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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는 그대를 어떻게 지배하는가? (2)예수의 가르침을 찾아서(불과 평화4)- 악마는 그대안에 있다.
한성영  |  h680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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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8월 01일 (일) 10:59:06
최종편집 : 2010년 08월 01일 (일) 15:07:20 [조회수 : 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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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는 그대를 만족과 불만, 쾌감과 불쾌라는 두 가지 전략을 이용해서 지배하고 있다. 그대가 에고의 전략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에고가 주는 모든 만족으로부터 절망해야 한다. 절망함으로써 그대의 에고는 죽어야 한다. 절망은 에고를 죽음에 이를 수 있게 하는 병이지만 그대안의 그리스도를 발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궁극적 토대이자 처방이기도하다. 에고가 주는 모든 만족과 쾌감과 두려움으로 부터 절망하라!! 삶에 대한 그대의 모든 희망은 에고가 그대를 지배하는 전략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는 "죽고자 하는 자가 진정 살 수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대는 죽어야한다. 그대는 언제 살아있다고 느끼는가? 에고가 그대에게 쾌락과 만족을 줄 때, 두려움과 불쾌감으로 몸살을 앓을 때 그대는 살아 있다고 느낀다. 에고는 그대에게 인생은 살만한 것이라고 이것을 느껴보고 저것을 느껴보라고 이것에 반응하고 저것에 반응해 보라고 속삭인다. 욕망을 부추기며 왜곡된 환상과 삐뚫어진 이미지 속에서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영원히 가려 버리려 한다. 그것이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인간에게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여 지배하려 한다. 깨닫지 못한 인간은 삶은 으레 그런 것이라고 자위하며 그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에고가 쳐 놓은 환상의 장막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며 에고의 꼭두각시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절망은 두려움과 불만족과 다르다. 두려움과 불만족은 에고가 그대를 길들이는 수단이지만 절망은 에고의 모든 기교에 파산선고를 하는 것이다. 철저히 절망하는 순간!! 그 순간이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 앞에 단독자로 서는 순간이다. 그대는 삶의 의욕과 희망마저 다 놓아 버린 벌거벗은 상태로만이 신, 바로 진리앞으로 홀로 나아갈 수 있다.

불교는 누가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무상과 무아를 꿰뚫어 본 자가 깨달은 자라고 말한다. 인생무상을 온 몸과 정신으로 느껴 철저히 절망하는 순간, 그대가 집착하던 모든 상들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바로 그 순간이 그대가 깨달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순간이다. 삶의 비애와 고통을 철저히 느껴 본 자만이 철저히 절망할 수 있고 철저히 절망하는 자만이 철저히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비애와 고통은 예수와 부처를 탄생시키는 위대한 문수보살이요, 보현 보살이다. 삶의 비애와 고통을 모르는 자는 아직 삶의 가장 깊은 지혜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안 된 철부지에 불과하다.

에고의 모든 기교로부터 철저히 절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느 틈에 다시 살아나 더 큰 힘으로 그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귀신에 대한 비유를 기억하는가?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누가복음 11장 24~26절)

더러운 귀신은 무엇인가? 베뢰아아카데미의 김기동이 말하는 그 귀신인가? 아니면 윤석전 목사가말하는 불신지옥의 마귀들인가? 목사들이 마르고 닳도록 그들의 설교에서 우려먹는 사탄과 귀신과 마귀이야기들에 나는 연민마저 느낀다. 어떻게 그토록 무지하고 뻔뻔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4년간 대학을 다니고 3년간 대학원도 다녔고 일부는 기독교의 정신적 본토라 할 수 있는 유럽에서 유학도 했으며 경전의 역사와 고등비평을 배웠던 자들이 아닌가? 구약의 이야기들이 대부분 근동의 신화를 모방한 것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교수들로부터 배웠던 지성인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이 교회 강대상에만 올라서면 마귀와 사탄과 귀신을 피를 토하듯 열렬하게 팔아먹는 이 희극을 머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예수가 말하는 모든 사탄과 마귀와 귀신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모르는 저 우주 어딘가 은밀한 곳에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이곳 지구에 내려와 인간을 유혹하고 괴롭히는 존재인가? 아니면 땅밑 암흑세계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인간에게 공포를 체험시켜주기위해 나타나는 뱀파이어들인가? 아니면 구천을 떠돌다 한을 품고 내려온 처녀귀신들인가? 설사 그런 존재들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악마가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그대에게 몇 가지 공포와 불안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진정한 악마, 그것은 그대 안에 있다. 그것은 그대를 지배하던 에고의 모든 전략들이다.

그대는 관찰해보라! 누가, 무엇이 진정으로 악마인가? 인간이 저지른 수 많은 전쟁들을 보라! 특히 가장 잔인하고 지구촌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인간의 욕심을 보라!, 학살의 선봉에 서 있던 십자가군대들과 종교업자들의 기만을 보라, 백악관에서 아침마다 기도로 그의 업무를 시작했던 충성스런 야훼의 아들 부시는 방위산업체와 다국적 기업의 교활한 장사치들과 공모하여 얼마나 많은 지구촌 형제들을 살해했는가? 인간의 무지는 생명공동체를 얼마나 파괴하고 있으며 우리안에 불신을 키우고 있는가?

토건마피아들과의 뒷거래로 자연생태계마저 유린하려는 이명박정부의 4대강사업을 보라! 군중속의 고독, 인간의 인구는 기하학적으로 급증했지만, 수 많은 친구와 이웃들 사이에서 금융자본주의가 처놓은 무한 경쟁의 사슬에서 처절한 불안과 외로움을 삼키고 있는 것이 현대인간군상들의 실존의 모습이다.

에고는 그대가 그것으로부터 철저히 절망하지 않고 방심한다면 어느 틈엔가 그대의 내면 깊은 곳에서 더 크게 자라나 전보다 더 큰 힘으로 그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말한 더러운 귀신의 비유의 핵심이다. 불가의 수행자들 중에서 되먹지 못한 마구니 중들이 생겨나는 것도 철저하지 못한 수행 때문이다. 그대는 독일의 히틀러, 칠레의 피노체트, 한국의 전두환, 유영철이나 강호순이 악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악마가 아니다. 악마는 바로 그대 안에 있다. 그대는 아니라고 부인하겠지만 그대 안에 히틀러도 있고 피노체트도 있고 전두환도 있고 유영철도 있고 강호순도 있다. 어쩌면 더 무서운 악마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는 다만 그들보다 약간 운이 좋았을 뿐이다. 히틀러나 강온순처럼 때를 만나면 그대안의 악마는 그들보다 더한 짓도 할 것이다. 히틀러와 전두환과 유영철과 강온순의 내면에도 그리스도가, 불성이 살아있다. 그러니 그대는 히틀러와 유영철을 향해 손가락질하기 전에 깨닫지 못한 그대 자신을 먼저 직시해야한다. 이것이 예수가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도 자신의 눈 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말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깨닫지 못한다면 에고는 필요할 때 그대를 막가파나 지존파로도 만들고 전과 15범의 사기꾼이나 청량리 오팔팔 뒷골목의 허접한 기둥서방으로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치즘이 흉물스러운 공포를 조장하며 세계를 가혹하게 유린하고 있을 때 독일 교회들은 왜 침묵을 지켰는가? 일제 강점기 목사들은 어째서 그토록 자신들의 신과 교리들에 배신을 일삼으며 일본 천황의 개노릇을 했는가? 그들이 특별히 비윤리적인 인성을 타고나서인가? 그렇지 않다. 누구라도 같은 상황에서 나는 다르게 행동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들을 비판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있다면 철저하지 못했던 종교적 진정성과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여 올바로 수행하지 못한 무지와 길들여진 인간성의 나약함 때문이어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 바로 그대가 깨닫지 못하고 수행도 하지 않는다면 제도를 백만 번 바꾸고 개혁을 천만 번 하더라도 이 악순환은 영원히 반복되어질 것이다. 21세기 오늘, 탐욕의 역사는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잔악함을 반복하고 있다.

에고가 그대를 지배하는 보상과 처벌의 욕망씨스템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그대의 자아는 영원히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예수가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기 전에는 결단코 나올 수 없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대는 자신이 키워낸 욕망의 카르마를 다 갚아야 그것에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다. 다 갚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대는 이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이 예수가 말한 불과 검과 전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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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람 (210.2.52.131)
2010-08-02 08:07:53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내안의 욕망의 찌꺼기가 악마보다 더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린 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 할 수 없겠지요.
나란 과연 무엇인가? 에고로 무장한 나를 언제 벗어나 참다운 자유를 맛볼 수 있을까? 아니면 영원한 화두를 들고 화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박제된 나일까?
리플달기
9 10
우명 (210.104.12.145)
2010-08-01 11:02:39
편집장님, 윗 쪽 글 3/4이 크기가 줄어들었네요. 아래부분에 맞게 글의 크기를 맞추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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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1
편집국장 (112.187.196.38)
2010-08-01 15: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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