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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0년 7·8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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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6월 25일 (금) 14:27:47
최종편집 : 2010년 06월 25일 (금) 18:57:22 [조회수 : 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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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0년 7·8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85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0년 7·8월호 중 7월 둘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

* 성경 본문: 누가 10:25-37
* 성경 주석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에 주의를 모을 것이다. 확실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수의 가장 낯익은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다양한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클럽에 맞도록 상업화된 유일한 비유이기도 하다. 비유 자체는 많은 설교자들과 교인들에게 잘 다져진 땅이다. 그러나 비유로부터 바깥 세상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앞뒤 맥락을 자세히 살피면서 비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비유에 대한 신선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당기는 "바로 그때"(just then)라는 구절, 즉 뒤돌아서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을 직시하라고 외치는 구절로 시작된다. 이 비유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 10장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10:9b)"고 선언하면서 그의 목회를 확장할 "칠십 인"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리고 바로 뒤이은 절들(10:21-24)에서는 세상의 악한 세력과의 대결 및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의 "그들 자신의 자리를 확보함"(10:20 참조)에 있어서 그들의 성공적인 목회에 관해 "칠십 인"과 열두 제자("제자들", 23-24절)와 함께 예수가 기뻐하는 것을 보도한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예수를 시험하는 질문을 던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고 누가는 이야기한다(25절). 율법교사와 예수가 나눈 대화는 하나님과 "이웃"을 똑같이 사랑해야 하는 인간의 의무에 대한 전통적인 유대교의 강조를 이끌어내는,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도 발견되는 논쟁적인 이야기를 누가복음 기자가 개작한 것처럼 보인다(마태 22;34-40; 마가 12:28-34 참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질문에 대한 응답에서 예수 자신이 그 전통을 인용한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한 질문을 그 질문을 던진 사람에게 되돌림으로써 율법교사로부터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누구의 말을 들어보더라도, 예수와 그의 적대자 둘 모두는 이 전통이 올바른 답을 제공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29a절)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예수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29b절). 그러자 예수도 그 질문에 답하는 배경이 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길게 늘어놓은 후 다시 율법교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율법교사는 자신이 누구에게 사랑의 의무를 지고 있는지 물으며, 이로써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반면, 사랑의 의무가 적용되지 않는 어떤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은근히 암시한다. 만일 "이웃"으로서 식별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이웃"이 아닌 사람들도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예수가 거꾸로 던지는 질문은 그러한 전제를 배척한다.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었는가?"는 질문은, "우리는 사람들을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이 남들을 위한 사랑과 자비의 행동을 함으로써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최소한도 추론상, 전통(26절 참조)에 대한 이런 방식의 해석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27절) 한다는 것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렇다면 비유는 율법교사의 왜곡된 관점을 바꾸는가? 첫째, 우리는 한 사람의 "율법교사"(lawyer)로서의 그의 정체성의 의미를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율법교사라는 단어는 누가복음 안에서의 그것의 뉘앙스와는 정반대의 매우 세속적인 직업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율법교사는 국가나 제국의 법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로 요약되는 바로 그 전통에 있어서도 전문가이다. 율법교사들은 성경 속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적 계시를 "읽고"(read) 그것을 삶에 적용할 책임을 가진 사람들에 속했다. 제사장 및 레위인과 마찬가지로, 율법교사에게는 남들의 영적 삶을 섬기는 일이 맡겨진다. 비유의 중심축이 되는 것은 그들의 유대교적 신분이나 정체성이 아니라 영적 일들에 대한 압도적인 관심이다.

비유 속의 사마리아인은 예수의 문화 속에서 율법교사와는 정반대의 부류의 사람들을 대표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배교자들, 즉 히브리 율법과는 많은 점에서 상이한 그들의 "사마리아 오경"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그것의 적절한 영적 준수를 타락시킨 몹쓸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길을 가던 사마리아인이 그에게 우연히 닥친 상황을 육체적 관점(상처를 싸매 주기)과 실용주의적 관점(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비용을 지불하고 지속적으로 돌보는 것)에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영적인 일들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가?

그렇다면 비유에서 대조되는 것은 "나쁜" 유대교 지도자들과 한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예수는 그를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특징짓지 않음을 주목하라. 비유에서 극적으로 대조되는 것은, "영생"에 관한 그들의 지대한 관심(25절) 때문에 지상에서의 일시적인 삶이 그들에게 가져올 수 있는 의무들에 맹목적이 되고 삶을 전적으로 영적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사람들, 그리고 기본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사랑이 요구되는 자리를 올바로 인식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율법교사와 예수가 벌이는 이 언쟁을 '칠십 인"의 전도 여행의 영적 승리에 관한 흥분된 기쁨 바로 뒤에 위치시킴으로써, 누가복음 기자는 물질적인 동정과 자비가 영적 관심보다 더 중요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올바로 답하려면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장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자, 그녀는 마치 자신이 방금 예수의 비유를 들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다시 말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누가 10:37)는 예수의 말씀대로 행하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이, 그녀는 자기 집을 찾아온 예수를 대접하려고 분주하다. 하지만 그녀는 여동생 마리아가 집안 일은 돌보지 않고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영적 가르침에 귀기울이는 것에 분노한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한" 반면, 마르다는 삶의 세부 사항들에 관한 "많은 일로 염려하며" 마음이 흐트러져 있다는 것이다(10:41-42 참조).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볼 때, 누가 10장에서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자신과 남들의 영적 필요와 물질적 필요 사이에서 하나만을 일방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거짓된 이분법의 포로가 된다는 것이다. 복음은 이웃, 심지어 낯선 이들을 위한 친절한 사랑과 자비의 행동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의 시발점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통치 안에서 살기를 추구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다.       

* 설교 본문

당신은 낯선 이들의 친절을 믿는가?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것을 우리의 소명의 일부로 고려할 것을 촉구한다.

핸드폰을 버스에 두고 내렸던 적이 있는가? 신용카드가 빽빽이 들어 있는 지갑을 택시 안에 두고 내린 적은? 이런 일을 겪어 본 사람들은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을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핸드폰은 일상생활의 필수품이다. 그 안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전화번호와 대인 관계 정보들, 사진들, 약속 날짜들, 문자 메시지들을 생각해 보라. 이 소중한 정보들을 다행히도 컴퓨터에 저장해 놓았다면, 핸드폰을 분실해도 별것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컴퓨터에 백업 파일을 저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핸드폰 분실은 자신의 삶을 지하철 좌석에 두고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특히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행동을 예수의 유명한 비유 속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과 비교해 보면, 여기에서의 교훈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나쁜" 사람들은 남이 분실한 지갑이나 핸드폰을 돌려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미끼로 해서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반면에,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들이면서까지 그것을 원래 주인에게로 돌려주려고 애쓰는 "선한" 사마리아인도 더러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좀더 자세히 읽으면, 이 비유에는 단지 "도움의 윤리" 이상의 보다 깊은 차원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낯선 이들의 친절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과 관련된다.

우리는 낯선 이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당신이 낯선 이들을 인식하는 방법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의 축도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만일 당신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비윤리적이어서 기회가 주어지면 당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믿는다면, 당신 또한 누군가를 더 괴롭힐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진다. 누군가의 지갑이나 핸드폰을 발견해도, 당신은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려는 마음이 별로 들지 않을 것이다. 혹은, 예수의 비유에서처럼 누군가가 두들겨 맞아 피를 흘린 채로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되더라도, 당신은 그 사람을 선뜻 도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낯선 이들을 아웃사이더, 적, 혹은 하찮은 존재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동료 인간, 혹은 예수의 용어를 사용하면 "이웃"으로서 소중히 다루기는커녕 단지 그런 식으로 하찮게 대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의무를 소홀히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는 열쇠는 비유의 시발점이 되었던 질문 바로 그것이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에게 묻는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25절) 이것은 궁극적인 보상에 관한 질문이다. 기원 후 1세기의 유대인에게 "영생"은 장차 도래할 시대의 삶, 즉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궁극적인 계약의 축복을 의미했다. 율법이 정한 계약의 경계들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밖에 있는 사람들, 즉 친구들과 낯선 이들에 관한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당시의 그의 백성들 중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율법교사는 자신을 계약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식했다.

예수는 율법교사에게 되묻는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26절).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한 신명기 6:5의 쉐마(Shema),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짝을 이루는 자기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에 관한 레위기 19:18의 말씀을 인용하여 답한다(27절). 그러자 예수는 "네 대답이 옳다"고 말한다(28절). 율법교사는 정답을 말한 셈이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에게 있어서는 이웃에 대한 정의가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그는 예수에게 일종의 법률적인 의견을 촉구한다.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했다고 누가복음 저자는 말하는데(29a절), 이것은 그가 자신의 "이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의 이웃은 동료 유대인, 즉 유대교의 계약의 경계들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율법교사가 예수에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29b절)라고 물은 것은, "당신은 우리 자신의 백성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맞지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예수의 시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율법교사는 낯선 이들에게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율법교사의 이 질문에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로 답한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 낯익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교사와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이야기의 날카로운 함축들을 놓치기 쉽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광야 길을 내려가다가"(30a절)라는 보도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그는 강도를 만난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30b절). 그들의 동료 유대인들에게 분명한 "이웃"이 되어야 마땅할 제사장과 레위인 둘 모두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31-32절).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돕기를 똑같이 거부한다.

어쩌면 그들은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늘씬 두들겨 맞은 몸에 개입하는 것은 성전에서 일하는 그들을 의식적으로(ritually) 불결하게 만들지 모른다. 그들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연루되기를 원치 않았던 이유를 예수는 정확히 제시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이 율법과 그것에 따른 계약 의식들 및 경계들의 대표자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율법과 희생제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 자신의 백성들 중 하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일에 실패한다.

그러면 누가 그 일을 행하는가? 사마리아인, 즉 이스라엘의 원수인 한 낯선 사람이 그 일을 한다. 기원 후 1세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수사학적 모순 어법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성전을 가지고 있었던 이 혼혈의 사람들은 천민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 가던 길을 멈추고 정성껏 돌본다. 그는 "희생자 자신의 동족"이 희생자를 위해 하려고 하지 않는 바로 그 일을 행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사마리아인의 관점에서 읽고 설교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 자신의 질문을 가지고 율법교사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희생자의 관점을 날카롭게 부각시킨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물론, 놀라운 답변은, 강도를 만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이 그의 이웃이라는 것, 그리고 지리적, 민족적, 종교적으로 유사했던 다른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의 이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25절). 율법교사의 이 질문은 누가 18:18-25의 부자 청년의 질문과 같은 부류이다. 그리고 예수의 대답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너는 하나님의 계약의 백성이 되기 위한 새로운 길을,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초심자들을 위해, 당신은 낯선 자와 아웃사이더를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이웃"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려야 한다. 예수는 버림받은 자들, 그리고 흥미롭게도 본질적으로 강탈에 의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세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림으로써 이웃 개념을 확대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37절)고 부름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남들을 선한 혹은 나쁜 사마리아인들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람 곁에 다가가서 도움을 줄 가치가 있는 사람들로서 간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남들보다 더 가치 있거나 더 훌륭한 존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낯선 이들의 친절에 관한 문제에서,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얻는 경향이 있다. 만일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 혹은 모든 상황에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도움을 베풀 때, 우리가 베푸는 그 친절이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볼 가능성은 더 커진다.

우리가 상호적인 돌봄과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은 우리가 낯선 사람을 사랑하도록 부르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 됨"의 진정한 의미이다.

<가능한 설교 주제들>
*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남을 돕는 윤리
* 선한 이웃이 되는 법
* 공동체 속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
        
* 예화

+ 마음이 따뜻한 사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빛을 발산한다.

그 빛
자신의 인생을 꽃 피우고
타인의 인생마저도 꽃 피운다.

그 향기
최고의 향기는 사람의 향기다.
(김용화·시인)

+ 나를 넘어서

오늘날 우리가 일궈낸 문화가
성공과 권력에 대한 공허하고 환상적인 약속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느 날 우리가 예수의 음성을 듣고
어디든 예수를 따르겠다며
작은 공동체의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고통받고 억압받고 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의해 열리며
꽃 피게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더럽고 못 배우고 의지력이 없고
우리보다 못하다고 경멸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할 것이다.
(고든)

+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민족적 감정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도움을 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여러분도 가서
그렇게 하십시오.
이웃은
아는 사람
마음에 드는 사람
같은 민족, 같은 지방 사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우리의 이웃입니다.
적대 관계에 있는 나라의 사람도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사람도
우리의 이웃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미워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감정적으로는 적대 관계에 있는
쓰러져 죽어가고 있던 유대인을
오로지 그 사람 때문에
선뜻 도와주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과 다른 점만 찾지 말고
닮은 점, 좋은 점을 찾는 데 마음을 쓰십시오.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이고,
반감을 품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더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지나쳐 버리고 싶은 사람에게 다가가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며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십시오.
결코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당신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작자 미상)

+ 사마리아인의 비유

마땅히 신학은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진정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들의 신학은
현재 시급하고 본질적인 문제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긴급함과 진실함의 기준에서 보면,
이웃을 사랑한다고 야단법석을 떨며 돌아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은
참 우스운 꼴밖에 안 된다.
이와 관련해서 카르도넬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평범한 보통사람인 사마리아인과,
힘과 권위를 가진 제사장, 경제학자, 심리학자, 전문가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사랑하며 공감하며 타인과 연대감을 갖는 데
종교도 필요 없고,
하는 일의 분야를 정확히 규정하는 이론도 불필요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때는
사람이 싸우다 다치고 모든 일이 끝난 후다.
여기서 카르도넬은 신학이 마땅히 제기해야 할
현실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싸움이 끝나지 않고 진행 중이라면,
사랑이 어떻게 실행되어야 하는가?"
(알란 부삭, 김인주 역, 『아프리카의 교회와 해방』, 형상사, 36쪽.)     

+ 선의(善意)의 십계명
 
1. 나는 인종과 종교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남자와 여자를 존경할 것이다.
2. 나는 인종적 혹은 종교적 횡포로부터 나의 이웃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보호할 것이다.
3. 나는 한평생 선의와 관용의 정신을 실천할 것이다.
4. 나는 인종적 편견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싸울 것이다.
5. 나는 인종과 인종, 나라와 나라 사이에 불화를 심는 엉터리 선전에 속지 않을 것이다.
6. 나는 유대인 배척주의, 천주교 배척주의, 신교 배척주의를 전파하는 어떤 조직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7. 나는 세계 도처에서 사랑과 화해의 정신을 실천하는 자들과 친교를 나눌 것이다.
8. 나는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을 도울 것이다.
9. 나는 모든 시민의 권리와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10. 나는 단순히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매사에 활기 넘치고 남을 적극적으로 돕는 사람이     될 것이다.
(월터 밴 킬크)

+ 구원은 사람들과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항상 비범하고 특출한 것을 찾기 좋아한다. 그래서 평범한 것, 간단한 것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찾아 깨닫기가 어렵다. 사실 비범한 진리는 언제나 평범한 것 속에 숨어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고 볼 눈을 가진 자는 보라"고 했다.

누군가가 수녀에게 물었다. "우리 모두는 길을 잃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길을 발견하셨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사람들과 접촉함으로써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이웃은 언제나 볼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바로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빈민가에서, 상처 입은 몸에서, 혹은 어린이들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습니다."
(최종수·목사)     

+ 함께 나누는 이웃 사랑 

이웃이란 한 지역에서 서로 돕고 협동하며 함께 사는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오늘날 세계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점차로 온 인류가 하나의 지구촌을 형성하며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운명의 건축가이다. 그러나 이웃 사람은 그 건축을 감독한다"는 G. 에이디의 말처럼 이웃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세계 모든 사람이 이웃 사촌이 되어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개인과 가정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좋은 이웃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좋은 이웃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의 말씀과 같이 내가 먼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마 22:39), 이웃이 하는 일을 간섭하기보다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서로 좋은 이웃이 된다면 도움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J. 하우얼은 "각자의 이웃은 그의 거울"이라고 이웃과의 일체감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서로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좋은 이웃은 서로 믿고 돕기 때문에 어떠한 분쟁과 분열도 있을 수 없고, 서로가 사랑과 봉사로써 기여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지역에서도 인간이 소망하는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조만제,『내일을 여는 사색』)

+ 내가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이유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 중에서도 삐에르 신부는 8년 동안 일곱 번이나 일등을 차지했습니다. 그분은 빈민구호 공동체 <엠마우스>의 창설자입니다. 현재 89살인 신부님의 『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에 그의 경험담이 실려 있습니다.

한 청년 신사가 자살 직전에 신부님을 찾아와서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살하려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가정 문제, 경제적 파탄, 사회적 지위의 하락.... 이 여러 가지 힘든 상황 때문에 지금 죽을 수밖에 없다고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신부님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깊은 동정과 함께 말합니다. "자살할 이유가 충분하군요. 사정이 그렇게 되었으면 도무지 삶을 지탱하기 어렵겠습니다. 자살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왕 죽을 거라면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준 다음에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청년 신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자살을 하려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신부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저야 어차피 죽을 건데, 만일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 동안 신부님을 돕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짓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신부님의 일을 옆에서 돕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이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부님이 나에게 돈을 주었거나 내가 들어가 살 집을 지어 주었다면, 나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부님과 함께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내가 계속해서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 게 참된 행복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들

언젠가 인도의 뱅갈로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한 수녀가 나에게 말했다. "테레사 수녀님,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건들을 공짜로 줌으로써 그들을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고 있어요."

모든 사람이 잠잠했을 때,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 누구도 그들을 하나님 자신처럼 많이 망치지는 않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거저 베푸신 놀라운 선물들을 보세요.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는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여러분 모두 볼 수 있어요. 만일 하나님이 여러분의 좋은 시력에 대해 돈을 요구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값을 지불하지도 않는 산소를 계속 호흡하면서 그 산소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어요. 만일 하나님이 ‘만일 네가 네 시간 동안 일하면, 너는 두 시간 동안 햇빛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들 중에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마더 테레사·수녀)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나는 당신의 거문고에 달린
한 가닥 줄입니다.
당신의 손가락은 언제
나로 하여금 소리나게 하시겠나이까?
나의 노래 또한
하나님, 당신의 교향곡
소리 속에서 울리고 싶습니다.
(페릭스 팀머만스, '서시')

+ 7월의 기도

주님,
7월에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나무는 나무들의 소리를
돌들은 돌들의 소리를
그리고
풀들은 풀들의 소리를

그래서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햇살들이 강물에 쌓여 빛나듯
바람들이 나뭇잎에 이르러 반짝이듯
우리 모두 생명들을 서로가 아끼게 하소서.

주님,
세상에는 작고 작은 목숨에 이르기까지
모두 당신의 손길이 닿고
아아, 은혜가 넘치는 소리 소리들
7월의 하늘을 향해
모든 소리들이 하나로 모이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주님 
(김용해)

+ 아홉 가지 기도

나는 지금
나의 아픔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아픔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나의 절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절망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깊은 허무에 빠져 기도합니다
그러나 허무 옆에 바로 당신이 계심을 알게 하소서

나는 지금
연약한 눈물을 뿌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을 위해 우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죄와 허물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또다시 죄와 허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내 이웃의 평화를 위해서도 늘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모든 영혼을 위해 항상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용서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굳셈과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더욱 바르게 행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도종환·시인)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모두가 잠잔다고 잠잘 수만은 없어서
한밤중에도 눈감고 잠잘 수만은 없어서
촛불처럼 자기를 태워
불 밝히는 사람이 있다.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에도
꺼지지 않는 불빛,
천리 밖을 먼저 보고
이 밤에도 불빛으로 타는 사람이 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아주아주 희미하지만
나도 조금씩은
탈 때가 있다.
(이무일·아동문학가, '작은 불빛 몇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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