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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신화와 전설, 역사가 함께 담겨있다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01월 13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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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1월 12일 (토) 08:27:47
최종편집 : 2013년 01월 12일 (토) 23:23:16 [조회수 : 7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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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편지 ‘나는 의심하는 신앙인이 좋다’에 대한 답글을 여러 경로로 받아보았습니다. 제 의견에 반대하시는 분도 동의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중에는 성경의 어느 부분들이 신화이며 어느 부분들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 좀 더 자세히 제시해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성경의 기록 가운데 신화와 전설, 그리고 실제 역사를 자세히 구분하고 나누어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설화, 즉 신화나 전설 가운데는 역사와 무관하게 어떤 의미 전달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도 있지만, 역사적 사건을 기초로 발전된 이야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신화나 전설이라 하더라도 역사와 얽혀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어보고 싶습니다.


1. 이스라엘 민족과 숫자철학

어떤 주장이나 기록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려면 다른 문헌이나 고고학 자료에 의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한 서기전 10세기까지는 문헌 자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기에 고고학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 한 역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울과 다윗, 솔로몬 시대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례로 출애굽은 기록 그대로 역사적 사건일 수는 없습니다. 우선 3000여 년 전에 60만이라는 방대한 인구가 집단으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동안 시나이 광야에서 생활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그런 규모의 인구 이동이라면 곳곳에 고고학적 자료를 남길 수밖에 없는데 그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요셉이 총리로 재직했던 이집트를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셈족인 힉소스 왕조가 통치했다거나 히브루라 불리는 부랑족속이 가나안땅에서 활동한 흔적이 있다는 주장들이 있지만 그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성경이 묘사하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증거 자료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여 학자들은 출애굽에 대한 기록을 ‘출애굽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고 ‘출애굽 설화’라고 말합니다. 출애굽 기록을 사건이 아니라 설화라고 보아야 하는 중요한 근거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의 생애는 이집트 궁전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40년, 이렇게 40년 단위의 3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40년 단위의 3곱. 이 구분은 통일왕국시대를 이루는 사울의 통치기간 40년, 다윗 40년, 솔로몬의 40년과도 일치합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극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유대인들은 숫자철학에 능통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숫자는 그냥 숫자가 아니라 중요한 의미를 담은 항아리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3은 하나님의 수고 4는 사람의 수입니다. 3과 4를 합한 7은 완전을 의미하는 수로 역시 하나님의 수입니다. 6은 7에 접근해가려는 교만하고 건방진 수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을 상징하는 수이며, 계시록에는 666이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유대인의 숫자철학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제임스 칼라스가 지은 <요한계시록>을 참고해 주십시오.)

유대인들은 강조할 때 10을 곱했습니다. 사람 수인 4에 10을 곱한 40은, 사람이 어떤 중요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 충분한 기간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세는 40년 단위로 극적인 삶을 세 번 살아 12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은 모두 40년씩 통치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초기 왕들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120년을 이어간 통일왕국은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 기록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120세를 사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과학과 의학이 최고조로 발달한 요즘 시대에도 지구마을 전체에서 120세를 넘게 사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아브라함부터 솔로몬에 이르는 시대, 즉 서기전 20~10세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성경 말씀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설화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앞의 편지에서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 이전의 기록은 신화의 영역으로 구분됩니다.) 그래도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믿으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2. 성경에 나타난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

성경의 모든 기록이 역사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존재, 이후의 포로생활, 페르시아에 의한 해방 등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실제 역사라고 믿어왔던 구약시대의 ‘역사적 기록’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경, 특히 구약성경에는 세 가지 기록 양식이 있습니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입니다. 신화와 전설을 묶어서 설화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 기록 양식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진실을 아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 편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화는 옛날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삶에 대해, 또는 그 기원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실제 사건을 기초로 기록된 역사와 구분되며, 역사는 ‘사실’에 집중하지만, 신화는 ‘의미’에 집중합니다. 그러므로 신화를 역사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와 사실을 모두 잃게 됩니다.

전설은 오래 전에 있었다고 믿어지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설은 세대를 거치며 구전되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기록된 것이기에 이전의 전승 과정을 충분히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처음 사건과 그 의미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설을 기록된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으면 전설 속에 담긴 의미와 사실을 모두 잃을 수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실제 사건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기록된 모든 역사는 필연적으로 기록자의 시각과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기록자가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데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일어난 사건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인데도 기록자의 시각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여 자신의 기록에서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후대의 다른 기록자가 자신의 견해를 첨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서로 기록된 절대 객관의 역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록된 모든 역사는 기록자의 ‘해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기록된 역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절대 객관의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역사를 이해하는데 적절하지 않습니다. (신화와 전설, 역사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하고 싶은 분은 저의 책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또는 데이비드 힌슨이 지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참고해 주십시오.)


3. 성경의 기록을 과학과 역사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면 영적인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성경의 기록자들은 왜 모세가 120년을 살았노라고, 또한 초기 왕들이 40년씩 통치했노라고 과감히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역사’를 기록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기록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경에서 역사를 찾아내려는 무모한 시도를 중지하고 영적인 의미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과학책은 과학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가치가 있습니다. 역사책 역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과학책이나 역사책에서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시도한다면 무리가 따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영적인 의미를 담은 종교경전이지 과학책이나 역사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의 기록을 과학과 역사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면 사실과 진실이 모두 왜곡될 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놓치게 됩니다.

구약성경에는 무섭고 잔인한 하나님의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이런 기록들을 모두 사실로 또한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모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회피하거나,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고 신약시대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답으로 묻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신 우리의 하나님은 가나안땅으로 이주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 곳 주민을 모두 살육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단지 이집트 왕 파라오 한 사람을 징계하기 위해 이집트의 장자를 모두 죽여버린 무서운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이민족에게는 가혹하고 자신의 백성을 편애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은 주변 민족과의 갈등과 전쟁에 늘 시달려야 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극한 상황에서 인식한 하나님이지 실제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다음에 기회가 될 때 충분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지켜주시기 위해 이방민족을 몰살시켜 주시는 분이라고 진실로 믿었을 것입니다. 생존이 달린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간절한 신앙과 진정성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삼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식한 하나님을 지금도 그대로 믿는다는 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순진한 믿음을 의심하고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런 무리한 해석들이 교우님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을 계속 갖게 되면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는 많은 갈등과 비극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도, 그분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신 우리 예수님께도 큰 결례가 되며, 무엇보다 기독교의 참된 신앙과 가치가 훼손되어 한국 교회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만들 것입니다.

교우님들과 가정에, 또한 섬기시는 교회와 하시는 일에 하나님의 은총과 행복이 늘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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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8-10 02:17:56
“진실의 가장 큰 적은 (의도적이고, 인위적이며, 부정직한) 거짓이 아니라 (끈질기고, 그럴듯하고, 비현실적인) 신화다(For the great enemy of the truth is very often not the lie-deliberate, contrived and dishonest― but the myth-persistent, persuasive, and unrealis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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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1-16 11:01:11
머리 속의 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지켜주시기 위해 이방민족을 몰살시켜 주시는 분이라고 진실로 믿었을 것입니다."
결국 성경 기록자는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과 그 마음이 담고 있는 의미만 전달한 셈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필자의 주장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만들어낸 신에 불과하다.
실제 역사 속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머리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삼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식한 하나님을 지금도 그대로 믿는다는 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삼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식한(실제로 그대로 행하시지 않은)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래서 종교적 의미만 새긴다면 그것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오늘날도 이스라엘 백성만큼이나 안타까운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원수들을 갚아주신다고 믿는다면 정신 건강상 얼마나 좋은가? 나아가 종교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의지하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다고 상상하고 믿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그 일들을 알게 되고 의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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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1-14 14:21:31
이집트인들은 매우 꼼꼼했다고 합니다. 왕가에서는 국사의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모두 기록하였다고 하지요. 출애굽기에 나타나 있는 열가지의 재앙 사건들은 애굽인들에게 있어 국가적으로 매우 막중한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이 죽어 나가는 선사이래로 가장 큰 참사에 대한 기록이 이집트 그 어디에서라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더하여 홍해가 갈라지는 초월적인 기적과 이스라엘 민족의 뒤를 쫒던 애굽의 군대가 모두 수장되는 엄청난 사건에 대한 기록도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일반인의 무덤에서 조차도 그러한 내용에 대한 조그마한 단서라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혹자는 "패자는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고자 진실을 숨기려 하였기 때문에 기록하지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이 실제적으로 일어 났었다면 늘 이집트를 경계하고 있던 제국 바벨론에서 그 사건들을 몰랐을 리가 없었겠지요. 좋은 소식이었더라면 모르겠으나 적국의 나쁜 소식은 금방 퍼졌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바벨론을 포함한 이웃되는 그 어디에서라도 이러한 비슷한 내용의 기록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나는 재앙들은 모두 애굽의 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을 상징한다는 이론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바 이고 이러한 접근법은 보수주의 쪽에서도 대부분 받아 들이고 있는 사안입니다. 따라서, PICKY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출애굽은 역사의 시간선상에서 그 내용 그대로 발생하였던 사건으로만 보기에는 무리입니다.

성인남자 60만 인구, 달리 말하자면, 즉 2백만 이상의 인구와 각종 가축과 짐승들이 한꺼번에 출애굽을 하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가정아래 애굽을 탈출한 30-50명 규모의 소수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비약하여 출애굽기가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특별히 에스라를 중심으로, 구약성경이 정립되고 쓰여질 때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들과 신화들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이 바로 출애굽기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월절 내용을 포함한 출애굽기의 모든 내용은 폐허가 되어 있는 예루살렘의 재건축과 성전 재건축 등 나라의 재건을 위하여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되이 강하게 뭉치도록 하게하는 구심점을 제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인도하심과 동행하심을 그들의 이해력으로써 집필한 보물적인 신앙고백서라고 보는것이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

평범한 교인의 출애굽기에 대한 소견을 올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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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1-14 15:15:40
제가 몇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이집트의 신을 향한 징벌이라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한두번쯤은 들어 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종교에 대하여 연구해 보면 신빙성이 많이 떨어지는 주장입니다. 열가지 재앙 중에 몇가지가 이집트의 신을 상징하는 것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습니다. 제가 기회가 된다면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나타나는 영적인 상징성에 대하여 설명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열 가지 재앙에 나타나는 상징적인 것들- 장자, 메뚜기, 개구리, 강물의 피, 파리떼 등등 -을 가지고 이집트의 우상숭배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당시 이집트의 종교에 대하여 바르지 못한 이해 때문에 추측으로 끼워맞춘 것입니다. 이 열 가지 재앙의 상징적 의미는 성경에 이미 여러 번 나옵니다. 이것을 이해하실 수 있다면 이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출애굽기의 저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해방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려고 했고 또 당시의 이스라엘이 놓였던 시대적 상황하에 어떤 맥락에서 그런 가상의 사건을 기술하여 영적 교훈을 보여주려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하나만 예를 들어 설명을 하자면 가축들에게 질병이 내려집니다. 이것을 놓고 당시 이집트의 황소(아피스)에 대한 우상숭배를 징벌하는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징벌은 분명히 가축이라는 단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피스는 가축으로서의 소가 아닙니다. 가축이란느 단어가 보여주는 의미는 영적으로 선민의 무리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동물이나 곤충을 들어서 인간의 유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집안의 가축들도 거룩케하라는 명령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2장에서 아담이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정말로 짐승들에게 호랑이, 사자, 코끼리와 같은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신에게 가까이 간 아담같은 존재가 아직은 신에 대하여 깨달음을 가지지 못한 짐승같은 인간들에게 영적인 깨우침을 주는 장면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여호와의 입장에서 인간으로서 취급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나 물고기로 취급합니다. 이 점을 유의하셔야 극도의 상징적 내용을 내포한 기술과 일반적 서술로서의 기술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엘리사가 자기를 향해 대머리라고 놀리는 어린 아이들에게 진노하여 암콤을 불러내어 아이들을 다 죽여버리는 장면도 극도의 상징성을 지닌 장면입니다. 이것을 실제의 사건으로 해석하면 엘리사는 사악한 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엘리사가 여호와의 선지자인데 그깟 어린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놀렸다고 그 아이들에게 꾸중을 하면 모를까 어떻게 곰을 불러내어 찢어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기성 기독교의 해석에 따르면 여호와의 선지자의 권위에 대한 모독은 여호와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구차한 변명입니다. 구약에서 선민을 택하고 율법을 주면서 강조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민 집단내의 질서입니다. 이 질서가 깨지면 선민 집단은 와해됩니다. 그래서 그 질서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규례를 정합니다. 물론 이 규례들은 외적으로는 행위의 율법이 되지만 내적으로는 영적 질서의 본질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엘리사의 사건은 이 질서의 문제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뒤를 이은 젊은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에 비하여 사람들의 눈에는 많이 부족한 선지자로 보인 것입니다. 나이도 어리고 엘리야 같은 영적 권의를 입증할만한 사건도 그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놀린 것이죠. 여기서 어린 아이란 나이가 어린 아니가 아니라 아직도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선민의 집단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동일한 수준의 영적 성숙도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관리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것을 할애합니다. 쉽게 말해 엘리사를 놀린 것은 아직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엘리사를 향하여 대머리라고 놀립니다. 머리카락이 없다는 뜻이죠. 여기서 대머리라는 것은 여호와로부터 받은 지혜가 없다는 뜻이지 문자 그대로 대머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머리카락을 지혜의 상징으로 많은 곳에서 표현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삼손입니다. 엘리사가 대머리란 얘기는 '너는 애숭이 선지자'라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지도자의 자질에 대하여 비난하는 행위는 영적 질서의 위배입니다, 여호와가 세운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 선지자에 대한 영적 권위를 존중하여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암콤이 나와서 어린 아이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암콤도 정말 곰이 아닙니다. 애들이 놀린 것을 가지고 곰을 불러내어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말로 이상한 것이죠. 선민 집단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을 칭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죽는다는 표현도 생명을 잃는다는 뜻이 아니라 거룩한 선민의 집단에서 추방당했다는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성경에서 죽고 죽이는 표현이 많은데 이 모두가 육적인 생명을 앗아갔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숨기고 내지 않았다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는데 이렇게 무자비하게 마구 죽인는 것을 성경의 기자들도 분명히 읽고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의문을 가졌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의 기자들은 자신이 쓰고 있는 성경보다 먼저 쓰여진 성경을 읽으면서 그 상징적 의미를 무리없이 이해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들도 죽고 죽이는 유사한 표현을 계속하여 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상징성을 가지고 이 사건 하나만 설명할 수 있었다면 저는 님에게 이런 내용을 말씀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 특히 구약의 거의 모든 사건은 완전 허구적인 사건을 통해 영적 교훈을 주기 위한 것도 있고 또 역사에서 실제로 발생하였던 사건을 소재로 상징적인 의미들을 삽입하면서 새로운 영적 교훈을 나타내려는 의도하에 각색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본 기사에서도 말하였지만 바벨론 유수와 같은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죠. 그러나 느헤미야의 성벽재건을 묘사하는 내용은 흔히 말하는 픽션입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강한 상징성이 들어있습니다. 이 상징성만 바로 이해하고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일관되게 나타나는 이 상징성과 그것을 가지고 나타내려는 성경 전체의 주제를 눈으로 희미하나마 직접확인할 수 있게되면 그때에는 성경에 대하여 어렴풋이라도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작업을 하는데에는 비평학이나 고고학 그리고 언어학등과 같은 관련학문에 대하여 매우 폭넓고 깊은 학문적 지식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글을 드렸습니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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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1-14 22:07:11
저는 개인적으로 에덴동산 이야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댓글을 읽고 저의 이해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갑니다.

저도 선생님 말씀처럼 성경해석은 영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뿐 아니라 모든 경전이나 깨달음들이
영적으로만 이해가 가능하지요..

문제는 그 영성이나 깨달음의 수준이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는 사실이겠지요.
사람에 따라서
억! 하는 소리로 깊은 깨달을 얻을 수도 있고
명상이나 기도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고 봅니다.
.
성경지식을 전혀 모르는 어린이들이 오히려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진리를 체험하고
신앙적인 삶을 누릴 수가 있지요.

그러면에서 저는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어린이들 같은 순수한 마음, 영적체험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 마음을 자주 강조하신 이유도
바로 그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는 선생님의 일전 주장에 저는 전적으로 공갑합니다.그
렇다면 굳이 해박한 성경지식이 없이도
훌륭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이야기지요.

저의 개인적인 삶을 되돌아 보아도 그렇습니다.
가장 순수했던 신앙을 가지고 행복한 삶을 살았던 시절이
지금처럼 성경지식이 없었던 어린시절이었거든요.
그 시절에는 신학이라는 말을 들어 보지도 못했지요.
.
크리스마스 때가 다가오면 싼타크로스를 마냥 기다리고,
겨울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세며
"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천사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쌓여가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성경지식이 천국을 체험할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빼앗아 갔지요.

서구인들은 사랑을 지식으로 이해하고
교육을 통해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고 믿고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착각이고 오해지요.

사랑은 신앙처럼 개인적인 체험이지요.
사랑은 이성보다는 느낌, 머리보다는 가슴에
더 가깝다는 것의 저의 이해입니다.
느낌이나 체험은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말을 통해서
전달 될 수가 없지요.
신앙과 사랑은 마치 꽃향기와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위에서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지요.

다만, 사랑의 모습은
바올처럼 부정적인 접근방법을 통해서 어슴프레
이해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올이 고린도 전서에서 말하는 사랑의 특성이
아닌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나면 사랑의 특성만
남겠지요.
이것도 저의 개인적이 체험일 뿐입니다.

주위에서 성경지식이 많은 사람들, 특히 구원의 확신을
훈장처럼 자랑하고 다니시는 분들과 자주 마주칩니다.
그런 신앙인들일 수록 예수님 보여주신 신앙적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저도 그런 사람 중 한사람입니다. 매상
아들과 아내로 부터 신앙적 위선자라는 비판을
받고있거든요.

저는 성경을 과학이나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지식과 학문을 추구하려고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그런 접근은 인간을 신앙의 바탕인 가슴으로
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고,
신앙을 삶이 아닌 머리 속 지식이나
사변으로 이해하려는 결과을 가져오게 할
위험성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

사랑을 가슴으로 체험하는 삶,
저는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닐까 하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주제넘는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좋은 글, 댓글을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고갑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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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1-15 11:04:57
박 선생님,
저는 지식이 깨달음보다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른 깨달음은 바른 지식이 바탕이 되어 이성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맹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종교적 권위주의에 함몰되어왔고 또 반지성적인 신앙을 요구하면서 사람들은 깨달음이라고 착각하는 맹신과 그릇된 이해를 추구해왔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것을 바로 잡기 위헤서 이 시대에는 지식과 이성이 우선된다는 강조할 따름입니다.
지식이 깨달음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달음이 지식으로 나아가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바른 지식이 없이는 바른 깨달음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이고 균형의 문제입니다.
종교의 최종적 목표는 지식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최종목표는 삶이어야 합니다. 지식이 바탕이되어 이성적으로 흔들릴 수 없는 깨달음에 도달하고 그 깨달음을 통한 사람의 실천이 결국 종교가 추구해야 할 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 이 시대에는 우선적으로 지식을 겸비한 바른 이성적 사고를 가져야 고대에 쓰여진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고대에 구약이 쓰여질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지식이란 것이 따로 필요없었을테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기에 우리는 그 시대로 돌아가 그 시대의 문화적 역사적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 입고서 성경을 읽고 저자들이 말하려던 것을 들을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성경이 사랑을 말하려고 했다는 말을 하였을 때에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도 지금과 그 당시에는 그 의미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는 항상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서 수천년전의 종교적 경전을 자신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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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1-15 13:46:25
그리고 개념의 차이겠습니다 만
이분법적 서구의 논리로 지식과 논리자체를
부인하는 동양적 깨달음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그에 대한 의견을
함께 나누지요. 사변을 피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사변일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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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1-15 13:32:03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신앙은 삶일 때만
의미를 갖지요. .

무지를 맹목적인 믿음의 이름으로 더이상 합리화 시킬 수는
없다고 봅니다.
현대는 더이상 그런 무지가 통하는 세계도 아니고요.

제가 보는 미국기독교인들과 한국기독교인들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기독교는 일종의 문화지요.
반면 한국인들에게 기독교는 교회나 율법 그자체지요.
한국기독교인들의 문화는 여전히 유교적, 불교적
샤마니즘 적이지요. 기독교 옷만 걸치고 있다고 할까요.
그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요.

저는 선생님의 견해를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존경합니다.
다만 사변적인 흑백논리로 성경을 이해하고 있는
맹신적인 기독교인들을 우려해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의 삶이 빠진 기독교는 구복을 추구하는
무당 굿이나 샤마니즘 과 다를 바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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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1-15 04:38:55
박평일님!
절대 주제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안다고 자부하는 우리모두가 들어야 할 말입니다. 박평일님의 글을 읽고 감동했습니다. 말도 않되는 내용으로 소리질러 가면서 온갖 제스쳐 있는데로 다 써가며 해대는 인위적인 꾸중 위주의 설교 10편 듣는것 보다 님의 이러한 글 한편이 더 은혜롭고 갑격스럽습니다. 첫사랑의 기쁨을 회복해야 하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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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1-14 15:39:21
감사합니다. 고수를 제대로 만났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수 배웁니다. 엘리사의 대머리 이야기의 이러한 해석은 정말로 님으로 부터 처음 듣습니다... 지금까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을까?" 라고만 생각했었지요. ㅎㅎ 암곰이 이방인을 의미한다는 것도 매우 새롭게 다가오네요. 근데 혹시 이건 너무 지나친 ALLEGORICAL INTERPRETATION 은 아닐까 걱정도 되네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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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1-15 00:19:53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암콤 = 이방인'이라는 등식을 성립하면 안됩니다. 어떤 알레고리도 수학적 등식처럼 쓰여질 수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암콤을 이방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표현입니다. 좀 더 세밀하게 표현하자면 암콤이란 선민들 가운데 집단의 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부분에 더 많이 빠져 있는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엘리사를 비난하던 자들이 결국은 세속화된 사람들의 사상에 물들어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갔다는 표현이 더 가까운 표현일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이방인이란 단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거룩한 무리에서 벗어나면 모두 이방인이고 또 그 거룩한 무리안에 들어오면 선민입니다.

그리고 지나친 알레고리 해석이 아닐까 걱정이 디신다고 하시지만 성경은 어떤 정확한 해석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놓고 다양한 비평이 존재하듯이 다양함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성경의 해석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기준은 있습니다. 그 기준 가운데 하나가 일관성입니다. 알레고리로 보여지느 단어나 표현이 일관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사용되어지고 그 의미가 성경전체의 주제와 일치한다면 그것을 지나치다 혹 모자라다고 말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성경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이 되었고 알레고리적 해석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문자적 해석으로 돌아서기 시작해서 지금은 알레고리적 해석이 거의 금기시 되어있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한 단어의 알레고적 의미가 성경의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여 어떻게 일관되게 사용되는지를 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저의 해석만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저런 다른 방법의 해석이 성경의 통전적인 주제와 일치한다면 그것을 거부할 수도 없구요. 문제는 해석의 방법의 일관성과 논리입니다. 현재 정통주의 기독교의 해석은 모순들이 너무도 많지만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모순을 가리고 있고 또 교권주의에 의해 강압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며 한편으로는 이단이라는 단어를 통해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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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제자 (49.50.206.22)
2013-01-14 12:57:38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을 믿지 못하니...
성경이 신화와 전설로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출발에서부터 설정이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많으면서, 기독교 진리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전혀 무의미합니다. 다른 교훈도 허구가 될 뿐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사실과 진실을 기록한 성경을 토대로 존재할 뿐입니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인하면서... 어찌 그것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성경을 사실로 믿고 안 믿고는 개인적 자유입니다. 그러나 신적인 초자연 영역을 '자연의 영역' 속에 가두는 사고로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자연 현상은 물론, 때론 그 이상을 말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3~4천년 전의 광야를 지금의 광야와 같은 조건으로 가정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중동과 몽골 지역의 급격한 사막화 현상을 경시한 듯 합니다.

결론적으로, 결정적인 실증 없이 성경을 신화나 전설로 믿는 것 또한 마치 진화론을 믿는 것처럼 '대단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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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5.234)
2013-01-13 19:05:52
내가 몆달전 얘기했지만 이런글은 여기 당당 같은 대중매체에 싣지말고
전문지 ㆍ연구지 같은곳에서 지지든 볶든 하란얘기요ㆍ
혹여 일부성도들의 신앙관에 혼돈을주어 믿음을 쇠퇴 시켰다면
한영혼을 거두어가는 "악마" 와 다를게 뭬있오!
그래서난 "에큐메니칼" 에 연연하는 NCCK . WCC 부산총회
이런거 반대 하는거요ㆍ 어떤교회다니는 악마 집단은 몸에도 해로운
"베리칩" 오른손등이나 이마 에 맞는거 괘찮다고 성명서까지 냈씁디다 ㆍ
참으로 혼란의시대 가 분명한 축 에 우리는 살고있다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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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184.146.89.215)
2013-01-14 10:32:22
왜 감추려는 것이죠?
진실을 감추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신학교 (그것도 아주 진보적인 신학교)에서만 이러한 담론이 펼쳐지는 것은 옛말입니다. 저와 같은 일반교인도 개인적으로 이러한 부분의 책들을 많이 읽고 깨우쳤소이다. 성경의 권위가 뭐길래 그리도 진실을 감추려고 집착하시는지요? 이제는 때가 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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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5.234)
2013-01-14 11:53:53
감추어? ㅎ
이글이 맞으니 댜중에게 감추자?로 들렸나보네ᆢ ㅋ
그게안굽쑈 초신자들은 설왕설래하는 짓거리자주보게되면
아직은 성경적정착이 안되서 오히려 그들의 고민만 키우다 실족
하는경우가 많기때문에 소설과현실 즉 드라마 영향성같은
오류를 남기게 된다는거요ㆍ 당당 이야 이런 낚싯글 로 클릭수 올리고
그 클릭수대비 광고료 Up 의 영업이익이 눈앞에 보이기에 못할이유 없지만
자기가 무슨큰진실을 뿜어내는 지식의자랑 으로 글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그런얘기올시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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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1-14 12:59:50
개혁본부님의 본래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류목사님의 글에 지식자랑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일반성도들에게는 조금 충격적인 담론이 될수도 있겠죠. 초신자들 중에 이런 이야기들로 인해 실족한 나머지 신앙까지 잃어 버릴수도 있을것이고요. 그렇지만, 그러할지라도 이러한 담론은 일반교인들에게도 반드시 전해져야 합니다. 신학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바로 알고 또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고 변화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성도라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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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5.234)
2013-01-14 13:53:08
위에 작은제자 분의 글 참조 하였으면 합니다 ㆍ
부모가 자식들한테 살아온 역경과 성공담을 조금은 미사여구를 붙였다 합시다
그것을 자식들이일일이 내용을 분석하고 든다면 참으로 고이얀 자식들이죠ㆍ
하물며 창조주하나님ㆍ우리죄를대속하신 주님의이야기를 인간의 짧은견해로
나블거린다? 그거 고이얀 자식 입니다 ㆍ그리고 특히 웟글밑바탕에는 더진일보하면
결국 기독교도하나의종교일 뿐이다 이런것이네요ㆍ글쓴이가 분명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원주의 의 현대 라고ㆍ씁쓸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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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2
Picky (76.23.169.116)
2013-01-13 13:25:54
전체의 대의에는 동의를 하지만
좀 아쉬운 면이 보입니다. 우선 숫자에 관한 설명은 뚜렷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고 또 성경의 표현을 놓고 제시된 숫자의 의미를 대입해 보면 약간의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3, 4, 6, 7, 10 40등의 숫자에 관해서도 동의하기 힘든 성경의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차치하더라도 나머지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시하셨으면 합니다.

또 출애굽과 기타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의 기술이 아니었다면 왜 지금까지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기독교가 받아들여왔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을텐데 그것에 대한 대답이 궁금합니다. 올브라이트학파가 주도하던 고고학계의 변화가 최소주의학파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 영향이 왜 한국의 기독교에는 전달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대답도 궁금하구요.

그리고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사건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이 단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라고만 하면 설득력이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나머지 아홉개의 저주가 각각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텐데 그것을 전부 명확하고 일관성있게 설명을 하지 못한다면 논지의 주장이 바로 서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역사가 아니다고 주장한다면 저는 100% 동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마치 역사적 사건처럼 기술한 것을 놓고 보았을 때에 성경의 저자는 분명히 자신이 기술하고 있는 가상의 사건을 통해 어떤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려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달은 표현에 나타난 상징성, 즉 알레고리적인 방법에 의해 전달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고 또 고대에는 그런 문서들이 자주 나타났습니다. 고대인들이 지니고 있던 언어에 대한 개념도 그런 유형의 방법을 사용하기에 적합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각각의 사건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아직은 어떤 학자도 제시하고 있는 방향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저도 오랜 동안 구약의 사건들을 표현하는데 사용된 단어와 어휘들의 상징성에 대하여 연구를 했습니다. 저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었고 또 그 결론을 가지고 성경을 재해석하면서 숭요할 수 있는 범위내의 일관성이 구약에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로 구약의 상징적 표현을 부분적으로 사용한 흔적이 보이고 또 예수가 구약을 인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유로 말할 때에도 구약에서 사용된 상징적 표햔을 빌어다가 사용한 것을 발견합니다.

기회가 되면 의견을 나누고 싶기도 하지만 일단은 연재로 글이 게재될 것 같으니 좀 더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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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7
정기호 (220.86.166.17)
2013-01-13 13:09:45
숫자의 풀이는 다른 공식도 있습니다.
숫자의 풀이는 성경의 서론격인 창세기에서 보면 성서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서의 숫자에 대한글을 올려 보겠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있겠습니다만 지나치게 인위적인 해석으로 보여집니다. 저도 전에는 칼로스의 이론을 따르고 해석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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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5
무대뽀 (58.234.98.101)
2013-01-14 09:26:35
성경의 이야기가 마냥 설화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요....
시나이에서의 흔적이 없다거나 논리가 맞지 않는다면 성경이 잘 못된 것이 아니라 그 추적이 잘 못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미 시내산이 시나이반도에 있는 산이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는 학설과 그 흔적과 유물들이 발견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성경을 알려진 고정된 틀로 보지 말고 좀 더 넓게 찾아야 하리라 봅니다.
저도 성지순례를 통하여 느낀 것이 도무지 퍼즐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 광야 40년이 시나이에서는 맞지 않아도 사우디아라비아라면 제 관점으로는 맞아 떨어진다고 봅니다.
성경의 신뢰성을 물을게 아니라 그것을 추적한 루트가 올바른지를 확인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미 구글지도에 보면 사우디아라비아에 호렙마운틴이 나타나 있고, 여러가지 자료들이 올라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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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1-14 11:19:42
이건 단지 시내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을 가지고 볼 때에 최소한 50만 이상의 히브리 노예가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광야로 출발한다면 당시의 경제구조를 보았을 때에 이집트는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가 붕괴된다는 뜻입니다. 고대의 농경사회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집단이 하루 아침에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 사회는 완전히 와해된다는 것은 상식만으로도 가능한 추측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이집트 문서에는 이런 사실에 대하여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그 어떤 사회적 문제를 기술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도 없다는 것은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을 정당화시킵니다. 그리고 시내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는 학설은 고고학들의 관심을 잃기 시작한 것도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 사건에 대한 어떤 작은 단서도 발견된 것이 없다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50만에서 1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가축들을 이끌고 광야를 이동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40년을 광야에 마물었다면 아주 작은 단서 하나라도 남겼을 것이고 40년 동안의 집단 생활을 목격한 주변 국가의 사람들이 작은 기록 하나라도 남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집트에서 40년 동안 그 뒤를 추적하거나 다시 협상을 벌이지 않은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리고 더욱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모세 이후에 여호수아에 의해 가나안의 점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성경 자체가 스스로 모순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끝에는 여호수가 가나안을 전쟁을 통해 점려한 후에 열두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죽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사사기는 그 시작에서 여호수아의 죽음뒤에 유대백성들이 다시 가나안의 점령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쉽게 말해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고고학적으로도 가나안의 점령을 위해 전쟁을 벌인 흔적이 없습니다. 이 시대의 고고학자들은 성경을 더 이상 고고학적 자료로 삼지 않습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구시대에 기독굑 문화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당시와는 많은 변화가 있고 그 변화는 성경에 대하여 보다 정확한 이해와 그 역사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기독교인의 태도는 이해합니다. 종교적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과 동등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고수하는 것만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 기사는 그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의도가 그 뒤에 숨어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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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8
굿모닝상하이 (180.158.61.251)
2013-09-04 08:52:17
Picky 님 안녕하세요...글을보면 하나님자체를 부정하시는 분이시라 생각이 됩니다 물론 개개인의 신앙관이 틀리고 또한 믿음의 차이도 있곤하지만...결국은 성경의 부정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말거든요..허기사 불교나 그외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도 많으니 마찬가지로 이 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사람이 유혹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논리의 주장대로 믿자면 뭔 하나님이계시며 뭔 출애굽...뭔 가나안 정복이 있었겠어요 ..성경이 다 틀리면 다 사람의 논리대로 이야기 한다면 이 세상이 다윈의 주장처럼 걍 우연히 생겼고..이런거나 마찬가지이지요 걍 믿지마라 이런듯으로 들리는 군요 에베소서에 나와있는 말씀으로 나머지 답변을 대신합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변론입니다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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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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