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촌 이계선

 “맞아. 연인이 있는 사람들은 둘씩둘씩 짝을 지어, 아니면 사랑하는 가족단위로 가을단풍을 찾아 산으로 올라갔겠지. 가슴이 빨갛게 물들 때까지 만산만야를 붉게 물들인 단풍천국을 헤매면서 행복에 젖어있을 거야. 그 대신 가을바닷가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찾아오겠지.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내고, 홀로된 외로운 사람들이 찾아와서, 지난여름에 모래위에 남기고간 사랑의 발자국을 찾노라 서성거리고 있는 거야. 가을이 왔어도 가을을 떠나지 못하는 짝 잃은 외기러기처럼!”

아내는 내말에 갑자기 슬퍼지는 기색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에게도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삼남매를 둔 부부이건만 갑자기 홀로된 기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모래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래도 슬펐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을 보이기 싫어 아내는 서쪽으로 나는 동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내 앞으로 무수한 발자국들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지나간 발자국들입니다. 모래위의 발자국이라 흩어지고 밟혀져서 누구의 발자국인지 알수 없습니다. 그런 발자국 일수록 추억이 새겨져 있는 발자국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누구의 발자국일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춘풍(春風)과 삼포(三浦)입니다. 춘풍(春風)은 박상서장로의 아호. 삼포(三浦)는 김영효목사입니다.

지난 2월 노인아파트를 찾아 돌섬에 이사 온 후 70여명의 친구들이 다녀갔습니다. 와서는 돌섬의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그때 가장 좋아한 이가 춘풍과 삼포(三浦)입니다. 말기암(末期癌)을 앓고 있었던 춘풍과 춘풍의처(고종순권사)는 어린애처럼 좋아했습니다.

“병이 나으면 이곳으로 이사 와서 이목사님과 매일 바닷가를 걸으면서 지내야지”

그런데 춘풍은 한 달 후 6월 28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춘풍의 장례식에서 우리는 울면서 “향수”를 합창했습니다. 기독문학동우회가 모일 때마다 춘풍은 유당(이성철목사)과 듀엣으로 “향수”와 “사랑의 테마“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며/ 실개천이 휘 돌아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을은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삼포는 4번이나 돌섬에 놀러왔습니다. 고향이 삼천포인 삼포는 돌섬의 푸른 바다가를 제고향 삼천포의 푸른물처럼 아름답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듯 4번씩이나 돌섬을 찾아 바닷가를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난 10월 2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5년 전에 수술한 간이식이 재발한 것입니다. 68세 아직 건강한 나이로.

춘풍과 삼포는 혈육처럼 지낸 우정들입니다. 감신을 졸업한 춘풍은 영어실력이 뛰어난 기업인이었습니다. 철탑산업훈장을 받고 청와대에 초청까지 받았습니다. 겨우 감신을 1년 다닌 나를 동생처럼 아껴줬습니다.

서울 상대를 나와 대기업의 뉴욕지사장을 지낸 삼포도 마찬가지였지요. 부인을 사별한 후 나와 혈육같이 지내는 강남미 전도사와 재혼했습니다. 그 바람에 겨우 한살 위인 나를 장인처럼 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친구처럼 매일 전화를 했습니다. 양키즈게임이 있는 날은 9번도 더했습니다. 우리는 지독한 양키즈 팬이었습니다.

그런데 삼포는 양키즈가 리그챔피언 시리즈에서 텍사스에게 지는 날 그만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68세를 일기로 말입니다. 9회 말이 아직 남았는데 6회 말에 끝나버린 야구게임처럼 말입니다. 가을의 전설(월드시리즈)은 이렇게 끝나버렸구나!

돌섬의 가을 바다는 쓸쓸합니다. 그러나 춘풍과 삼포가 지난 여름 돌섬 모래위에 남기고 간 추억의 발자국은 아름답습니다. 멀고먼 고향시절의 추억처럼 말입니다. 나는 조용히 조병화시인의 “추억”을 읊조려 봅니다.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 바다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가고 가을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아아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 바다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나흘 닷새 엿새

(중략)

돌섬의 가을 바다 이야기는 여기서 접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