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현 문학과 박흥규 목사

깊고 푸른 강과 푸른 언덕의 어울림 

1 회상 그리고 기억

2015년 3월 26일 강인호 목사가 녹우당 박흥규 목사를 지칭해서 ‘가슴에 비가 내리는 이’ 라고 했던 대굴령(대관령을 박 목사가 부르던 말) 수목신앙의 주인공 박흥규 목사 2주기가 되었다. 생전에 김영현 소설가를 소개해주고 박흥규 론을 써주었으면 하시던 것이 가슴에 맺혀 있던 나는 불현듯 김영현 소설들을 놓고 박흥규 목사 등장하는 소설 몇 편을 골라 읽게 되었다. 감리교 목사로 흔하지 않게 소설에 실명으로 등장한 박흥규 목사는 별로 대중적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못내 외면하기도 어려운 그런 어른 가운데 한분이셨다. 딱 부러지게 혁명적이지는 않으셨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농민운동까지는 몰라도 농촌목회자로서 의식이 남달랐고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면서 후배들의 농민운동을 방해하거나 반대하시지는 않았던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셨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목사라는 영역을 지키시고 시대의 고뇌를 안고 살면서 대중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던 고독한 분이셨다. 그래도 그를 알고 아끼는 후학들이 있어 세상뜨신지 2년째가 되었던 날에도 여전히들 많이 모여 그분을 추모하고 산지를 둘러보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는 뚜렸한 흔적을 보게된다.

나는 그분을 1980년 한창 뜨겁던 여름 어느날 대굴령에서 만났다. 훨씬 커다란 몸집에 사람 좋은 표정의 박 목사님은 그해 봄 보안사에 끌려가서 어처구니없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고초를 당하셨고 결국은 동해안 목회를 접어버리고 칩거하고 계시던 때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날 밤 대굴령 옛 화전민촌 어떤 집터에 일단의 청년들이 한데 어울려 저녁을 먹고 대화를 나누던 자리였다. 서울은 YH 사건으로 사건관련자들이 끌려 들어가고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함께했던 지인들이 서울을 떠나 옥계에 칩거하고 있던 인천산선의 김동완 목사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물론 이튿날 우리 일행은 옥계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대굴령 박 목사를 보고 놀다가 가자는 그런 계획으로 모인 자리였다. 그날 밤의 별은 아름다웠다. 검푸른 밤 하늘의 꼭대기에 찬연히 빛나던 별들의 초롱초롱한 우주를 산책하면서 우리는 도도했고 밤 깊은줄 모르는 거침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들 녹아떨어져 잠이 들었다. 대굴령의 새벽을 그렇게 맞았다.

2. 박흥규 목사와 김영현과 만남

박흥규 목사가 남긴 대굴령 숲속에서 맞는 새벽은 2008년 3월 1일에 저자로부터 직접 받았다. 꾹꾹 힘주어 쓴 박 복사님의 필적으로 보아 오랜만에 만난 것을 기념하여 증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 첫 장에는 대굴령 옛길 주막터 근처 숲에서 농사짓고 나무심으면서 살아 왔던 생활기록물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1974년부터 화전민촌 일부를 매입하여 가꾸고 살피면서 지내왔고 결국은 조기은퇴를 결행한 후에는 일년에 절반씩을 그곳에 들어가 산사람처럼 들사람처럼 자연 속에서 살았다. 자연인의 소박하지만 고독한 삶의 내면을 살피는 성찰로 가득한 그의 글들은 평생을 글쓰고 설교하며 살았던 목사의 생활을 고스란히 떠 담아내고 있었다. 단지 신학적인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인류학도 신화학도 넘나들면서 고독한 산책자의 성찰처럼 지나간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장래를 전망하며 살았던 노동일기였다. 그의 고백록이나 다름없는 문집은 나에게도 살갑게 다가왔다. 목사의 말년은 고독하다. 교회를 떠난 이에게는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지인들도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을 내지 않는다. 가까웠던 강인호는 미국으로 제 살길을 찾아 갔고 서울에 남은 것들은 다 제 잘났다고 분주하게 살기 바쁘다. 그래도 살갑게 대해주는 이들은 역시 당당뉴스의 이필완 목사, 신앙과 지성사의 최병천 장로다. 이들은 박 목사님 말년의 친구들이었다. 의리를 다해서 보필하였고 말벗이 되어 주었지. 아 색동교회 송병구 목사도 있다.

이 글의 제목은 김영현 문학과 박흥규 목사이다. 그것은 왠고 하니 소설가 김영현 씨를 통해서 묘사된 목사 박흥규 목사의 이미지는 흔하디 흔한 투사 목사가 아니고 강원도 동해안 간성이라는 군부대 옆에 있는 작고 가난한 농촌교회에서 목양자로서 살아가던 젊은 날의 박흥규 목사의 초상을 생생하게 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설 형식이 워낙 신학생의 그것 같아서 읽기에 불편하지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더욱 끌리는 것은 소설가 자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운동권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마치도 에큐메니칼 신학의 자기성찰록 같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김영현의 소설은 대략 세편에 걸쳐서 박흥규 목사를 입에 올리고 있다. 맨 처음이 포도나무집 풍경이, 그리고 내 마음의 서부, 그리고는 그해 겨울 톱밥 난로 였다. 1985년 같은 시기에는 수도권도시선교회의 빈민운동가 허병섭 목사가 빈민출신 이동철을 만나고 겪었던 밑바닥 주민들의 삶을 소설화 한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에 공 목사로등장하고 있었다. 허 목사니까 허당이라고 공목사란 닉 네임을 붙인 것이지만 이철용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기독교 목사는 참 진지하고 내용 찬 사람이었다. 이철용은 빈민운동을 통해서 소설같은 인생을 증언했고 그것을 가지고 황석영 손에 윤색되어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소설로 재탄생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이장호, 배창호 영화에 등장하여 빈민운동의 이야기를 대중화하였다.

이시절 민중문학의 낭만파인 김영현은 군부대 시절의 감리교 박흥규 목사를 등장시켰다. 강원도 간성이라는 척박한 접적지구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목회하고 있던 박흥규 목사가 등장한 것이다. 운동권 출신 사병인 주인공을 어느 추운 겨울 주일날 만나면서 시작하는 소설은 김영현 문학의 초창기를 가득 채워주는, 소박하나 투박한 힘이 넘쳐나는 어느 농촌 교회 목사의 이야기였다. 성만찬에 떡을 떼고 막걸리를 나누는 대범하나 소박한 농촌목회자로 묘사되는 박흥규 목사는 김영현 청년의 고통스런 투쟁적인 삶의 한복판에 동행하고 있었다.

훗날 군에서 제대하고 소설가로 데뷔한 포병대대의 일등병 김영현은 1980년 봄을 간성에서 맞았다. 녹화사업의 목표물로 찍혀 있는지도 모르고 나날을 보내던 김영현에게 강릉 보안대가 들이닥쳤고 관련자들이 일제히 연행되면서 사건이 발생한다. 1980년 광주사태로 시발된 이 사건은 접적지구 동해안에서는 있어서는 안될 충격적인 군부대내에 침투한 반정부 활동가들을 군부대 밖에서 민간인 목사가 개입하여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동해안에서 목회하고 있던 이오 이현주 목사도 관련되어 있었다. 박흥규 목사가 개척한 강릉 푸른교회에서 위촉한 강연 ‘한반도 분단과 한국기독교’를 준비중이던 이현주 목사도 느닷없이 보안대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았고 옥계에서 놀고 있던 수도권도시선교회의 김동완 목사는 사건을 맞아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1980년 봄 5.17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나서 동해안의 박흥규 목사는 강릉 푸른교회를 목회하던 중 이현주 목사와 같이 연루되어 강릉보안대에 끌려갔다. 그때 간성교회 목회하던 시절 알게 되었던 포병대대의 현역병 김영현과 일행들도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렇게 서술된 사건은 제대하고 소설가로 활동하던 김영현의 1995년도 작품 '내 마음의 서부'에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는 실천문학사 대표로 있던 2007년 여름에 나온 김영현의 산문집 ‘나스메 소세키를 읽은 밤’에서도 다시한번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휴가를 갔다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광주사태가 터졌다. 나와 임국진은 강릉 보안사령부로 끌려갔다. 태백공사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근 한달 간 잠 한숨도 자지 못하고 온 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 그들이 끄집어 내려고 한 사건인 즉슨 우리가 외부의 박 목사와 결탁하여 군대 내에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의식화된 병사들을 모아 불순한 조직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학생운동의 전력이 있는 나의 이력이 군부에 걸려들었는지도 몰랐다. 들리는 풍문에는 민간인 신분임 목사님은 강릉교도소에 갇혀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사건은 증거불충분으로 인해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마무리가 되었다. 우리는 다시 부대로 돌아 왔고 목사님은 더 이상 강릉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서울로 갔다고 했다.]

박 목사는 3년 남짓 목회하던 간성교회를 떠났다 그리고는 뜻한바 있어 강릉시내에다 푸른교회 라는 이름의 새 교회를 개척하였다. 강릉의 여러 대학들을 상대로 전도도 하고 청년들도 모아보자고 하는 뜻에서 시작한 개척교회였는데 마침 선 동인이자 시인인 이오 이현주 목사를 모시고 개척교회 기념 강연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강연 제목도 '분단 현실과 한국기독교' 였다. 그런데 그해 봄 광주사태가 터졌다. 박 목사는 신군부가 등장한 상황에서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죄명은 광주사태 관련 유언비어 유포 죄였다. 김영현과 다른 한사람에게 외부에서 사주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조사를 받은 것인데 교도소까지 갔었다. 다행히 밖에서도 노력하고 사건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판단으로 석방되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박 목사에게나 여러 동료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반공 분위기로 착 가라앉아 있던 동해안 교계에서는 깜짝놀랄만 한 사건이었고 아뭇소리도 못하게 하는 시국사건이었다.

수습에 미온적이었던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김동완 목사가 개입한 것이다. 사건 발생 후 박 목사는 곧 바로 강릉을 떠났다. 그리고는 임시로 감리교 선교국에 와 있었다. 1981년 이듬 해 박 목사는 김포 월곳교회로 부임했다. 당시에는 목회자가 시국 사건에 연루되기는 어려웠다. 기독교 학생운동 조직이나 도시산업선교 실무자들이 잡혀가는 경우는 있었지만 지방에서 그것도 일선 목회자가 체포된 것은 전무한 일이었다.

당시 사건을 직접 겪고 회고하고 있는 김영현의 소설 ‘내 마음의 서부’ 에 보면 이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대관령에 밤나무를 심고 젖소를 키우고 비닐하우스에다 꽃을 키워 공동체를 일구어 보겠다는 박 목사의 꿈은 그러나 5.17과 더불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합동수사본부의 이름을 붙인 보안대에 끌려가 광주와 관련된 유언비어 유포죄로 근 보름간 참혹하게 시달리다가 가까스로 풀려났을 때 그는 이미 더 이상 그곳 강릉 주변에 머물러 있을 힘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푸른교회를 정리한 다음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에 올라와 있다가 김포에 있는 한적한 농촌교회로 나려갔다. 엄청난 격변 속에서 정민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그는 그동안 다니던 시멘트 공장을 그만두고 이년간 피해 다니다가 부천에 있는 공장에 들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 박흥규 목사가 툇마루에 앉아 쉬고 있다 ⓒ 2005 이필완

3. 대관령과 포도나무집 풍경

대관령 화전민촌 땅을 매입한 박 목사는 그곳에다가 기독교 공동체를 일구겠다고 하였다. 농사를 짓고 함께 살면서 자연인으로 돌아가 살겠다고 하는 소박한 박 목사의 꿈은 사실 가능한 것이었다. 박 목사는 그곳에 흔해빠진 기도원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성공회의 토레이 신부가 강원도 태백산골에 들어가서 땅을 일구고 기도원을 시작하였다. 원래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던 선친의 뒤를 따라 한국 땅에 들어온 성공회 아처 토레이한국면 대천덕 신부는 예수원을 개척하였다. 토레이의 예수원은 기도운동도 하지만 농사공동체도 일구면서 영성의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예수원은 성공회적인 영성생활의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박 목사의 공동체 구상은 공동체이긴한데 농사짓고 함께 사는 농민기도원 같은 것이었다. 대관령에다 정착촌을 세우고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유치원도 세우고 농장을 관리하여 생산자 공동체를 일구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는 농민운동보다는 농촌공동체를 먼저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목회에서 출발시켜 운동차원으로 발전시키되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토레이의 예수원은 1975년 시작되었다. 예수원에서는 삼수령 목장을 먼저 착수하였다고 한다. 젖소를 기르고 자원봉사로 들어온 이들이 봉사자로 일했다. 현재는 삼수령 농장에는 젖짜는 소만 70두이고 목부가 18명이나 된다고 한다. 생명강 대안학교도 운영한다. 대안학교 붐을 타고 예수원은 청소년들을 새롭게 훈련시키는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예수원에는 연간 9천명에 달하는 기도원을 찾는 구도자들이 온다.

박 목사의 입장을 들어보자. 2008년 나온 고희 기념문집이 제일 확실한 것인데 대담자인 최병천 장로와 나눈 이야기 이다. 박 목사는 원칙적으로 달랐다.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팔려는 노력보다 내 상품을 독창적으로 만들어서 교인들에게 공급하려는 신념을 가졌지요”

이말을 덧붙여서 강조한 대목은 소설 ‘내 마음의 서부’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누구나 자기의 대관령을 가지고 있어요. 지배도 감시도 없는 완전한 자유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향수 말이에요. 거기에 비하면 강원도 대관령이란 하나의 우상일 뿐이에요.]

여기에 대해 김연현은 소설 속에서 박 목사의 구상을 가지고 이런 생각을 떠올린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또 다시 문득 서부가 떠올랐다. 끝없는 초원을 달리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많은 들소 떼들, 그 가운데 흐르는 깊고 맑은 강 머리에 독수리 깃털을 꽂은 인디언 처음엔 지지만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서 끝내 이기고야 마는 보안관 커튼처럼 드리워져 내리는 붉은 노을, 정의와 사랑이 넘쳐흐르는 그곳 서부가.]

4. 김포 월곳교회와 포도나무집 풍경

▲ 김영현(소설가) 1955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창작과 비평》에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멀고 먼 해후》,《달맞이꽃》, 《엄마의 발톱》,《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폭설》 등이 있다. 실천문학사 대표를 역임하였다.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생생한 기록과 고통스런 삶의 현실을 그려내는 작가이다.

김영현은 1990년 ‘포도나무집 풍경’이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이 소설의 발표는 동해안에서 겪은 사건이 지난 후 5년이나 지나서였다. 당시 김포 월곳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던 박 목사를 김영현이 찾아온다. 소설가 김영현은 김포로 나와서 어떤 사건의 보고서를 쓰려고 했다. 그는 월곳에서 한 주간을 머물면서 글을 쓰려고 왔던 것이다. 그날 오후 소설가 김영현은 서둘러서 김포로 왔다. 교회가 있는 군하리에 약속보다 2시간 먼저 도착하였다. 시간이 남은 그는 교회 건물을 돌아보려고 언덕엘 올랐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마을 앞 다방에도 들른다. 작가는 여기에서 농촌목회를 하는 박흥규 목사를 만났다.

‘푸른 언덕’이라는 주민대상의 농촌잡지를 내고 있던 박 목사는 김영현에게 편집에 참여하고 있던 주민들을 만나게 했다. 당시 감리교회에는 북산 최완택 목사가 '민들레교회 이야기'라는 필사 주보를 격주로 만들고 있었다. 이현주 목사도 '풍경소리' 라는 작은 잡지를 하나 내고 있었고 박흥규 목사와 가까운 남양교회 강인호 목사가 ‘생활신앙’이란 월간지도 냈다. 강인호 목사는 강남순 교수의 오빠다. 감신에서는 머리도 좋고 필력도 뛰어난 유명한 목사다. 지금 미국 아틀란타 인문학학당 대표로 있다. 월남하여 병점에서 병원을 하던 강기영 장로가 부친이었다. 박흥규 목사는 강기영 장로와 가까워서 자주 들렀고 장례식도 주례한 인연이 있다.

5. 대굴령 어흘리 주막터

대굴령은 어흘리 주막터에서 시작된다. 강릉에서 성산리 행 버스를 타고 하차하여 산골길로 들어서면 시작되는 대굴령은 박 목사의 보금자리였다. 옛 화전민들이 떠나간 자리에 마을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해 여름 우리 일행이 찾아간 대굴령은 역시 무덥기 짝이 없었다. 찌는듯한 8월 초의 무더움이 가득했지만 산속은 시원하였고 차가운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 일행은 하늘의 별을 보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박 목사는 동해안 목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당시에만 해도 대굴령 지역은 살기 힘든 상황이었다. 삼척 호산교회에서 목회하던 김영동 목사가 동해안 이야기를 전해주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정작 박 목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 힘든 것을 실감하였다. 더군다나 동해안은 접적지구이다 보니 군대도 많고 분단의 냉혹한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다. 강고한 군사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곳에 의식있는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6. 김동완 목사와의 만남

2007년 9월 16일 대관령 숲에서 맞는 새벽 일기 가운데에는 박흥규 목사의 김동완 목사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오롯이 남아 있다. 박 목사는 김 목사의 장례식에 참석한듯 싶다. 김동완 목사 고향이 삼척이지만 강릉에 나와서 그 고장 명문이던 상고를 나와 인하대 전기과로 진학하였다. 인천에서 살때는 숭의교회를 다녔는데 한전 입사시험에 떨어지자 결심한듯 철원에 있던 대한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기도원 건축을 하면서 지내는 동안 회심을 경험하고 결단하여 감신대로 진학하였다. 재학중에는 학생회장도 했는데 졸업과 동시에 빈민운동에 뛰어들어 고로동 판자촌에 들어가 이창식선생과 같이 현장생활도하고 서울도시선교회를 만들어서 남대문근로자합숙소에도 들어 갔다. 그러다가 박형규 목사가 시작한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빈민운동을 시작하였고 남산부활절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를 받는 등 기독교사회참여운동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인천 화수동에 있는 감리교 도시산업선교회에 들어갔다. 조화순 목사 밑에서 일하는 동안 유흥식 선생과 김근태 선생, 최영희 선생, 인재근 선생, 이민우 선생들과 함께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을 지원했다. NCC 총무를 연임하고 약수형제교회를 담임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였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2007년 9월 16일자 박 목사의 일기는 김동완 목사 장례를 조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동완 님’ 으로 표기되어 있는 일기다. ‘옛날 강릉교도소를 나왔을 때 두부를 가지고 와서 환영을 해주었고 선교국에 말을 넣어 임시직이지만 자리를 마련해 준 고마운 친구'라고 하였다.

7. 동해안 삼총사

▲ 2005년 5월 대관령 농목에서 ⓒ 2005 이필완

소설가 김영현은 간성교회 시절 임국진, 김영현, 김번욱, 이완제, 최원홍, 김수중 등과 함께 어울렸다. 그해 겨울 김영현은 박흥규 목사를 만났다. 훗날 작가는 자신이 적은 ‘해적이’에서 박 목사 만난 것을 특별히 기록해 두고 있다. 실제로 김영현은 자기의 작품 속에서 실명을 사용하여 박 목사를 두 번이나 거듭해 다룬다. 특이한 일이었다. 첫 번째 작품은 ‘포도나무집 풍경’ (1990년)이다. 간성교회에서 만났던 박 목사가 불의의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동해를 떠난다. 서해 바닷가 끝인 경기도 김포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목회를 하고 있는 박 목사를 만나고 포도나무집에서 유하게 된다. 또 하나의 작품은 ‘내 마음의 서부(1995년 창작과 비평사 간행)’였다. 그리고는 산문집 ‘나쓰메 소세키를 읽는 밤’의 ‘그해 겨울 톱밥난로’라는 글에서 다시 언급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박흥규 목사는 투박하고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40대 목사로 나온다. 등선이 굵고 속 깊은 목사로 작가가 소설에서 말하려는 어떤 메시지를 십분 살려서 전달하고 있다.

김영현 문학은 참여문학이다. 실제로 김영현은 1977년 봄 긴급조치로 안양 교도소에서 1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1979년 강제징집되어 강원도 최북단 군사 도시인 간성 포병부대로 배치된 상태였다. 군사독재의 엄혹한 통치 아래 이리저리 끌려 다녔던 청년 김영현은 그곳에서 박 목사를 만난다. 개인적인 만남보다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만난 박 목사는 작가로 탄생하는 김영현에게 문학적 단초를 제공할 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같다. 엄혹했던 군사독재를 견디면서 문학으로, 그것도 후일담의 진한 추억으로 엮어나가려는 김영현에게 박 목사는 어떤 힘을 주었을까? 그러나 현실은 팍팍하고 만만치 않았다. 김연현이 강릉사건이 난 후 강릉에 있던 박 목사를 찾아간다.

[당시 박 목사님은 참 가난하셨다. 나도 강릉으로 가기는 일년에 한 번이었으니 생소한 강릉에서는 그림자 하나 집을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목사님은 내내 굶주렸고 언제나 빈털터리였다. 가난했던 목사님에게 당시 별로 친숙하지도 않았던 이 졸병 군인의 방문이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어색하고 귀찮았을 것인가. 하지만 목사님은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고 다음 날 사모님이 차려주신 정말 조촐하기 짝이 없는 아침상까지 받아먹고 그곳을 떠났다. 나는 그때 돌아가신 사모님이 차려주신 그 가난했던 밥상. 지금은 오래 전에 하느님의 곁으로 가신 그분에게 주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길.]

애틋하고 절절한 이 사연많은 기억이 소설속의 투박한 박 목사와 예민한 문학 철학도 김영현의 우정과 영혼의 교감속에 깊은 삶의 연대의식을 만들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우정이었을 것이다.

8. 김영현과 박흥규 목사의 만남

소설가 김영현은 1977년 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감옥을 다녀온 바 있다. 안양교도소에서 긴급조치 친구들과 지독한 감방살이를 했다. 그런데 형기를 마치자 마자 그는 쉬지도 못하고 곧 바로 강제 징집을 당한다. 강원도 간성에 있는 포부대로 자대 배치를 받은 그는 그해 겨울 일등병을 달면서 영외로 나올 수 있었다. 그시절 그는 민간인 교회 간성교회도 나오고 인근 부대에 있던 유명한 노동시인 박기평(박노해)도 알게 된다.

[군사도로를 따라 십 여리 황톳길을 길을 걸어서 출석하던 간성교회에서 특이하게도 차가운 교회바닥에 볏짚과 담요로 깔고 예배드리던 간성교회가 있었다.]

[박 목사의 첫인상은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그리 지성적이거나 열정이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소 날카롭고 정열적인 인물을 예상했던 나로서는 약간 실망감이 들 정도였다. 곰처럼 투박한 인상을 한 그는 모택동 시절에나 입음직한 황토 빛 노동복에 커다란 운동화 같은 걸 신고 있었다. 말투는 느릿했고 강약이 없는 목소리는 그리 주의를 끌지 못했다. 다만 어눌한 그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으면 무언가 진실하게 전달하려고하는 내용이 그 이면에 깔려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임국진의 말에 의하여 그는 아무튼 대단히 독특한 스타일의 목회자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박 목사는 삼일운동 기념 주일예배 때는 신자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뒷동산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거나 성찬식 때 주먹만한 인절미와 막걸리 한 사발씩을 먹였다거나 하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들어둔 바 있었기 때문이다.] (나스메 소세키를 읽는 밤 '그해 겨울 톱밥난로' 인용)

김영현은 그 당시 나이가 한참 먹고서야 군대로 왔다. 선임병이던 서울 공대생 임국진을 통하여 포병부대의 고달픈 군생활을 익혀나갔다.

[“어이 일등병 형제! 톱밥 나르는 일 좀 거들어주지 않겠나?” “아 예 그 그러지요” 나는 엉거주춤 모자를 쓰고 일어나 그를 따라 나갔다. 밖에는 흰 눈이 여전히 푸슬푸슬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교회 뒤 창고로 가서 가마니에다 톱밥을 담았다. 나는 가마니 주둥이를 잡고 서 있고 목사님은 삽으로 톱밥을 퍼서 담는 것이었다. 그의 커다란 등짝과 농군처럼 뭉뚝한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이렇게 둘만 남게 되자 그에게 무언가 말을 붙여보고 싶었다]

이렇게 하여 어색함을 이기고 두 사람은 대화를 트게 된다. 김영현은 느닷없이 군 생활 중 정부사면으로 복권되었다는 이야기를 건낸다. 웬 일등병 하나를 데리고 톱밥을 푸던 박 목사는 놀란다. 그런데 자세히 듣고 잡고 할 새도없이 박 목사는 특별 기도도 하고 ‘금관의 예수’ 도 불러준다. 그리고는 과감하게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른다.

9. 대굴령 숲속에서 맞는 새벽

지난 2008년 4월 박흥규 목사는 김포에서 ‘대관령 숲에 맞는 새벽’ 이라는 고희 기념 문집을 내면서 출판모임을 가졌다. 조화순 목사를 포함하여 많은 감리교 농촌목회 후배들과 교우들이 모였다. 2000년 은퇴를 한 후 대관령에서 산생활을 해온 박 목사에게 후배들이 힘을 모아 고희기념문집을 헌정한 것이다. 고독한 산생활을 견디면서 투병해 온 박 목사는 그 자리에서 푸른언덕 친구들과 밥상공동체 옛 교인들을 만났다. 감리고 농목운동 활동을 하는 목사들도 참석하였다. 문집 출판은 신앙과 지성사 최병천 장로가 했고 특히 박 목사와 직접 대담도 하여 만든 책이었다. 산업선교 원로이신 조화순 목사님은 축하의 글도 썼고 도합 16명에 달하는 푸른 언덕의 교인들과 감리교 농촌목회를 하는 이들도 함께하여 만든 산문집이었다.

같은 해 4월 23일자 국민일보 미션 라이프 종교 난에는 대관령 수목신앙을 지키는 박흥규 목사를 소개하는 글이 보도되었다. 강주화 기자가 쓰고 현장사진도 많이 냈다. 1976년부터 시작된 대관령 인연을 말하면서 시작된 기사는 개척자적 정신으로 산막에서 생활하는 노년의 박 목사를 통하여 나무심고 가꾸고 농사짓는 산생활의 하루를 정리한 것이다.

‘병마와 동거하며 나무와 교우한다’.

메르치아 엘리아데가 누미노제를 거목 신앙으로 풀어서 설명하였듯이 박흥규 목사는 강원도 성산면 어흘리 숲에서 홀로 살고 있다. 취재가 다 끝나고 저녁이 되었는데 박 목사까지도 산을 내려간다고 하였지만 취재하러 온 강주화 기자는 산을 내려가지 않고 하루 밤을 보내겠다고 자청한다. 강주화 기자는 아무도 없는 대관령 산막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어두워진 산속에서 무섭게 파고드는 무서움과 고독에 질려버린다.

[나는 농막에 남기로 하였다. 그는 나를 남겨두고 산을 내려갔다. 산이 너무 추울 때 이용하는 거처가 마을에 하나 있다고 했다. “어두워지면 나무와 나만 남습니다.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둠속에서 일렁이는 나뭇가지와 잎들이 얼마나 가슴을 세게 치는지 한번 느껴보세요.” 혼자 남겨진 뒤 가장 먼저 느낀 건 무서움이었다. 일찍 이부자리를 폈다. 무서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잠을 청했다.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여기저기 쑤시고 결렸다. 아침이 되려면 멀었는데 촛불을 켜고 박 목사가 올해 3월 중순 숲을 가꾸며 쓴 일기를 읽어내려 갔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나와 주변을 돌아본다.(3월17일) ‘혼자 밥을 먹고 일하는 것은 단절과 위험의 일상화다’ 가장 큰 고통은 통증 때문에 잠들지 못할 때다(3월20일) 오후 5시 마루에 앉아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 허리통증을 견디며 나무를 제대로 심도록 도우셨다. (3월27일) 밖으로 나갔다. 비갠 하늘아래 나무들이 우두커니 나를 내려다 본다. 나도 나무들을 올려다 봤다. “밤이 되면 자연과 내가 완벽한 하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와 나는 하나입니다. 내가 친구가족들을 떠올릴 때 그들도 나를 떠올립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요.” 낮에 박 목사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나는 나무들과 함께 대관령의 아침을 맞았다. 푸르고 깊은 아침이었다.]

대관령 관련 취재기사는 박 목사의 대관령 산막생활을 현장감 넘치는 기사로 관심을 일깨웠다. 가슴에 비가 내리는 사람 박흥규 목사는 이렇게 녹우당의 일상을 투쟁하듯이 살았다.

10. 김영현의 문학세계

소설가 김영현은 경상남도 창녕출신이며 1955년생이다. 대구 경북고를 나와 1975년 서울대 인문대에 입학하였다. 철학을 전공했지만 소싯적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75년 입학하던 해에 대학신문이 주최하는 신춘문예에서 ‘닭’ 이라는 소설로 당선 된 적이 있었다. 그것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인지는확실하지는 않지만 결국 10년 후인 1984년 창작과 비평사 주관의 신인등단 소설집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이라는 14인 신작소설집을 통하여 소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로 등단하였다.

1977년 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수감 되었다. 당시 긴급조치 9호 세대는 지독히도 고생을 많이 한 세대였다. 긴급조치 1호 세대인 경우는 75년 2월 25일에 한꺼번에 출소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긴급조치 2호 세대들은 그렇지 못했다. 유신독재가 다시 고삐를 당긴 1975년부터 적용된 9호에 의하여 구속 수감된 위반자들은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피할 수 없이 온몸으로 투쟁하고 감옥에서도 편할 날 없었다. 감방에서 투쟁하고 금식하고 항의농성하고 하는 북새통에 어떻게 편히 지낼 시간이 있었겠는가. 거기다가 이들 중에 적령기에 도달한 청년들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곧 바로 강제징집을 당했다.

그의 문학은 말하자면 민족민중문학에 준하였고 리얼리즘 문학이었다. 인문대 철학과 출신으로 철학적 성찰을 깊이 하는 민중문학 계열로 분류되었지만 실제로는 처절한 투쟁경험을 곱씹고 되새기는 가운데 문학적 수사와 장치에 뛰어난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90년 초 김영현 문학의 정체성을 놓고 문단에서는 한 판 논쟁이 붙었다. 낭만적 민중문학이 아니냐는 쟁점을 제기한 축이 있었고 여기에 반박하는 모양을 가지고 벌이는 논쟁이었다. 여기에서 낭만적이라는 뜻은 80년대 초반 출판계를 강타한 민중문학의 열풍에 비하여 비교적 상징적이고 지적이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이전까지 한국 문단의 풍토상 배운 것들이 얼굴을 디미는 정도의 활동에 다름 아니었다. 아무리 해도 기층 민중이 직접 나설만한 곳이 못되었다. 그러나 7,80년대를 거치는 동안 민중운동이 활성화되고 기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민중운동이 본격화되자 전태일의 평전이 기폭제가 되어 '어느 돌맹이의 외침'(유동우)이라든가 석정남의 ‘노동생활수기’ 등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80년대는 민중운동을 통해서 등단하는 작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수기류 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문학적 창의력으로 해석된 민중 글쓰기 바람은 민중의 사회적 전기를 대변하는 새로운 형태의 장르로 번졌다. 그리고는 시문학 영역에서도 민중문학의 백가쟁명이 표출되었다.

그러던 80년 가을 현암사는 황석영이 편집한 민중문학 ‘어둠의 자식들’을 내놨다. 바닥민중의 언어로 넘치는 이 작품은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광주사태가 터지고 죽음의 기록들이 은밀하게 돌아다닐 때였는데 기층 민중 출신의 본격적인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실기가 나온 것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들판의 잡초저럼 그렇게 하찮았던 기층들의 살아가는 처절한 모습들이 적라나한 필치로 공개되었다. 서점가에서는 그해 한해에만 50만부가 나갔다가고 한다. 먹물인 황석영을 감동시키고 등장한 이철용은 무학출신의 빈민운동가였다. 한신대를 나온 민중조직가 허병섭 목사를 통하여 빈민선교 바닥을 뒤집어 엎을 기세로 등장한 이철용이 있었다. 그는 신설도에 은성야학에서 돌아 다니다가 박창빈 목사를 만났고 박 목사의 한신대 친구인 군목 출신 허병섭 목사에게 소개되어 박형규 목사의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 조직활동에 참여한 특이한 배경의 인물이었다. 이철용은 기층이었다. 의정부에서 초등학교 마져도 제대로 다니지 못해서 중퇴한 사람이었으나 타고난 그대로 악착같은 성질의 사람이었다. 소아마비를 앓아서 장애를 가지고 있던 그는 열등감에 짓눌리지 않고 악착같이 살았다. 낙천적이고 명랑한 성질의 소유자인 이철용은 수도권선교회의 바닥운동을 책임지는 인물이었다. 의식화를 하고 역사의 주인이 되고 하면서 기독교 빈민운동의 전면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13대 국회에도 진출하였다.

박노해 시인이 ‘노동의 새벽’을 가지고 문단에 등단한 것은 이보다 훨씬 후이지만 민중문학이 대중적 각성만 아니고 지식인 운동의 한계상황을 깨 부수는 데에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민주화와 인권시대 운동의 전선에 민중이 직접 나대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참여문학에 있어 문예 지식인의 참여보다는 민중직접 투쟁으로 방향전환이 일어났고 조직적인 노동대중들의 노조들이 전면에 서무로서 비조직의 도시빈민이나 하던 세력들과 구별되는 대전환의 시대로 들어갔다. 기층 출신 또는 미조직노동자를 대신하여 농민운동 조직도 전국적으로 성장하고 이러한 흐름을 따라 문예활동 전반에 등장한 것이다. 노동의 새벽을 말하는 박노해도 지식인 같지만 실제로는 미조직 노동자 출신으로 문단에 운동 전면에 섰다. 80년대 초 이철용처럼 기층출신으로서 노동의 쓴맛 단맛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해방에 대한 절절한 자기고백이 넘치는 시편을 내어 놓았다. 이철용이 도시빈민으로서 서울의 외곽지역인 신설동, 양동, 영등포, 청량리 등지를 오가면서 온몸으로 살았던 것처럼 민중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활동의 폭은 점점 더 확산되었다.

이처럼 처절했던 밑바닥 출신들의 사회적 전기인 ‘꼬방동네 사람들’에는 빈민선교에 몸담고 있던 허병섭 목사도 알려지게 된다. 일명 공목사라고 칭하던 허병섭 목사는 기독교 교육을 전공 한 사람답게 ‘스스로 말하게 하라’ 라는 논문집도 냈다. 한신대 문동환 교수 밑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였던 그는 민중운동의 여파로 동월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리고는 주민조직운동을 민중교회운동 쪽으로 전환시키는 한편 일용노동자조합을 결성하였고 어느 정도 운동이 진전이 있자 개척하였던 교회를 떠나 본격적인 민중운동으로 환경생태 문화운동으로 나갔다. 여기에 영화인 이장호, 배창호 감독들이 동월교회를 다니면서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제 80년대는 한국교회가 고난당하는 민중과 함께하는 신학도 만들고 민중문학도 대중화시키는 물꼬를 열었다. 필명 이동철은 ‘아리랑 공화국’과 ‘먹물들아 들어라’ 를 쓴다. 당시 민중운동내부의 엘리트 지배 성향을 단연코 거부하고 운동 지도부의 허위의식을 비판하였다. 민중운동 중에 빈민선교 운동은 브라질 바닥 공동체운동을 연상시키는 해방신학적 성찰로 나가고 있었다. 기독교는 이제 사회주의적 경향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권위주의 체제였던 3김 카리스마가 지배하는 정치현실에서는 분열을 일삼으면서 5공의 신군부가 권좌를 계속 누렸고 90년대가 시작되었다. 90년대 초반 민족 민중문학 진영에서는 참여문학을 하는 김영현을 문학적 논쟁의 중심에 가져갔다. 이른바 김영현 논쟁이 그것이다. 곧 바로 낭만적 리얼리즘 문학이라는 공격을 받은 김영현 문학은 당시로서는 운동경험을 갖고 있는 문인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운동에 동참하는 개인들의 내면적 치유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고 이것을 가지고 시대적 고뇌인 고문문제, 권위적인 감옥생활과 지식인의 좌절과 분노 등을 소설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모름지기 소설가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고 고통받고 있는 이들 편에서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고 풀어주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러한 시대의 아픔을 통하여 상처를 돌봐 줄 깊이와 위엄이 갖추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낭만적 민중문학을 밀고 가는 김영현의 내면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그는 일류대학을 나온 엘리트였고 지적성찰과 반성이 치열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들판의 잡초처럼 자라난 기층과는 달랐다. 그는 시대정신과 대면하여 치열하게 접전을 벌렸고 이념적 성찰을 성실히 추적하였다. 민중운동내부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간의 정치 헤게모니 쟁탈전을 방불케하는 종로 5가 내부의 권력 투쟁도 극심하였다. 90년대로 들어오자 민족민중 운동전선에는 계파분열이 가시화되더니 결국은 민족민주 계열과 민중민주 계열로 양분되었다.

11. 포도나무집 풍경과 김영현

그러나 김영현 문학은 단지 지적 성찰로 일관하지 않는 어떤 추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구로구청 부정 개표 사건을 겪으면서 김영현은 포도나무집 풍경’ 이라는 제목의 소설에서 실명으로 나오는 박흥규 목사를 통하여 ‘들판의 죽어 있는 회색 빛 논과 밭도 시절이 바뀌고 역사가 도래한다면 새로운 옷을 입고 부활하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한다. 박흥규 목사는 작가의 입이 되고 손이 되어 문학적 상상력의 끝은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재생의 신화학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내면화하는 인간정신의 변동을 찾아간 이 발언은 빛을 발했다. 신화와 현실의 삶의 질곡 속에서 스러지지 않을 투지와 용기를 가지고 고통의 들판을 넘어 짙고 푸른 언덕으로 재탄생한다고 암시하는 듯 했다.

김영현 문학은 이처럼 들판의 잡초를 보는 눈으로는 다 꿰뚫을 수 없는 해방의 내면적 전승을 되살리려는 어떤 예언자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 예언자의 준엄한 현실고발은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고 새 희망을 품으려고 하는 민중에게 자기성찰의 기반위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물론 그가 이철용 류의 도둑일기 같은 민중의 사회적 전기는 진정 아니라고 할 것이지만 기층을 포괄하여 가난한 이웃들의 희망과 삶의 장래를 담보해주는 전체 대중과의 선한 연대를 든든히 받쳐줄 다층적 민중전선의 대오도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도시빈민과 농민 그리고 조직화된 노동자 등 전체 민중이 참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통합 전선은 곧 나타날 문민정부 수립의 전초적인 장래를 담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중의 정치적 위력은 실제로 90년대 3김 시대가 치열해지면서 한국민주화운동의 헤게모니 쟁탈전과 함께 다원적 민주참정의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모색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혁명적 자기성찰이 시대정신을 엮어나가는 이러한 지점에서 작가는 ‘포도나무집 풍경’을 통해 민중적 삶의 건강성을 간직하고 있는 박흥규 목사라는 농촌목회자를 등장시켜 반전의 기회가 오고 있다는 암시를 보여준다. 포도나무집 풍경의 실제적인 화자인 주인공 박흥규 목사는 이렇게 소설에서 말한다.

[도시에서 온 놈들은 겨울 들판을 바라보면 모두 죽어있다고 그럴 거야. 하긴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으니 그렇기도 하겠지. 하지만 농사꾼들은 그걸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쉬고 있을 뿐이라는 거지.]

12. 김영현 문학과 박흥규 목사

공동체 운동과 내면화의 과제

김영현 문학은 감리교 목사 박흥규를 시대의 인물로 부각시켰다. 기층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닌 어정쩡한 농촌 목회자인 박 목사를 소설속의 주인공으로 앞장세워 현실발언을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는 특이하였다. 흔하디 흔한 에큐메니칼 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감리교 농촌목회자로서 그저 목사다웠다. 에큐메니칼 조직운동의 지령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굳게 세운 그는 거침없이 농촌 현장의 피맺힌 소리를 질러대기 보다는 농촌교회라는 또 다른 현장에서 바라다보는 처절하고 가슴 아픈 사연을 온몸으로 조용히 가슴 저미게 말하곤 하였다. 커다란 등선이 뜨거운 것이 아니라 깊이를 더하는 아픔의 속울음을 피할 바 모르는 가난한 농촌 주민의 이름으로 말하고 싶어했다.

그는 실제로 실존주의적 자아의식을 강조하던 시기에 학교를 다녔고 개인주의적 자기헌신이 집단적인 행동으로 쉽게 이어지는 세태를 비웃으며 살았다. 그는 운동권의 신권위주의를 거부하고 상하명령구조를 못마땅해 했다. 그리고는 행동주의적 전략으로 밀고 가는 운동행태에 언제나 비판적이었다. 농민운동의 진로는 그대로 인정하려 했지만 그는 언제나 농촌목회자로서 자기의 실존에 충실하고자 노력하고 분투하였다. 그것이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그는 감리교 목회자답게 예언자적인 영성을 지녔고 경종을 울려댔다.

그는 오히려 혁명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광기를 경계하려 하였고 인간 내면의 문제가 더 소중하고 시급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도 문제를 Rm집어 내고 고발하자는 주의였지만 티내고 공격하고 과실을 탐내는 부류에는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면에서는 그는 농촌을 지키고 농촌교회를 지키려는 전도 목사였는지도 모른다. 세련된 이념적 추종자라기 보다는 스스로 말하고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자는 은둔적 카리스마의 지도자였다. 그것이 김영현 문학이 추구하려는 시대적 과제인 변혁운동과 배치되고 있었다. 김영현의 혁명운동에 등장하는 이 감리교 목사를 보고 독자들과 비평자들이 김영현 문학을 낭만적 민중문학이라고 명명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김영현의 문학에 달고 있는 인간에 대한 진진한 성찰과 인간구원의 문제를 추구하자는 추동력으로 맞 닿아 있었다. 그는 작은 공동체 운동으로 시작해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박흥규 목사가 등장하는 것이 시대의 격랑을 헤치고 이상적인 운동의 장래를 담보하는 중요한 이정표라도 되는 듯 동의하였다. 그것이 동해안 사건 이후 등장하는 인물들 정민이와 박 목사 그리고 내가 부딪히는 운동방향에 대한 속마음이었다. 내 마음의 서부는 바로 그러한 당시의 운동방향에 대한 김영현의 조용한 자기 주장이 담겨진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그만큼 작은 공동체 운동은 겉으로는 대단할 것 같은 공동체 운동을 대신하는 작은 공동체 운동의 전망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공동체 대안에 대하여 직접적인 감정을 드러내면서 찬반양론을 벌인다. 친구이자 동료인 정민이의 입을 통하여 통열하게 날린다.

[“나는 솔직히 목사님 식의 공동체 운동에는 반대예요. 몇몇이서 그런 가나안을 만든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나는 전체 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방해하려는 세력들과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60년대 우리농촌이 어떻게 붕괴되어 나갔는지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정민은 뜻밖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은근히 열을 올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박 목사 대답은 이랬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사울 힘이 없네. 안 그런가? 얼마 전에는 이런 골짜기에 까지 형사가 다녀갔지 뭔가. 그들은 사람들이 이상을 꿈꾼다는 사실 마져도 불순하게 생각한다구. 이런 때에는 작은 공동체를 만드는 일도 하나의 싸움이야.”

이때 김영현의 약혼녀 혜숙이가 끼어들듯이 답변을 했다.

“저도 목사님 생각에 동감이에요. 어떤 모범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그것도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큰 일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작은 노력이 먼저 필요하다고 봐요.”

정민의 대답 “그건 낭만주의 공상에 불과해요. 이제는 우리도 현실을 과학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말하자면 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조직적이고 혁명적인 투쟁을 해나가지 않으면 절대로 이런 잘못된 질서가 바뀌어지지 않아요.”

정민의 다소 과격한 반박이 이어졌다. 노동자니 혁명이니 하는 단어에 모두가 괜스레 가슴이 철렁하여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딸꾹질하듯 쏙독새 울음소리만 맑게 울릴 뿐이었다. 어쨌든 좋은 사람들과 이렇게 앉아 있으니 오늘밤은 참 행복하군 이런 행복이라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하여 목사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내 마음의 서부에서 인용)

▲ 대관령 농막과 그가 마지막 흔적을 남긴 소나무 아래(2013.3.28, 장례식)

13. 대안적 공동체 운동과 미래

이처럼 김영현의 소설은 박 목사가 제안하고 있는 작은 공동체 운동에 대하여 넌지시 낮은 단계의 민중조직운동이 시발되어도 좋겠다는 동의가 깔려 있다. 일상의 노동과 소비생활의 한가운데를 관통해서 침투력있는 평화공생의 생산 공동체를 그려보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대안적 변혁운동의 문제의식에는 뿌리가 깊다. 실제로 고향 창녕에서 중학교를 나온 그는 소설 '폭설'에 우체국 다니는 미경이의 부친이기도 하였던 문영탁 선생님을 등장시킨다. 문영탁 선생은 어린 김영현을 잘 알고 있는 고향 중학교의 선생님이었다. 소설에는 고향집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소설 폭설에서는 문영탁 선생의 혁명과 변혁운동에 대한 나름의 견해가 소상하게 나오고 있을 뿐 아니라 소설의 전개방향에서 빼 놓을 수없는 이념적 투쟁의 한계상황을 대안적 공동체운동으로 돌파해 보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당시 시대상황과 맞물려서 민중생존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확대되었고 실제로 생산자 생활협동조합 운동으로 실시되기도 하는 형국이었다.

이것이 상호작용하여 어떤 목적의식을 갖게 된다. 고향의 인연이 깊었던 만큼 문영탁 선생의 소신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영탁 선생은 자기 딸 미경이가 김영현의 짝이 되기를 은근짜 기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서울로 진출한 주인공은 서울생활에 젖어들면서 점점 멀어진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결합하지 못한다. 그랬던 문영탁 선생이 어느날 갑자기 아내를 잃자 집을 정리하고 가까운 지인들과 더불어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두레공동체를 만든다. 소설 ‘폭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형섭은 미경의 방문을 받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아버지는 집을 정리한 다음 몇몇 사람들과 함께 예전에 말했던 지리산 아래 산청이란 데로 들어가 버리셨어요. 왜 그전에 두레공동체를 만들거 란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그래 그러셨지 선생님은 충분히 그럴 분이셔” 형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형섭 오빠도 아시잖아요 아버지 고집 아시잖아요?” 미경이 불만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김영현은 사견인지 이야기의 중심인지 혼란스럽게도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마치도 ‘내마음의 서부’에서 박 목사를 묘사하듯 그렇게 독백을 한다.

[문 선생을 생각하면 지구가 멸망해갈 무렵 살아남은 어리석은 공룡 한 마리가 무리를 이끌고 숲과 물이 있는 최후의 낙원을 찾아 광대한 황무지로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질주하는 문명을 거슬러 폭풍우 앞의 비닐하우스 같은 작은 공동체를 만들려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그의 신념과 용기가 부러웠다]

이처럼 소설 속에 나오는 대화를 요약해서 말하자면 ‘공동체 그것도 대안적인 작은 공동체’라는 것이다. 민중생활과 함께 공동적인 실제생활을 포용하고 실현가능한 실천적 방안을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운동의 도식적인 발전 단계는 민중이 참여하는 과정이 생략되기 일쑤여서 민중이 변혁운동내지는 혁명적 참여를 하는 동안에 심각한 내상을 입고 삶을 훼손당히기 십상이라는 조심스러운 낭만주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실제 격변기에 처한 민중의 삶은 이름이 좋아 그렇지 막대한 희생을 강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다운 관찰과 성찰에 목을 매는 김영현으로서는 작은 운동이나 밥상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장점이 다른 것들 보다 낫지 않느냐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 문제는 심각하기도 하고 절실하기만 한 운동의 장래를 담보하는 것이었다.

소설 주인공 형섭은 문영탁 선생이 살고 있는 지리산으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형섭은 공동체생활을 체험한다. 공동생활의 일상도 들어보고 농사법도 알아본다. 일주일간이나 함께 있으면서 두레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여기에서 소설적 전개방식에서 찾아낸 것은 소설속의 박흥규 목사의 대안적 공동체 운동이나 소설 ‘폭설’ 속에서 등장하는 문영탁 선생님의 그것은 표현을 달리하는 동질적인 세계관이라는 사실이다. 자세히 소설을 살펴보면 이것은 ‘내 마음의 서부’ 에 등장하는 박흥규 목사나 ‘폭설’속에 등장하는 고향의 학교 선생님이신 문영탁 선생은 ‘서로 다른 듯 한 같은 사람’으로 나온다. 표현하는 시점이 다르고 이야기전개의 상황만 다르지 실제로는 같은 맥락의 다른 표현이고 소설의 전개방향에서는 역할은 동일해 보인다.

실제로 비록 소설이지만 박흥규 목사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은퇴하고 대관령으로 들어간다. 폭설의 문영탁 선생도 갑자기 세상 떠난 아내를 여의고는 지인들과 더불어 산청에 있는 지리산 두레공동체로 들어간다. 이것이 소설 속에서는 등장하는 두 인물이 공동체를 향한 열망이 한결같다는 것을 말해준다. ‘내 마음의 서부’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한결같이 공동체 운동의 전망을 대놓고 이야기한다. ‘폭설’ 에서도 주인공 형섭은 작심하고 일주일간 지리산 두레공동체로 가서 육체노동을 하면서 까지 알아보려고 노력한다. 내 마음의 서부에서도 주인공은 대관령에서 우연히 마주친 친구 정민이 있는 가운데 박 목사를 만난다. 어느날 약혼녀 혜숙을 데리고 대관령으로 간다. 폭설 속에서도 주인공 형섭은 두레공동체를 찾아가 체험을 하면서 문선생과 대화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김영현의 관심이 공동체 안에 이루어지는 협업과 생산자 공동체이다. 오늘날의 협동조합운동이나 사회경제운동 같은 새 길을 찾고 모색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것이다. 개미같은 개인들로서는 한계가 있는 시장경제 체제에서 막연하지만 구체적으로 한데 힘을 모아 공동 연대를 구축하고 현실을 극복하자는 전망을 갖지 않을 수 없겠느냐는 것이다. 구태의연한 의식화도 자기혁명의 궤변도 결국은 현실이 기반하는 개인적 삶의 패배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목적은 우리 오늘의 삶에 희망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작가는 이미 작은 공동체의 주인공이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의 경우라든지 스코트 니어링·헬렌 니어링 부부가 보여주고자 했던 공동체적이고 친화적인 내면생활의 목표가 필요하다고 보았는지도 모른다. 스콧 니어링의 좌우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간소하고 질서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는 일은 멀리 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 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있는 만남을 이루어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원초적이며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

종국적으로는 도회적 삶을 청산하고 홀로 숲속의 삶을 살고자하는 의지가 여기에 있다. 오랫동안 인류가 안고 몸부림쳤던 대안적 삶의 스타일 말이다. 현실에서 낙원을 품으려고 하는 본능에서 비롯된 숲속 생활은 이제 자연인의 삶을 동경하고 자립적인 귀농인들이 되겠다는 의식과 직결되어 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희망을 노래하려는 것처럼 들린다. 그만큼 인간 공동체의 모순과 맞대결하려고 하는 의지적 자아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편에 계속>

참고자료

1. 김영현,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1990년 서울 실천문학사

2. 김영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95년 서울 창작과 비평사

2. 김영현, 폭설 2002년 서울 창작과 비평사

4. 김영현, 낯선 사람들 2007년 서울 실천문학사

5. 김영현, 라일락 향기 2008년 서울 실천문학사

6. 김영현, 나스메 소세키를 읽는 밤 2007년 작가

7. 박흥규, 대관령 숲에서 맞는 새벽 2008년 서울 신앙과 지성사

8. 황석영, 어둠의 자식들 1980년 서울 현암사

9. 이동철, 먹물들아 들어라 1985년 서울 동광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