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촌 이계선

“후러싱의 11월은 가을인데도 겨울 날씨입니다. 바닷바람이 사나운 돌섬은 벌써 겨울이겠네요?” 여름에 다녀간 강전도사가 화라커웨이의 겨울을 걱정하는 전화였다. 돌섬은 후러싱에서 30분 운전거리 인데 체온온도는 5도나 낮다. 케네디공항 뒤에 있는 노인아파트는 앞뒤로 바다라서 바람 잘 날이 없다.

가을부터 히팅이 나와 요즘 한증막이다. 창문을 반 뼘쯤 열어놓으면 시원하지만 열려진 창틈으로 대서양의 바닷바람이 강풍으로 쳐들어온다. 이륙하는 비행기처럼 굉음소리요란하게 금방 아파트가 날라 가 버릴 것만 같다. 아내가 고소공포증 환자처럼 짜증이다.

“바람소리가 무서워요. 문을 닫아요.”

창문을 닫으니 점보여객기 일등석처럼 조용하고 아늑해진다. 대신 더워서 팬티와 러닝셔츠만 입어야 한다. 겨울에도 해수욕을 하는 기분이니 얼마나 좋은가?

겨울이 와도 우리는 해변을 걷는다. 추울수록 공기는 깨끗하고 바람이 사나울수록 바다에서 올라오는 오존함량이 풍부하다. 겨울 점퍼로 따듯하게 무장하고 강풍을 뚫고 겨울 해변을 걷노라면 여간 상쾌한 게 아니다. 알몸으로 여름 비치를 활보하는 나체족들은 저리가라다.

돌섬에 겨울이 와도 걱정할게 없다. 단지 농장이 문제다. 아파트사무실에서 준 30평 농장에는 겨울이 오고 있는 데도 여름채소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고향 떠나 60년 만에 지어보는 농사라 실수가 많다. 선배 박 씨의 뒤꿈치를 따라다니며 흉내를 내고 있다. 우리보다 배가 넘는 대농(?)을 하고 있는 박 씨 농장은 아직 가을인데도 겨울농장처럼 허허벌판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모두 걷어드려야 해요. 가을에 비료를 줘봐야 소용없어요. 그리고 달랑 무는 40일 있다가 뽑아먹어야 합니다. 더 오래두면 억세어 못 먹어요. 달랑 무 마저 일찍 뽑아낸 박 씨의 밭에는 배추와 파뿐인데 그나마 비료를 주지 않아서 발육중단이다.

그런데 우리농장은 겨울이 오고 있는데도 늘 푸른 여름농장이다. 거둬들여야 할 가을에 씨를 뿌리고, 다 자란 놈에게 비료를 주기 때문이다. 나의 시행착오.

가을에 심은 파가 줄모를 심은 논처럼 가로세로 가득하다. 아욱은 철이 지났지만 내가 워낙 아욱국을 좋아해서 남겨두고 자꾸만 비료를 주었더니 자꾸 자란다. 김장용 배추와 무는 물론 40일 지난 달랑 무도 뽑지 않고 있다.

일찍 뽑게 된다고 비료를 안준 박 씨네 달랑 무는 잎이 노랗게 늙어버렸다. 뽑을 때 뽑더라도 비료를 줘야지! 박 씨 몰래 자꾸만 비료를 주었더니 우리 달랑 무는 이파리는 파랗게 무는 허옇게 커갔다.

“여보 우리도 달랑 무를 뽑아서 총각김치를 담가 먹자 구요. 박 씨가 그러는데 달랑 무는 오래두면 억세고 질겨서 못 먹는 데요”

아내가 성화를 부려도 나는 꾹 참고 한 뿌리도 못 뽑게 했다. 민망해 보였던지 박 씨네 집에서 달랑 무를 한 다발이나 보내왔다. 무우가 노리끼리하고 억세기만 한 것이 꼭 영양실조 걸린 애들 얼굴이다. 이놈으로 총각김치를 담갔는데 이파리는 고사하고 무 마저 억세어서 당나귀 마른 뼈다귀 씹는 맛이다.

“박 씨네는 40일 만에 뽑았는데도 억세어 못 먹겠어요. 우리 달랑 무 더 오래 두면 더 버리게 되니 어서 뽑자고요.” 아내는 매일 달랑 무를 뽑자고 보챘다. 그래도 나는 20일을 더 버틴 후에 달랑 무밭으로 나갔다.

“와! 이게 웬일이야?”

달랑 무 하나를 달랑 뽑아든 아내가 소리쳤다. 우리 달랑 무는 달랐기 때문이다. 크기가 달랐다. 박 씨네보다 3배나 더 굵었다. 색깔도 달랐다. 잎은 파랗고 무는 허옇게 살쪄있었다. 표주박처럼 일직선으로 내려오다가 여인의 엉덩이처럼 예쁘고 둥글게 퍼져 있었다. 맑은 물에 씻어놓으니 목욕한 미녀의 몸매처럼 여간 보기 좋은 게 아니다.

돌섬의 겨울 농장은 여전히 푸르기만하다. 사랑을 먹고 자라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