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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섬의 봄 - 춘래불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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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계선 목사 |
“워싱턴 DC로 벚꽃구경 가려는데 목사님도 같이 가시지요?”
“이 사람아, 여기 돌섬바람은 아직도 나뭇가지를 얼게 하는 엄동삭풍이야. 바람 잘날 없이 춥기만 한데 웬 벚꽃여행인가?”
“아이구, 목사님은 돌섬(Far Rockaway)에 갇혀 계셔서 계절 돌아가는 것도 모르는군요. 미국 전역이 봄인데 목사님 계신 돌섬은 춘래불사춘인 모양이지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와도 봄이 아니다!
중학교시절 나는 중국의 4대 미녀 중에 왕소군을 제일 좋아했다. 양귀비 달기 서시는 나라를 망친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지만 왕소군은 나라를 구한 구국의 미인(救國之色)이었기 때문이다. 북방오랑캐흉노추장 선우는 한나라 황제에게 궁녀를 달라고 협박한다. 황제는 화가 모연수가 그린 궁녀들의 초상화를 보고 왕소군을 보내라 명한다. 허리가 굵고 제일 못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내놓고 보니 왕소군은 황제가 사랑하는 절색미인이었다. 왕소군이 뇌물 바치기를 거절하자 일부러 추녀로 그린 것이다. 오랑캐 땅에 팔려간 왕소군은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며 쓸쓸하게 지내다가 생을 마친다. 당나라에 동백규란 시인이 있어 왕소군의 심정을 시로 읊었는데 거기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구절이 나오는 것이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자연의대완 비시위요신)·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이 아니로구나.
저절로 옷 띠가 느슨해지니/ 이는 허리를 날씬하게 하려고 함이 아니네.”
허리를 굵게 그려 팔려왔지만 고국을 그리워하다 보니 몸이 여위고 허리가 가늘어졌다.
민족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나라를 빼앗긴 이상화의 춘래 불사 춘 이 왕소군의 춘래 불사 춘 보다 더 춥게 느껴진다.
내가 사는 돌섬은 바람의 땅이다. 밤인데도 바람은 잘 생각을 안 하고 우는 사자같이 윙윙거리며 어둠속을 날아다닌다. 바이킹의 나라 스칸디나비아의 차가운 북풍이 도버해협을 지나 대서양의 거센 파도를 타고 한풍(寒風)으로 불어온다. 그래서 돌섬의 봄은 춘래불사춘이다. 나이 70이 되고 보니 나도 춘래불사춘이다. 4월에도 겨울옷이요 여름에도 감기를 앓기 때문이다. 춘래불사춘의 섬 돌섬에서 봄을 맞고 보니 왕소군이나 이상화처럼 처연한 생각이 든다.
감기몸살에 며칠 동안 바닷가 산책을 못했다. 4일 만에 바다가로 나가봤다. 바람은 겨울인데 그새 봄이 와있었다. 덩치 큰 나무들은 바닷바람이 추운지 순이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는데, 나무아래 여기저기에 꽃들이 피어있다. 길옆은 푸른 잔디다. 꽃과 잔디들이 추운바다바람을 피해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하! 돌섬에도 봄이 왔구나! 제 아무리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와도 겨울은 봄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는구나.’ 문득 자연의 이치가 인간세상보다 더 낫다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때가 되면 사라지는 것을 볼 때.
돌섬 양지바른 곳에 피어있는 꽃을 보니 힘이 났다. 비치를 걸어가는데 파도를 타고 윈드서핑을 하는 남자가 보였다. 한참을 더 걸었다. 차가운 바다 물속에서 누군가가 수영을 즐기고 있다. 언 듯 보니 여자다. 가까이 가 보니 놀랍게도 할머니가 차가운 바다 수영을 즐기고 있다.
나는 감탄과 존경을 담아 말을 걸었다. “와! 당신은 슈퍼우먼입니다. 난 아직도 겨울 잠바를 입고 있는데 3월 추운바다에서 수영을 하다니!”
그녀는 곧바로 이렇게 응답했다. “난 러시아에서 이민 온 75살 할머니입니다. 봄이 찾아온 게 반갑고 고마워 봄맞이 수영을 하고 있죠. 봄을 먼저 반겨주는 자에게 꽃이 되고 향기가 되게 마련이니까요”
‘아, 그렇구나!’
난 집으로 돌아와 겨울 잠바를 벗어던져버리고 조각 밭으로 달려갔다. 삽으로 흙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4시간 일을 끝내고나니 흥건하게 땀이 몸에 배었다. 다음날은 근처 숲속으로 가서 썩은 나뭇잎을 운반해왔다. 나뭇잎을 흙에 섞고 밭을 고른 후에 상추 쑥갓 시금치 씨를 뿌렸다.
그리고 미나리강(江)은 옆으로 더 파서 갑절로 늘렸다. 눈 속에서 겨울을 지낸 봄 미나리 맛이 여간 향기로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온 후 밭일이라 운동화가 흙투성이가 됐다. 일을 끝마친 후, 밭 옆에 있는 바다 낚시터로 가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갔다. 아직도 물은 차가웠지만, 겨울 내내 웅크린 내 몸을 깨워주었다.
운동화를 빨고 발을 씻는데 발이 시릴 정도로 차다. 갑자기 누나 생각이 났다. 조약돌이 깔려있는 겨울 냇가에서 빨래하던 어린 시절 누나생각이 나를 고향으로 데려갔다.
4월 1일에는 홈 디퍼에 가서 플라스틱 모판을 사다 실내 모판을 만들었다. 실내 모판에 수박 참외 오이 호박 가지 도마도씨를 뿌렸다. 지난해에 농사지어 배불리 먹고 남긴 씨앗을 모판에 파종한 것이다. 땀 흘리며 파종을 하고 나니 춘래불사춘은 어느 사이 물러가 버렸다.
곁에서 내내 보고 있던 아내가 한 마디 했다. “금년 봄철 농사는 얼떨결에 쉽게 해치웠네요. 썩은 나뭇잎을 긁어오고 실내모판을 만들고 씨앗이나 모종을 사지 않아서 영농자금도 아주 적게 들었어요. 작년에는 300불 들었는데 금년은 모두 44불에 한 해 농사자금이 끝난 샘이죠. 당신 혼자서 일하게 해서 미안해요” 한 달 전 왼쪽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기브스를 하고 있는 아내가 미안해했다.
“아니오. 내가 씨 뿌릴 때 당신이 따라다니며 보고 있기만 해도 나는 힘이 나지요. 우리는 봄에 새롭게 사랑의 씨를 뿌리고 있는 것이니까”
누가 돌섬의 봄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하랴?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면 어린 싹은 돋아 오르고 꽃은 향기로 보답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아파트 문에 ‘立春大吉(입춘대길) 개문萬福來(개문만복래)’라도 써 붙여야겠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 구나“(아가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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