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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聖靈/Pneuma)은 기독교에 국한된 것인가? (1)
류기종  |  rkch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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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02월 12일 (일) 16:05:24
최종편집 : 2012년 02월 12일 (일) 16:20:17 [조회수 : 3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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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聖靈/Pneuma)은 기독교에 국한된 것인가? (1)

1. 한국교회 성령이해의 문제점:

오늘날 기독교/교회에서 가장 많이 말해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바르게 알려지지 못하고, 또한 가장 깊이 그리고 가장 넓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성령"(聖靈/Rauch/Pneuma/Spiritus)에 대한 것일 것이다. 이것은 곧 성령(聖靈)이 교회 안에서 또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말해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좁게, 가장 얕게, 그리고 매우 부분적으로(very partially) 이해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령에 대해서는 신구약 성서 전반에 광범위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성령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신구약 전체가 성령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성령"이란 말은 본래 히브리어 "루아호"(ruach)인데 이 말의 원뜻은 하나님의 "호흡" 즉 입김(breath), 숨결, 바람, 생기 또는 기운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어로는 "프뉴마"(pneuma)로 라틴어로는 anima 혹은 spiritus 로 번역된다. 그리고 이 말은 신구약 성경에 다양한 기능의 역할자로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하나님은 영이시니"(pneuma)이라고 말하여 하나님을 성령과 동일한 영적 실재로 표현한 것과(요4:24) 또한 성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 곧 진리의 영(요15:26)이라고 말할 것과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성령은 하나님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실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성령은 둘 다 "영"(Pneuma) 혹은 "영적 실재"로서 만유 안에 내재하는 "내재성"과 함께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초월성" 곧 초월적 실재성(transcendental reality)을 지녔기 때문이다.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성령에 충만하여, 성령에 이끌리어 행동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에게 임했다"(마3:16, 눅3:22);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눅4: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눅4:18-21). 즉 예수의 복음사역의 전부는 성령의 인도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행하셨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성경에는 예수뿐 아니라 다른 성령 충만자가 많이 등장한다. 세례 요한도 성령 충만자였고(눅1:15), 오순절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사람들도 성령 충만함을 받았으며(행2:4), 또한 베드로도 성령 충만자였고(행4:8), 스데반도 성령 충만자였으며(행7:55), 그리고 바울과 그의 초기 동역자 바나바도 성령 충만자였다(행11:24, 13:9).

그런데 우리는 특히 요한복음 3장 34절의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성령 충만자로만 묘사되지 않고, 무한대의(절대적인) 성령 충만자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라".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셨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성령 충만자가 아니라, 성령의 무한대의 수령자 곧 성령을 한없이 공급 받은 분이란 뜻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성령 충만자들 중에서 "가장 완전한 성령 충만자"(the perfect spirit-filled person)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모든 성령 충만자 중에서 가장 완전한 성령 충만자란 의미는 바로 성령 충만의 상태와 성령 충만의 참 모습(원형)을 다른 누구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신앙의 근거인 예수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 예수(그리스도) 이전 구약시대 즉 하나님의 우주 창조 시에서부터 활동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 여기에 사용된 "영"이란 말은 히브리어 "루아호"(ruach)인데, 이 "루아호"는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하나님의 입김/호흡 즉 하나님의 창조행위 곧 생명부여의 "기운"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 시에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라고 말하여 "루아호"가 "생기"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뿐 아니라 우주창조 곧 모든 창조활동에 참여한/개입된 사실을 들어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령을 말할 때는, 특히 교리/신학적으로는 성령은 삼위일체론에 관련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 인격으로(the third person of the trinity/the triune God) 이해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삼위일체론이란 모든 교리들 중에서 가장 난해하고 또한 가장 추상적인 교리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삼위일체론 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령을 가장 추상적으로 즉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먼 신학적 이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삼위일체론은 3-4세기에서부터 수백 년에 걸친 교리논쟁 즉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리되기 전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교회협의회"(ecumenical counsels)에서의 장기간에 걸친 신학/교리 논쟁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며, 그 논의는 지금도 진행 중에 있기 때문에 완결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란 용어가 똑 부러지게 성경에 직접 언급된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지게 된 최종 이유도 바로 이 성령론의 차이 때문이었는데, 그 내용은 바로 성령의 근원적 출처(the origin of procession) 즉 성령이 하나님께로 부터만 나왔다고 주장하는 동방교회의 주장과 성부(聖父)와 성자(聖子)로부터("filioque"/또한 아들에게서) 나왔다는 서방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의 차이로 말미암았었다.

이에 대해 서방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기 전에 태초부터 로고스(말씀 혹은 지혜)로 존재했었다고 주장하여, 성령의 출처를 하나님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양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옹호하려 한다. 반면에 동방교회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내졌지만 어디까지나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2천 년 전에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한 한 역사적 인물로 이해한다면 동방교회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특히 예수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충만히 받은 분이라고 이해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분이 또한 성령을 주는 분으로 묘사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히 한국 교회에서는 성령을 이해하려 할 때 주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이해하려 하는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의 본질적 측면 보다는 은사적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성령이 임했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서, 그리고 개인적인 현상보다는 집단적 현상에 대해서, 또한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때 즉 마가의 다락방에서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절박한 상항 속에서 120명의 다수가 함께 기도할 때에 일어났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이때뿐 아니라 성령의 임재 사건이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외의 다른 곳에서 일어난 성령강림이나 성령체험의 사실은 주로 사도들의 설교의 말씀을 들을 때 나타났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실례로,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이탈리아 군인 고넬료의 집에 초청을 받아 설교할 때에 그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방인들)이 다 성령을 받았으며(행10:44-46), 또한 바울이 에베소에서 자신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에게 안수할 때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었다(행19: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임재체험의 공통점이 주로 사도들의 설교의 말씀을 들음과 함께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성령 체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영적인 감동이나 큰 깨달음이 일어남과 함께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성령의 임재사건은 매우 개인적이고 또한 매우 은밀한 가운데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수의 성령체험 사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성령체험 사실은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은 지극히 은밀하게 즉 고요하고 정숙한 가운데 성령이 임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강에서 올라올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막1:11)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때의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 자신의 마음속에서의 영적 체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예수의 복음사역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 행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예수의 복음운동이 바로 성령의 인도로 즉 성령 충만의 상태에서 행해졌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특히 예수의 총애를 받던 사도 요한은 자신의 스승 예수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셨다고 언급하고 있다(요3: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일은 성령 충만의 사실과 또한 성령 충만의 참 모습(모범)은 다른 누구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단순히 성령 충만 자가 아니라, 가장 완전한 성령 충만자 즉 그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한없이 부음 받은 자"(infinitely poured/received person)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을 말할 때에는 사도행전 2장에서가 아니라 성령 충만의 전형(典型/모델)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해야 하며 또한 그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 충만을 말할 때 성령 충만자의 전형(典型)인 예수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는 일은 성령에 대해서 잘못 말하거나 왜곡되게 말할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성령 충만자이신 예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나?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humble/selfless)하고 가장 온유한(mild/kind) 사람 그리고 가장 자비롭고(merciful/compassionate) 가장 지혜로운(wise/intelligent) 사람의 모습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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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사 (123.245.43.118)
2012-02-12 20:01:24
창2:7의 성경원문에 대해서
좋은 글이지만 한가지 원어해설에 있어 의문스런 부분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아래부분입니다...

<이 "루아호"는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하나님의 입김/호흡 즉 하나님의 창조행위 곧 생명부여의 "기운"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 시에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라고 말하여 "루아호"가 "생기"로 표현되어 있다. >

원문 창2:7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는 그 상황에 있어서는
루아흐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생기"에 해당하는 단어는
"니슈마트 하임"으로서 루아흐와는 비슷한 의미이기는 하지만
쓰임이 다른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호흡, 기식,(하나님의 진노의)콧김" 등에
사용되되 영이란 의미로는 성경에서 매우 적고 한정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지적을 드리는 것은
창2:7의 생령을 루아흐라고 가르치며
창조때부터 성령이 우리에게 부여된 것이라는
식으로 가르치며 신일합일 방향으로 몰아가는 어떤 이단적인
사람들의 가르침이 생각나서입니다.
전체 글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합니다...
참고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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