


VII. 맺음말

오늘날 ‘하느님’은 무슨 뜻인가? 인습적인 신관이 현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외래적인 하느님 개념이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한국 교회는 구한말에 미국에서 전수된 세대주의적 근본주의 기독교의 지배를 받아왔다. 교회는 문자적이고 기계적으로 성서를 해석하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으로 전도한다. 구시대의 실재관에 근거한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신개념을 현대인에게 강요함으로써 교회는 유배당한 신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근자에 세대주의적 근본주의 토양에서 시한부 종말론이 발생했고, 구원파나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 종파가 성행하여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난제는 그릇된 실재관에 근거한 인습적인 교리에서 비롯되었다.

기독교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융합된 것이다. 페르시아의 이원론과 그리스의 실체론에 근거하여 전개된 기독교 신학은 초자연적 유신론과 실체적 삼위일체론을 도출하였다. 전통적으로 하느님은 ‘저 위에’ 또는 ‘저 밖에’ 있는 최고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기독교는 한 몸에 머리가 셋인 이상한 하느님을 산출하였다. 그러한 신관은 성서와 부합되지 않는다. 과학의 놀라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기독교는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의 세계관을 고수하려 한다. 폐쇄성 종교는 역사에서 생명력을 상실한다. 올바르게 하느님을 이야기하려면, 실재관과 세계관을 바꾸어야 한다.

기존의 하느님을 떠나보내야 새로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새로 만난 하느님은 실체론을 벗어난 ‘하느님을 넘어선 하느님(God beyond God)’이다. 하느님은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긍정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 위에 있고, 모든 것 안에 있으며, 모든 것을 통하여 일한다. 이러한 견해를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한다. 성서의 증거와 아울러 인간의 종교 경험이 범재신론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믿음의 전거로 삼는 것은 히브리 성서가 전승하는 유일신 신앙이다. “여호와는 유일한 하나님”라는 신앙고백은 이스라엘 종교의 독특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문자주의 관점에서 성서를 읽을 때, 유일신 신앙에 대한 오해가 발생한다. ‘유일’ 또는 ‘하나’를 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여러 신들 가운데 최고의 존재라고 여긴다. 여기서 ‘유일’은 배타적인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궁극성을 표현한 것이다.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유일신은 ‘궁극적 실재’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종교는 수메르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이집트 문명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았다. 히브리인들은 고대 근동으로부터 유입된 종교적 소재를 창조적으로 변용하여 독특한 야웨 신앙을 형성한 것이다. 히브리 성서에서는 토착화 및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논의가 열려 있다. ‘하느님을 넘어선 하느님’은 타종교 및 동양사상과 만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샘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셔야 한다. 실체론에 근거한 서구 신학의 종속에서 벗어나, 우리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서를 통하여 드러난 궁극적 실재를 우리의 고유한 그릇에 담아서 고백해야 한다. 히브리 성서에 계시된 궁극적 실재를 각 시대의 역사와 각 지역의 문화에 알맞게 담아내는 것이 살아있는 신학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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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무 (222.232.7.121)
2016-05-05 11:32:58
간단히 매우 잘 요약정리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길 기대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리플달기
9 0
황규봉 (204.237.0.41)
2016-05-07 13:26:02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저희 신앙공동체가 함께하고자 하는 신학이 담겨 있어 정말로 반갑고 감사햇습니다. 저희는 카나다 토론토에있는 연합교단에 속한 한인교회입니다. 항상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독교 신학을 추구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따라가고자 합니다.
계속적인 좋은글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리플달기
5 0
랄프왈도에머슨 (183.109.99.69)
2016-05-07 03:23:09
.
범재신론, 예수님과 성령님을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범재신론이 설명할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 도교 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구원론은

기독교와 천주교는 성도가 되는 것이고

불교는 부처가 되는 것이며

유교는 군자가 되는 것이고

도교는 도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구원의 방법이겠지요.

기독교와 천주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불교와 유교와 도교 등은 수행(행위)를 통하여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와 천주교는 믿음을 통하여서 성인이 되어 푯대를 향하여

성령의 법을 따라서 자라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법이란 성경과 윤리와 세상의 법을 모두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 만난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삶을 통해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만난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요한복음 10장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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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0
장준식 (216.186.177.101)
2016-05-05 05:47:30
좋은 글, 아쉬운 점
신론에 관한 최신의 논의를 담고 있는 참 좋은 글이네요. 원래 각주가 있었을텐데, 여기에 글을 올리면서 제외시켰나보죠? 각주를 빼고 올린 게 조금 아쉽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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