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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과연 믿을만 한가?성공과 번영의 신화를 추구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통일교 문선명의 죽음을 바라보며
김명섭  |  onthewaychurch@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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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09월 04일 (화) 22:29:23
최종편집 : 2012년 09월 27일 (목) 02:26:47 [조회수 : 8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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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을 기록한 목적

누가복음1장 4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글은 본디 저마다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된다. 신약성서의 세 번째 책인 누가복음도 예외는 아니다. 누가복음은 그 서두에 글을 쓴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성경을 세심하게 읽는 독자들도 무심코 지나쳐 버리지만, 위의 서문은 누가복음의 핵심이다.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데오빌로 각하'이다. ('각하' 란 단어는 최근 젊은 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인터넷 팟케스트 <나는 꼼수다>와 공교롭게도 “각하”를 위한 헌정방송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물론, 그 내용이야 별 상관없겠지만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 특별히 헌정되었다는 점에서 누가복음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각하' 라는 호칭은 그가 로마제국의 공직자요, 로마시민이라는 특별한 그의 신분을 나타낸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바로 '이방인'이라는 점이다. '데오빌로'(Θεο-φιλε)란 이름에는 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는데 '데오스'란 '하나님'이요, '필로스'는 친구간의 우정을 나타내는 단어다. 따라서, '데오빌로'란 이름은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라는 뜻을 담고 있는 파자(破字)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오빌로'에게 이미 배워서 알고 복음에 대해서 또 다시 확실하게 증거해야만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누가복음을 기록한 목적이다.


복음을 왜곡시키는 숨은 이단

누가복음을 기록할 당시 기독교 공동체는 두 가지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하나는 복음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이단'이요, 또 다른 하나는 로마제국의 '박해'였다.

여기서 말하는 '이단'(異端)은 단순히 오늘날 득세하는 통일교나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종교집단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가 아니다. 겉으로는 신실하게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숭배’를 일삼는 자들을 가리킨다. 곧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그릇된 신앙인들을 말한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속으론 물질과 권력, 명예와 성공을 주인으로 섬기는 숨은 이단들이다. 이와 같은 숨은 이단들의 위험은 드러난 이단 보다 더 심각하게 기독교공동체를 위협하는 적(賊)들이였다. 숨은 이단들의 기원은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절하던 타락한 출애굽 백성들이요, 물질적인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가나안 토착신,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겼던 엘리야의 시대의 타락한 제사장들이다.

예수는 이와 같은 숨은 이단들을 가리켜 '양의 탈을 쓴 이리'요,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후예는 중세 로마카톨릭교회를 타락시킨 종교지도자들이며, 오늘날 한국교회를 배금주의와 형통복음으로 물들게 한 타락한 교회지도자들이다. 한마디로 ‘숨은 이단’이란, 신앙공동체 안에서 정통의 탈을 쓰고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거짓종교지도자들을 말한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스스로를 믿음의 화신이라 자부하던 제사장과 바리새인, 율법학자와 서기관들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한 복음의 왜곡과 변질을 고발하고 있다. 숨은 이단들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모양과 이름을 달리한다. 그들의 변하지 않는 공통점은 정통이라는 탈을 쓴 채 탐욕으로 복음을 왜곡시키고 급기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상 사람들이 격멸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일을 거룩한 교회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일이다.


복음을 무기력하게 하는 숨은 박해

이천년전 원시기독교공동체를 위협 했던 '박해'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독교인들을 원형경기장에서 굶주린 사자들의 밥이 되게 하거나, 십자가에 거꾸로 메달아 화형 시켰던 악명 높은 네로와 도미티안황제에 의한 박해만이 아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박해는 막대한 자금력과 막강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절대권력과 그 배후에 있는 로마제국이였다. 더 정확히 말해서, 지배와 약탈로 온 세상에 군림했던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였다. 로마제국은 누구도 거부 할 수 없는 '세속적인 사고방식'이요, 누구도 거스릴 수 없는 '세속적인 생활방식'이였다. 번쩍이는 황금과 무자비한 폭력이 황제노릇 하는 세상 속에서 진리와 사랑, 정의와 평화는 무기력하고 초라했다. 로마황제에게 복종하고 충성을 맹세 하는 이들은 출세와 성공, 미래와 행복을 보장 받았다.

이와 달리, 저항하는 이들은 수치와 수모를 당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야만 했다. 거대한 황금독수리의 우상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해 고귀한 가치를 포기하고 그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 수천명의 중기갑보병으로 무장한 레기온(Legion,로마군단)의 창과 방패는 급기야 하나님의 도성이던 예루살렘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짓밟아 무너뜨렸다. 그 가공할 위력 앞에 기독교신앙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사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로마황제를 그리스도로 섬기는 배교를 선택했다. 믿고 따랐던 복음이 거대한 현실 앞에서 무기력 해지는 상황이야 말로 당시 신앙인들에게 직접적인 핍박보다 무서운 영적인 박해였다.


기독교의 복음은 과연 복음인가?

누가복음은 바로 이와 같은 ‘숨은 이단’과 ‘제국의 박해’ 속에서 고민하는 ‘데오빌로’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오빌로들은 정통의 탈을 쓰고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이단들이 전하는 변질된 신앙에 물들어 가거나, 예수님을 버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처럼 실망해서 기독교신앙을 등지고 떠나갔다. 한때 기독교의 복음을 배우고 받아들였던 이들 조차 강력한 로마제국의 통치 앞에 배교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유지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진 종교지도자들도 세속적인 성공과 번영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에 물들어 버렸다. 누가복음은 거대한 물줄기 처럼 흐르는 성공과 번영의 신화와 하늘을 찌를듯한 힘과 권력이 다스리는 세상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였다. 내부의 이단에 의해서 타락한 복음의 본질을 회복시키려는 진지한 응답이요, 외부의 박해로 인해 배교 하는 데오빌로들을 향한 복음의 변증이였다.

 

 

   
▲ 문선명 총재(가운데 왼쪽)와 한학자 여사(가운데 오른쪽)가 1997년 11월 미국 워싱턴의 RFK 스타디움에서 열린 합동결혼식을 주재하고 있다.ⓒ 헤럴드경제


이 시대의 데오빌로들에게

 

누가복음이 기록된지 이천년이 지난 오늘, 이 시대의 이방인 데오빌로는 누구이며, 오늘의 데오빌로들이 겪고 있는 이단과 박해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내가 이 책을 기록하는 목적이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할례와 안식일, 절기 및 규례와 같은 외적인 조건으로 스스로를 충분한 유대인이라고 여겼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례와 직분, 예배와 봉사와 같은 교인의 의무를 감당하면 스스로 충분한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한다. 유대인의 현대적 의미는 '교회 안에 있는 기독교인들'이다. 모태신앙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의 직분을 맡고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십일조와 봉사와 같은 교인의 의무를 감당하는 기독교인들이다. 이렇게 볼 때, 현대적인 의미에서 이방인이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데오빌로는 바로 기독교와 예수에 대해서 이미 배웠고 복음의 내용을 익히 알고 있지만 더 이상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다. 한때는 기독교인이였지만 지금은 어떤 이유로 인해서 더 이상 세례와 직분, 정기적인 예배와 교인의 의무를 더 이상 감당하지 않는 ‘교회 밖에 있는 기독교인’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데오빌로들은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거나, 어린 시절 교회학교를 다녔다. 또한, 중고등학교 시절에 미션스쿨에 다녀서 기독교에 대해서는 이미 배워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오늘의 데오빌로들은 자신이 한때 기독교인이였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거나 반대로 대놓고 드러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의 근본가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긍정하면서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그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때는 기독교인이였지만 지금은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 기독교인들, 아직 교회에 머물고 있지만 참된 복음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살아가는 비판적인 기독교인들, 그들이 바로 오늘의 데오빌로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교회를 떠난 것일까? 복음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교회 안에서 머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대의 숨은 이단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은 한국교회를 향해서 서슴없이 ‘개독교’라 부른다.

전현직 대통령 이하 사회의 각계 각층의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대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아프지만 냉혹한 평가다. 물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이끌고 민주화와 산업화를 주도했던 한국교회에 대해서 이와 같은 평가는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부적절하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부인할 수 없는 21세기 한국교회의 현주소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말도 안되는 조롱거리로 전락한 까닭은 기독교보수단체들의 추태와 연일 뉴스를 떠들썩하게 하는 일부 대형교회의 ‘길 잃은 목자들’ 때문만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토록 홀대 받는 진짜 이유는 세상의 구석 구석에서 이른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행하는 크고 작은 추태들이 진짜 원인이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는 좋지만 교회와 교인들은 싫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이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니까,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했다면 지금은 ‘이 사람은 교회에 다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현실교회에 대한 실망이 한때 기독교인이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게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20대와 3,40대의 젊은 층과 비교적 학력이 높은 지성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교회를 떠난 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들은 덜 타락해 보이는 대형교회나, 혹세무민 하는 구원파나 신천지와 같은 이단종파로, 혹은 불교나 천주교등의 타종교로 개종하거나, 심지어 안티크리스천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종교적 색깔이 없는 스포츠 같은 취미생활을 함께 하는 동호회의 골수 맴버로 개종을 한다.


예수 없는 한국교회

놀랍게도 오늘의 데오빌로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이 천년전 누가복음의 기록될 당시의 상황과 동일하다. '이단'과 '박해' 때문이다.

이 시대의 이단은 단순히 혹세무민 하는 사이비종교집단만이 아니다. 소위 ‘정통’이라고 일컫는 현실교회와 그 교회지도자들에 의한 복음의 왜곡과 변질을 포함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데오빌로인 김두식은 '교회 안에 세상, 세상 밖에 교회'라는 책에서 한국교회의 젊은이와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한마디로 '예수 없는 한국교회'와 '교회의 세속화'라고 진단한다. '예수 없는 한국교회'란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고 실종된 교회를 가리키며, '교회의 세속화'란 예수께서는 영원한 가치 곧 희생과 감사, 섬김과 나눔, 겸손과 평화를 가르쳐 주셨지만, 겉으로는 영원한 가치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성공과 번영, 명예과 물질 등의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몇해 전, 기독교인터넷매체인 뉴스엔조이가 시행한 '왜 교회가 싫은가?' 라는 설문에 대해 많은 응답자들이 '교회는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고, 자기들 끼리 싸운다', '교회는 세속적이다. 아니 세상과 똑같다. 아니 세상보다 더 세속적이다'라고 하면서, 입으로는 섬김을 말하지만 섬김을 성공의 수단으로 여기는 한국교회의 교묘한 타락을 꼬집었다. 그래서, '예수는 좋지만 타락한 교회와 타락한 교인은 싫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기독교복음 자체가 아니라 현실교회에 대한 혐오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복음의 본질로부터 멀어진 교회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깊은 실망이다.


오늘의 박해

하지만, 이 시대의 이방인 데오빌로들이 교회를 떠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박해’ 때문이다.

요즘 같이 민주화된 대명천지에 박해가 왠말인가? 다소 쌩뚱맞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오늘의 데오빌로들은 엄청난 박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로마황제의 통치 아래 살지 않는다. 하지만, ‘황금만능주의’라고 불려지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거대한 물질주의의 통치 아래 살아간다. 전지전능한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바로 그것이다. 고대제국들은 칼과 창 같은 폭력으로 통치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물질만능주의에 통치는 돈과 권력으로 그 모양만 바뀌었을 뿐이다.

고대제국주의와 현대의 물질주의에는 매우 유사한 공통점이 있다. 이 둘 모두 침략에 의해서 영토를 확장하는 팽창주의와 약자를 강탈하는 식민주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데오빌로들은 약육강식과 같은 정글의 법칙이 다스리고, 승자독식과 같은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무한경쟁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금력이 필승을 보장하는 물량주의와 부가 곧 성공의 척도인 자본주의 사회 가운데서 행복의 척도는 두말 할 것 없이 돈이다. 그속에서 무한경쟁이라는 기치 아래 실로 전쟁같은 현실을 살고 있다. 누구도 이러한 현실을 거부하거나 부인할 수 없다. 인생의 목적도, 공부하는 목적도, 직장생활의 목적도, 인간관계의 목적도 돈이다. 실로 돈이면 안되는게 없는 세상이라고 믿기에 전지전능한 돈을 섬기며 살아간다. 이 시대의 데오빌로들이 교회를 떠나는 진짜 이유는 먹고 살기 바쁜 삶의 고단함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진짜 이유는 기독교의 복음보다 물질만능주의가 주는 세속적인 쾌락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돈에 대한 그릇된 맹신 때문이다.


믿을 건 돈 밖에 없다?

세상에 믿을 건 돈 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과연, 기독교의 복음은 여전히 복음일 수 있을까?

부과 번영, 속도와 성장, 외모와 학벌이 최고의 가치로 당연시 되는 세상 속에서 과연 사랑과 생명, 나눔과 섬김, 평화와 정의와 같은 불멸의 가치들은 진부하고 매력이 없어 보인다. 그져 '대기업들의 공허한 기업홍보용 문구'나, '교과서적인 얘기', '선거철에 정치인들의 사용하는 비현실적인 공약' 쯤으로 치부되는 현실이다.

영원한 가치보다 세속적인 가치를 신봉하는 현상은 복음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부흥과 성장이 모든 교회의 일차적인 목적이요 지상과제가 되버렸다. 목회자들의 설교와 성도들의 봉사와 헌신도 따지고 보면 모두 부귀와 번영, 인기와 명예 같은 세속적인 가치를 향해 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인들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섬기며 살아간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이유도 돈을 더 많이 안정적으로 벌기 위한 수단으로 여길 정도다. 제 아무리 고귀한 가치과 참된 삶을 주장해도 ‘세상에 믿을 건 돈 밖에 없다’는 신념을 부인하거나 돈이 주는 즐거움과 영향력을 따라 갈 재간이 없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실 속에서 ‘과연, 기독교의 복음이 오늘도 여전히 참된 행복을 주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오늘의 데오빌로들이 기독교를 떠나는 진짜 이유다.


기독교, 과연 믿을만한가?

오늘날 기독교는 성공과 출세, 번영과 명예 같은 세속적인 가치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종종 오해되기도 한다.

더욱이 ‘속도’, ‘성장’, ‘개발’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각하의 출현으로 기독교에 대한 오해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연, 만사형통과 소원성취 따위가 기독교의 본질인가? 그게 아니라면, 과연 성경이 증거하는 기독교의 복음은 무엇인가? 물질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기독교복음은 여전히 믿을만한가? 누가복음은 바로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응답이요, 고백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단'과 '박해'의 문제는 교회 밖으로 떠나버린 이방인 데오빌로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복음의 본질을 '정직하고 착하게 살자'는 식의 메마른 도덕주의나 ‘하면 된다’는 출세와 성공 지상주의, 자녀와 건강과 같은 세속적인 축복을 기독교복음의 전부로 여기며 살아가는 '교회 안의 데오빌로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비극적인 사람들은 '교회 밖에 데오빌로들'이 아니다.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고 말씀과 기도, 봉사와 헌신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참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교회 안에 데오빌로들'이다. 그들은 기독교복음이 주는 마음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통한 신앙의 참맛을 듣도 보지도 못한 채 우물가에서 목말라 죽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을 한다. 예수께서 그토록 증거하신 사랑과 감사, 평강과 기쁨이 다스리는 영원한 가치를 누리는 삶을 단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하고 우상숭배의 차원을 넘지 못하는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머물고 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시대의 진짜 데오빌로들은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의 타락을 비난하며 말도 안되는 잡설로 사람들을 현혹해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종파에 빠져 영혼을 저당 잡힌 신앙인들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누가복음을 다시금 탐독해 할 이 시대의 진정한 데오빌로는 교회 안에서 세속적인 복음에 의문을 던지며 신앙의 본질을 탐구하는 목회자와 신학도들이다. 우리가 당연시 여기고 배우고 가르쳐 온 복음이 과연 성경이 증거하는 참된 복음인가? 이 복음은 과연, 물질만능주의가 다스리고 있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참된 행복을 주는 능력이 있는가? 이 책은 바로 이와 같은 오늘의 모든 데오빌로들을 위한 책이다.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루카스> 중에서

   
▲ 김명섭
*성공과 번영의 신학을 추구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단자, 통일교 문선명의 죽음'을 바라보며, 아직 좋은 출판사를 만나지 못해 세상에 나오지 못한채 잠들어 있는 필자의 원고를 몇자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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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121.135.28.200)
2012-11-11 16:05:05
책이 빨리 나오기를 기다리며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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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2
진정한 이단 (211.253.82.235)
2012-09-16 10:50:06
진정한 이단
글쓰신분의 내용이 주옥같습니다.
과연 성공을 추구하는 감독회장에 대한 야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문선명과 다른 사람입니까.
단지 정통의 가운을 입으면 정통입니까.
수많은 문선명이 정통의 가운을 입고 감독을하고 감독회장을 하고 그 야망을 불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계신걸까요? 이 야망에 불타는 목사들을 보면서 저는 근본적인 의문에 빠집니다. 지금의 목사들은 저 하얀 옷을 입고 깨끗한 사진으로 존재하는 문선명과 내용면에서 동일하겠으나 정통을 주장하거나 교묘히 이용한다는 점에서 더 악랄하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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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1
창공 (121.162.90.4)
2012-09-06 08:14:03
공감
글 내용에 깊이 공감합니다. "데오빌로" = "하나님을 사랑하는 친구"
그렇게 해석하니, 정말 그렇게 이해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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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2
신천지는 두려워말라 (112.171.136.97)
2012-09-05 18:10:08
통일교도 두려워말라!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할 것은 교회의 부흥뒤에

숨어서 이단 노릇하며 성도들을 속이는 자칭 정통이라고

속이는 정말 큰 이단들이다.

중대형 세습교회 돌려 세우기교회 담임직 매매교회등이

정통을 가장한 무서운 이단들이다.

물론 개척 당시에는 신실한 믿음이 함께 했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부흥을 이루고나니 하나님은 내쫒고

자시이 하나님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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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4
익명 (222.98.132.163)
2012-09-05 11:11:20
엄밀히 말하면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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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심마니 (59.26.219.156)
2012-09-05 12:10:21
'그런데요'님에게.
이 나라 목사들이 읽으면 가슴아플, 참으로 사실적인 글을 올리셨군요. 나는 '이단'이라는 게, 그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신천지나, 통일교나, 기독교 정통장자를 자처하는 교회(목사)들 속에, 신앙의 정수(精髓)가, 아주 드물게 있기도 하지만, 기타 대부분 교회(목사)는, 모두 인간의 삼독(三毒)에 푹씬 빠져 삽니다. 불신자들보다 더 깊이, 삼독에 빠져 살다가 형사고발 당해, 법원에서 유죄판결 받은 목사가 우리 한국에만도 부끄러울만큼 많습니다. 목사들 노조(勞組)에 불과한 교회의 상부 조직에서는, 그런 자들까지 감싸주니, 교회에 무슨 '정의 와 진리'가 일겠습니까? 참 종교의 일은, '약자(弱者)를 도와' 그들에게 삶의 희망과 보람을 느끼게 만드는 것과, 험난한 인생길에서 지혜롭고 정의롭게 살 수 있도록, 신도에게 '깨우침'을 주는 것인데, 한국교회는 그런 설교나 그런 일 하는 걸 별로 볼 수 없더군요.
'그런데요 님' 글, 뜻있게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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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1
박평일 (72.196.235.211)
2012-09-05 08:26:01
김요셉 신부 설교에서 따온 글입니다.
어떤 수도원장이 고양이를 아주 사랑했었답니다. 그는 미사 시간에 고양이를 혼자 내버려두기가 싫어 미사하는 동안에 주례석 옆에 앉혀놓곤 하였다 합니다. 그러다가 그 수도원장이 죽었고 고양이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도원 식구들은 미사 시간에 다른 고양이를 주례자석 옆에 앉혀놓고 미사를 드렸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율법이 시키는대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왜 당신의 제자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가?"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려하는지 묻습니다. 즉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해, 하느님과의 만나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지? 아니면, 율법을 지킴으로 하느님께서 그들을 예쁘게 보고 그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도록 하기 위해, 혹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지? 후자의 접근 경우, '나', '나의 것'만을 고집하기에 하느님과 나 사이에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칸들은 프란치스코 때부터 '복음적 삶'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지금도 자주 사용합니다. '복음적 삶'이 무엇을 뜻할까요? 이 말은 예수님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호수가에 앉히시고 배 위에서 자주 설교를 하였기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하셨기에, 우리도 하느님께 그렇게 할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적 삶은 우리 삶에서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정신이 살아나도록, 육화하도록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복음적 삶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적 삶에 대해 많은 말을 했지만, 복음적 삶은 바로 이것이라고 규정짓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유언을 통해 그가 말하는 복음적 삶에 대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프란치스코가 회개생활을 하도록 하셨고, 그를 나병환자에게 데리고 가셨고, 그에게 성당에 대한 신앙심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주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형제들과 함께 어떤 형태의 삶을 삽니다. 그리고 그 삶을 형제들과 함께 복음의 빛 안에서 반추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삶이 주님께서 이끄시는, 주님이 육화하는, 주님을 만나는 삶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는 형제들과 함께 그 삶을 계속 삽니다. 복음적 삶을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주님으로부터 영감 -> 어떤 삶의 형태를 삶 -> 그 삶을 복음의 빛 안에서 관조 -> 주님을 만남, 이것의 반복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과 함께 이러한 삶을 변화하는 삶의 터전에서 살았습니다.

또 다른 예로, 베르나르도와 베드로 2 사람이 프란치스코의 삶과 설교를 보고 듣고 프란치스코를 찾아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들과 함께 성당을 찾아가, 주님께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들은 성서를 3번 펼쳐봅니다. 그리고 "네가 완전한 삶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는 말씀 등을 듣습니다. 이것을 듣고, 프란치스코는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바랐던 바이고, 찾던 바이며, 우리들의 삶의 법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프란치스코는 주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아버지와 결별하면서 자신이 가진 바를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후 계속 나환자들을 돌보며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살았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삶이 있었고, 베르나르도와 베드로는 그것을 보고 프란치스코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복음의 빛에서 그들의 삶을 나누고 삶의 방향을 찾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난한 삶, 나누는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그 삶을 삽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은 이 삶을 복음의 빛에 안에 관조하며 그들의 삶을 또 나누곤 합니다. 프란치스코와 이 전체 과정 안에서(주님으로부터의 영감, 삶, 복음적 관조)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복음적 삶, 혹은 율법이라는 이름하에 어떤 규정, 법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규정, 법 앞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규정, 법을 따르면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가?" '나'와 '나의 것'을 조금씩 내려놓으면서 당신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가? 이런 기존의 규정들 안에서의 하느님 만나는 작업과 함께, 우리 자신이 주님의 영감을 받으며 우리의 삶의 형태를 새롭게 하고, 복음의 빛 안에서 이것을 반추하고 그것을 우리의 형제 자매들과 나누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산 복음을 만나고, 육화하는 복음을 만날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규정과 법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우리를 열어젖히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거룩함의 이름으로 고양이를 제대 주위에 놓는 우를 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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