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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레이엄 골즈워디 지음 김영철 옮김 <복음과 요한계시록>(성서유니온선교회)
최창균  |  onnuree@mensa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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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08월 18일 (화) 11:55:20
최종편집 : 2015년 08월 18일 (화) 12:00:27 [조회수 : 3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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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호주 무어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다가 은퇴한 것으로 표지에서 소개되고 있다. 번역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부교수를 거쳐 미문교회 목사로 시무하고 계시는 분으로 나와 있다.  책의 초반부에서 저자는 복음이 이미 창조 이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주장은 선교학 혹은 전도학에서 주로 제시되는 주장으로서 이 책이 복음적 성격의 책임을 앞부분에서부터 이미 알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소주제의 구성을 봐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과 2장의 제목에 복음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고, 3장에는 이신칭의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 있다. 이를 통해 이 책이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서술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 요한이 복음의 가르침을 한 번 더 제시하기 위해 복음을 구약성경에 쓰인 표현과 이미지로 다시 옷 입혔다는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이 책은 요한계시록을 구약의 묵시문학과 동일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완전한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그 어떤 사람이나 마귀에 의해서 결코 훼방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이나, 믿는 자들의 안전 보장 및 복음을 전파하려는 것이 요한계시록을 쓰게 된 동기라는 설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렇듯, 당시 유행하던 묵시문학의 한 갈래로서 보는 것이 아닌, 복음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은 독자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을 좀 더 올바르게, 그리고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다.

일곱교회를 위한 서신에 관한 서술에서, 이 부분에는 난해한 요소들이 가장 적을 뿐만 아니라 이 부분 그 자체만 가지고도 매우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성경의 이 부분은 신비로운 묵시의 차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반서신과도 같은 내용을 가지고 접근성을 제공해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상급”의 개념을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이라고 짧지만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종말론 관련하여 이 세상에서의 행위로 인해 천국에서의 삶이 차이가 날 것이라는 주장이 있고, 그래서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용어도 사용되는데, 이 책에서는 상급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임을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일곱 나팔 이야기가 나오는 8-9장에서는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문구가 하나도 없다고 해석한다. 또한, 일곱 인의 내용인 6장도 신약성경의 문맥에서 본다면 제외될 수도 있는 부분일 뿐만 아니라 그 기원이 될 만한 단서는 어떤 기독교적인 책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러한 부분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6, 7, 8장 때문에 계시록은 더 신비주의적 해석이 난무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예시하듯이 계시록을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6, 7, 8장도 좀 더 올바르게 해석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수님의 승천과 다시 오심 사이의 기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방편은 곧 복음 전파라는 주장은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종말은 그분 안에 임한 것, 그래서 큰 고난도 그의 몫이었고, 갈보리에서 치르신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도 그분의 것이라는 내용은 독자들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아마겟돈 전쟁이 미래의 일이 아니고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도 있지만, 복음주의적 관점에서는 귀한 주장이라 할 수도 있다.

이어서 저자는 교회가 어린 양의 성격을 지니고, 그 머리와 일체를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기에 교회는 고난을 받는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어린 양이 승리한 것처럼 교회도 결국은 승리한다고 함으로써 당시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교회에도 위로를 준다.

저자는 요한은 우리와 동시대 사람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이 우리 각자에게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만큼이나 가깝기 때문 묵시록의 시간을 현대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계산해내려 한다면, 그것은 묵시적인 사고방식을 부당하게 다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내용 역시 복음의 관점에서 나온 좋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일관성 있게 주장한 것처럼, 종말은 지금 이 순간이고, 그리스도께서 설명한 고난도 이미 받으셨고, 전쟁도 치르셨으며, 지금 우리도 그 고난에 있다는 설명은 정말 탁월한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이 역사적 사건들의 도표를 놓고 종말에 관해 탁상공론 하며 자기 나름대로 도해하는 20세기의 예언자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생존이 위태로울 만큼 핍박을 겪는 1세기 소아시아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렇듯, 계속해서 시한부 종말론주의자들을 경계하는 언급을 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영원히 구원받은 자들을 인친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반면에 짐승의 표는 불경건과 불신에 대한 특징이지, 바코드나 인체에 삽입하는 칩이 아님을 명확하게 설파하고 있다.

언제나 거짓 예언자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듯이, 계시록 관련하여 여러 형태의 종말론들이 있어왔다. 그중의 하나가 666이란 숫자를 컴퓨터, 바코드, 인체에 삽입하는 칩 등으로 해석하여 과학문명의 발달에 역행하는 풍조를 조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비교적 근거가 있다 보니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여러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해 왔다. 하지만 과학이 더 발달해가며 컴퓨터와 인터넷, 크레딧 카드가 실생활에서 보편화됨에 따라 그런 주장은 저절로 도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그런 주장들이 바람직한 해석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 문자적 해석이라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여자적(如字的) 해석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아무튼 상징을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 등을 경계하는 내용들도 이 책에서 잘 드러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책은 문자적 해석을 경계하고 상징을 상징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구약의 선지서적 관점에만 머물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서 복음의 관점에서 계시록을 풀이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요한계시록을 당시 유행하던 묵시문학의 하나로 끝나지 않고, 복음서의 연장으로서 성도의 고난을 위로하고 성도를 견인하며 교회를 확장하는 데 기여하는 정경으로서 풀이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하여 계시록을 그냥 통과하지 않고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자신감을 가지고 설교를 해 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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