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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0년 5·6월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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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4월 28일 (수) 16:16:49
최종편집 : 2010년 04월 28일 (수) 16:42:13 [조회수 :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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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0년 5·6월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84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0년 5·6월호 중 5월 둘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예수의 말을 지킨다는 것 

* 성경 본문: 요한 14:23-29
* 성경 주석

이 간략한 발췌 속의 예수의 말씀은,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는 13:1에서 시작되어 "일어나거라. 여기에서 떠나자"고 말하는 14:31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요한복음의 길게 늘어진 '마지막 만찬 담화'의 일부이다. (유월절 담화는 실제로는 요한 15-17장까지 확장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요한 18:1 참조). 그러나 공관복음과 대조적으로, 요한복음은 예수가 성만찬 의식을 개시한 것에 대한 일체의 명시적인 언급을 생략하고(요한 6:22-59; 특히 52-59절 참조), 그 대신 그 식사에 대한 극소수의 특이하지 않은 암시만 있다(즉, "저녁", "식탁"; 요한 13:2, 4, 12, 28; 21:20 참조).

그것은 강렬한 공포와 고뇌의 시간이었다. 제자들은 마음이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당혹감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많은 질문을 갖고 있었다(요한 13:6-11, 21-29, 36-38; 14:5, 8-9 참조). 온갖 형태의 괴로움을 주는 상황에 직면하여, 즉 자신의 임박한 죽음과 제자들의 근심스러운 영혼을 앞에 두고서, 예수는 그들의 불안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오늘 본문의 머리말은 요한 14:23-29를 해석하는 적합한 틀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 구절은 제자들을 위로하려는 예수의 굳은 신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특정한 경우에, 그는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14:22).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를 떠났다; 요한 13:26-31 참조).

충실하지만 근심이 서린 제자인 이 유다는 예수의 다음의 선언에 응답하여 그 질문을 던졌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14;21). 다시 말해, 유다는 예수가 그들을 버리거나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을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앞서 예수는 자신이 "잠시 동안만"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요한 13:33-14:4 참조), 그들은 그와의 그들의 관계가 변함없이 지속되리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제자들의 점증적인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그리고 그의 임박한 떠남에 관한 모든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기 위해, 예수는 세 가지 약속으로 그들을 격려한다. 첫째, 예수 자신도, 그리고 "내 아버지"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는 약속한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14:23-24a).

요한복음에 친숙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요한복음을 통틀어 반복되는 한 가지 주제, 즉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그의 말을 지키는 것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인식할 것이다(예를 들어, 요한 8:31, 51, 55; 15:7 참조). 예수와의 그들의 관계에 관한 의심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할 때마다, 제자들은 그의 말씀과 그들의 행동 사이의 조화 속에서 위안과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일 그들의 삶이 그가 그들에게 가르쳤던 것을 반영한다면, 그들은 그와 그의 아버지가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심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제자들이 가일층의 확신이 필요하다면, 그들은 자기네가 들은 말씀이 예수 자신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14:24b; 14:10도 아울러 참조)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근심에 사로잡힌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둘째 약속은 그의 첫째 맹세에 기초하면서 그것을 더 확대한다. 그의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 먼저 그는 그들을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이 말을 너희에게 말하였다"(25절)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하여 이미 세심한 경고를 받았기 때문에, 장래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놀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예수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말한 것을 잊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고 해도, 그들은 안달을 떨고 초조해지면 안 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26절; 요한 16:12-15 참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도 그리고 그의 아버지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그들이 알게 될 두 번째의 길은 성령의 약속을 숙고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말한 것을 그들이 상기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께서 능력을 주실 것이고, 이로써 예수와의 그들의 관계가 흔들림 없고 굳건함을 확증해 주실 것이다.

모든 표면상의 상황은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세 번째 약속은 제자들이 그의 평화를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27a절). 그러나 그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가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27b절)고 말할 때, 그는 고통으로부터의 평화가 아니라 고통의 한복판에서의 평화를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c절; 14:1 참조)는 예수의 말씀은, 그들이 그들의 결심을 시험하고 그들의 영혼을 떠볼 만큼 정신적 충격이 큰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진실로, 그들은 예수의 떠남이라는 가장 당혹스러운 사실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휴식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상태에 그들이 머물러 있도록 허락하기보다, 예수는 그들의 마음을 틀림없이 혼란스럽게 했을 그의 이전의 선언들을 그들에게 들이민다(요한 14:1-7 참조). 그는 그의 외견상 모순된 단언들의 의미를 숙고할 것을 그들에게 촉구한다: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온다고 한 내 말을 들었다"(28a절; 요한 13:33; 14:18 참조).

제자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향한 그들의 사랑을 높이 평가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28b절)라고 예수가 말할 때, 그는 그들을 시험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편애를 집어치울 수 있는가? 그들은 예수를 꼭 붙들고 예수와의 그들의 관계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유지하려는 그들의 이기적인 갈망을 포기할 수 있는가(요한 20:17-18 참조)?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기꺼이 굴복할 것인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들이 성취될 수 있도록, 그들은 그 말씀을 굳게 지키고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가?

예수의 약속들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완전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다음과 같이 안심시키는 말을 덧붙인 것은 놀랍지 않다: "지금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29절). 왜냐하면, 예수도 그리고 그의 아버지도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예수가 약속할 때, 그는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한다(요한 17:6-19, 특히 12절 참조):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다만, 멸망의 자식만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12절).

* 설교 본문

예수는 우리에게 사랑할 것을, 그리고 사랑을 "의도할"(mean)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고, 또 남들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오는 것을 행함으로써 입증된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위한 사랑과 서로를 위한 사랑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지킬 것이라고, 즉 그를 충실히 따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거짓된 헌신이 아니라 참된 헌신을 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를 따르도록 우리에게 요청함에 있어서, 예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요한복음 14장을 통틀어, 예수는 "지키는 것", 즉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15, 21절), 그의 "말"을 지키는 것(23, 24절)에 관해 말한다. 그런데 이 "지키는 것"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의 성질을 띤 행동어이다.

이 맥락에서, 예수의 계명과 말은 그가 말하는 것의 총체성을 언급하고 하나님과 그 자신에 관해 드러내는 동의어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어떤 감상에 젖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그의 모범과 하나님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충실히 적용하려고 애쓸 것이다. 한 주석에서 표현한 대로,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의 말을 지키는 것에 관한 예수의 진술은 미래시제로 표현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지켜라"는 식으로 하나의 명령으로 진술되는 것이 아니라,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너는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고 서술적으로 진술된다. 이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것은 그를 위한 우리의 헌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이 배우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당신은 그 사랑을 보여줄 좋은 방법들에 관해 생각할 것이다. 이런 일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취하는 행동들은 우리의 내적 본성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우리의 "구원받지 못한" 내적 본성 혹은 우리가 태어날 때 가지고 온 본성이 아니라, 우리가 거듭나면서 받은 본성. 다시 말해, 행동은 예수의 말을 지키려는 우리의 헌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의 자연스러운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첫째, 예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은 그 말을 자동적으로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원수를 사랑하고, 그리고 우리를 악의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남들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우리가 압력 아래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우리가 집안 식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차분히 조사할 필요가 종종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의 모범과 가르침을 우리 행동의 잣대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이따금 우리는 우리의 자동적인 반응만으로는 불충분함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거듭난 본성은 우리가 기준에 미치지 못했음에 유념하게 하며, 그리고 우리의 행동방식을 우리가 예수에 관해 알고 있는 것과 조화되게 열심히 노력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은 그것을 자동적으로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깊이 숙고하여 우리의 행동을 예수의 말과 긴밀히 연관짓고 조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예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에게 편리한 것만 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그것은, 남들을 위해 우리 자신의 고집스런 자아를 억제하면서 불편한 것을 행함을 종종 의미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것, 왼뺨을 치는 자에게 오른뺨마저 대주는 것,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관해 말했던 한 비범한 스승의 제자들이다. 이것들 중 어느 것도 편리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의 말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했던 예수의 말씀들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에게 편리한 것뿐만 아니라 종종 불편한 것까지도 행함을 의미한다.

배우자들 사이의 사랑과는 달리, 예수를 위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를 위한 그의 사랑은 관계 속에 있는 파트너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보다 광범위한 접촉 범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수의 말을 지키는 것은 그가 그 자신을 세상 속으로 확대하는 길이다. 사람들이 예수와 관계를 가지게 될 방식은, 그가 물리적으로 그들과 현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인 우리가 그들과 현재하고 그의 말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이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도와주었더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감사했던 경험을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다. 그런 경험은 우리의 마음속에 뿌듯한 보람과 따뜻한 빛을 남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속에 품고 누군가에게 다정히 손을 뻗어도, 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루스 모리스(1933-2001)는 죽을 때까지 감옥 폐지, 인종차별 폐지, 평화, 그리고 가난에 반대하는 노력에 있어 세계의 지도적인 옹호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녀가 그러한 대의명분에 가담하고 또 그것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협력하도록 감동을 받은 것은 그녀의 헌신적인 신앙 때문이었다. 그녀는 <Canadian Friends Service Committee>에서 봉사활동을 한 퀘이커 교도였다. 모리스에 따르면, 절박한 필요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을 때 명심해야 할 첫째 교훈은 이것이다: "그들이 달라지기를 기대하고 있다면, 당신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사랑과 화해의 제스처에 호의적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반사회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판명된 한 전과자, 즉 "모리스와 그녀가 속한 단체가 기대했던 사랑, 혹은 그 어떤 형태의 성장이나 성숙을 가지고 반응할 능력이 전혀 결여된"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약물 중독과 알코올 중독을 동시에 가진 두 명의 다른 남자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모리스와 그녀의 단체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사랑으로 그들과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녀는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이따금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거역하고 자신들의 삶의 패턴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큰 친밀함과 나눔의 몇 년을 보낸 후에도, 둘 모두 이제 여러 달 동안 우리와의 접촉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지금까지 헛된 일에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고 생각했다고 결론지으면 안 된다고 모리스는 말한다. 왜냐하면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인 영적 욕구를 성취하고 있으며,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리고 작은 반응의 광선들이 실패의 커튼 사이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모리스는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린 소외된 이들,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마음이 완고하고 무감각해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리는 기독교적 사랑 안에서 남들에게 손을 뻗으려는 우리의 노력이 기대에 어긋난 결과를 낳는 것을 볼지도 모른다. 예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이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에 만족감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거듭난 내적 본성에 따라 행동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사랑이 남들을 변화시키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최소한도 우리 자신을 변화시킨다.

모리스의 둘째 교훈,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남들을 사랑하는 것의 가장 큰 효과는 바로 당신 자신에게 미친다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이 효과는 영혼의 차원까지 미친다.

모리스는 말한다: "영혼이 가장 놀랍게 자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모험 안에서의 자아의 완전한 망각 속에서일 뿐이다." 그런 순간에, "당신이 당신 자신 안에서 인식하는 모든 것은, 만족감은 당신이 하나님이 간절히 의도하셨던 것을 당신이 행하고 있을 때 온다는 것이다." 그 만족감은 총체적이지 않고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인 내적 기쁨과의 조화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그녀는 인정한다.

더 나아가, 모리스는 말한다: "우리가 예수의 말을 지키는 일에 활동적으로 종사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 성장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따금 어떤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그리고 지금 우리는 예전의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놀라움 속에' 주목하게 한다."

그러한 종류의 변화들은 표면적인 사랑, 즉 예수의 말씀을 실제로 지키고 있지 않은 사랑을 가지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 내면의 본성, 즉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본성이 자연스럽게 오는 것을 행하도록 허락할 때에만 가능하다.

<가능한 설교 주제들>
* 예수와 남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거듭난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 성령을 "보혜사"(26절) 혹은 "변호해 주시는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27절)는 예수의 말은 하나님의 평화가 얼마나 '평화로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 예화

+ 배터리

태어날 때 받은
배터리가 뭔 줄 알아?
엄마, 아빠야.

엄마 아빠 배터리 덕에
우유도 먹고,
놀이동산도 가고,
학교도 갈 수 있었는데

요즘
엄마 배터리가
하루도 못 가고 힘들어 해.

휴대폰 배터리처럼
라디오 배터리처럼
오래 쓰면 닳아버리는 그런 배터리처럼

엄마 아빠 배터리도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겠지?

언젠가
내가 큰 어른일 때
다 닳아 없어지면 그 땐 정말 어쩌지?
(조하연·아동문학가)
 
+ 어머님의 눈 

밤중에 잠이 깨니
어머님이 내 몸에
이불을 끌어 덮어 주신다.

캄캄한 데서도
웃으며 반짝이는
어머님의 눈이

인제도 나를
세 살 먹은 애로
보시는 것 같다.

어둔 밤의 어머니 눈
아아 그 눈을
나는 못 잊는다.
(김남주·시인, <신소년> 1926년 5월호)

+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창조력을 지닌 이는 곧 어머니입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우주의 생명력을 사랑으로 빚어 탄생시킵니다.
이런 창조의 능력을 지닌 어머니이므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도
어머니들의 차지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어머니이지요.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면 집에 훈기가 없습니다.
집은 아버지가 가꾸지만 집안은 어머니가 다스립니다.
어머니는 당초부터 어머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됩니다.

한 사람의 어진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에 견줄 만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분들도
그 원천을 따져보면
어머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절과 덕성을 길러 주고,
작은 일에서부터 책임감을 심어 주는 일이 긴요합니다.
작은 풀꽃의 아름다움에 눈길이 가도록,
그래서 자연의 신비에 마음이 열리도록
이끄는 것도 어머니들의 할 일입니다.
문제는 어떤 상황 아래서건
한 인간으로서, 대지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영혼과 함께 성숙해지는 일입니다.
어머니들, 감사합니다.
(법정·스님)

+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작은 발을 쥐고 발톱을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하기가 가뭄 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세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이승하·시인)

+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시인)

+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 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모르고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 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손택수·시인)

+ 어버이날에 띄우는 카네이션 편지

내 안에서 늘 기도로 사시는
큰 사랑의 당신 앞에서는
나이를 먹어도 철부지 아이처럼
나는 언제나 키 작은 풀꽃입니다

당신의 손길이 실바람처럼 불어와
꽃송이 쓰다듬으며 머무시는 동안
당신께 다하지 못한 아쉬움의 눈물
여린 꽃잎 사이로 뜨겁게 흘러내립니다

나의 삶에 꽃씨를 뿌리고
당신은 흙이 되셨지요
나의 가슴에 별을 심고
당신은 어둠이 되셨지요

내가 파도로 뒤척일 때
고요한 바다가 되어 주시는 아버지
내가 바람으로 불때
아늑한 숲이 되어 주시는 어머니

오늘은 어버이날
한 송이 카네이션의 의미를
그 붉은 꽃 빛의 의미를
정녕 가늠할 수 있을까요

다하지 못한 이 불효를 용서하세요
세월에 주름진 당신의 가슴으로
은혜의 꽃 한 송이
빨간 카네이션 편지를 띄웁니다
(이채·시인)

+ 부모

부모들이 우리의 어린 시절을 꾸며 주셨으니
우리는 그들의 말년을 아름답게 꾸며 드려야 한다.
(생 텍쥐페리·프랑스 작가)

+ 신앙인의 화장품

나이보다 굉장히 젊어 보이는 퀘이커 교도 할머니가 있었다. 어떤 화장품을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입술을 위해 저는 진실을 사용합니다. 목소리를 위해서는 기도를, 눈을 위해서는 연민을, 손을 위해서는 자선을, 용모를 위해서는 욕심 없는 깨끗한 마음을, 그리고 마음을 위해서는 사랑을 사용한답니다."

+ 처음 만난 사람처럼

오랜 세월 공동생활을 했던 목사가 이탈리아의 한 공동체를 방문했다.

4백여 명이 공동생활을 하는 곳인데, 서로를 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매일 아침과 저녁 따뜻하고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공동생활의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던 그는 질문했다. "어떻게 이런 신선한 사랑을 매일 나눌 수 있습니까? 서로 지겹지 않습니까?"

그들은 대답했다. "저희들은 매일 아침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 사랑의 임무

세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화려한 모임에 초라한 모습의 마더 테레사 수녀도 끼여 있었다.

한 정치인이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펼치는 수녀의 활동을 언급한 후 물었다. "당신이 하는 일이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별다른 성공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가끔 좌절하거나 실망한 적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수녀는 대답했다. "결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실망하거나 좌절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성공의 임무가 아니라 사랑의 임무를 주셨으니까요."

자신이 하는 일의 성과에 회의를 느껴 좌절할 때가 있다면, 하나님이 성공의 임무를 주신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사랑의 임무를 잊고 성공의 임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사랑의 법

미국의 뉴욕에 가면 라과디아(La Guardia) 공항이 있다. 주로 국내선이 이용하는 공항이다. 라과디아는 본래 1933-1945년까지 12년 동안 뉴욕 시장을 세 차례 역임했던 훌륭하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작은 꽃"(Little Flower)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늘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했기 때문이다.

이분이 뉴욕 시장으로 재직하기 전에 그곳에서 판사로 일할 때였다. 하루는 라과디아가 법정에 앉아 있는데 경찰관이 한 노인을 끌고 왔다. 죄목은 상점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이었다. 그는 노인에게 물었다.

"전에도 훔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처음 훔쳤습니다."
"왜 훔쳤습니까?"
"예, 배는 너무 고픈데 돈이 다 떨어져서 배고픔을 면하려고 어쩔 수 없이 빵 한 덩어리를 훔쳤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노인의 사정을 다 듣고 난 뒤에 판결을 내렸다. "할아버지, 사정이 아무리 딱하다고 해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법대로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이어서 라과디아 판사는 법정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해 말했다. "이 노인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이 노인만의 책임은 아닐 것입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도 각각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얼른 지갑에서 10달러 지폐를 꺼내 모자 속에 넣었다. 그리고 그 모자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돌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거두어진 돈이 모두 57달러 50센트였다. 라과디아 판사는 그 돈을 노인에게 주도록 했다. 노인은 그 돈을 받아 그 가운데 10달러를 벌금으로 냈다. 그리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쥔 채로 감격의 눈물을 글썽이며 법정을 떠났다.

+ 천국이냐, 지옥이냐? 

어느 묘지에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아! 기억하라. 당신들이 지금 존재하듯 나도 그러했노라. 그러니 이제 내가 죽어 있듯이 당신들도 죽어야 할 것이다. 나를 따를 준비를 스스로 하여라." 예리한 식별력을 가진 방문자가 이 비문을 읽고 다음과 같은 문구를 덧붙였다: "당신이 어떤 길로 갔는지 모르는 한, 나는 당신의 뒤를 따를 의사가 없노라."  

우리의 목적은 "어디로 가고 싶으냐?"에 달려 있다. 영원한 목적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법 여하에 달려 있다. 1855년 뉴저지주에서 세상을 떠난 프랑스 태생의 퀘이커 교도인 스테픈 그렐레트는 단순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나는 이 세상을 오직 한 번만 지나갈 뿐입니다. 내가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선행이 있다면,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친절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행하게 하소서. 나는 이 길을 다시는 지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진실한 외침인가? 영원을 준비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시험기간'이 너무 짧기 때문에 낭비하거나 악용해서는 안 된다. 기회는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상길 편저, 『작고 깊은 말씀 예화』) 

+ 성경을 가까이 하라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이며 시인이었던 윌터 스코트는 임종을 앞두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사위에게 책을 읽어줄 것을 부탁했다.

사위가 물었다. "무슨 책이죠?" 스코트는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진실로 위대한 책은 성경밖에 없지 않느냐? 요한복음 14장을 읽어다오."

사위가 성경을 읽어주자 스코트는 얼굴 가득 평화로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성경 말씀이야말로 큰 위안이며 소망이다. 성경은 하늘에서 보낸 한 통의 편지와 같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늘 성경을 가까이 하여라."

+ 어느 심장병 환자의 고백

수술 받기 전날 간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쥐고 상냥하게 말했다:

"내일 수술을 받으시는 동안 당신 몸에서 심장이 분리되고 오직 기계의 도움으로 생명이 유지될 것입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심장은 새롭게 연결되어 정상 기능을 발휘합니다. 그 다음 당신은 회복실로 옮겨질 것이고, 그곳에서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의식이 깨어납니다. 의식이 깨어난 후에도 여섯 시간 동안은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심지어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나는 당신 곁에서 지금처럼 당신의 손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닥칠지 모를 모든 위험을 일일이 점검하고 기록하면서 필요한 조치를 완벽하게 취할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내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낄 것입니다."

다음날 내 운명을 결정할 수술이 시작되었다. 담당 간호사가 말한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그때 나는 내 손을 붙들고 나와 함께하고 있는 간호사의 손길을 확인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과 위로, 그리고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순간에 그녀가 내 손을 붙들고 나의 모든 문제를 하나하나 처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와 함께하는 그 순간이 내게 얼마나 가치 있고 포근한 것이었는지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날 때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성령은 희랍어 원문으로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뜻은 ‘우리 옆에 와 계시는 분’이다. 또한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고 바로 내 곁에 오셔서 내 손을 꼭 붙잡고 나와 늘 함께하시는 분이다.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새들은 하느님 것이다
아무리 떠들어도 말릴 수 없고
아무리 쏘다녀도 말릴 수 없으니.

그렇고 말고, 새들은 하느님 것이다
하늘을 휘저어 다니고
구름 속을 마음대로 들락거리니.

분명, 새들은 하느님 것이다
깨어나며 고운 알껍질은 땅에 바치고
작은 날개와 부리
때묻지 않은 노래는 하늘에 바치니.

하느님은 행복하다.
(박두순·아동문학가, '행복한 하느님')

+ 나무의 기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나누고 사랑할 수 있는 가슴과
배려하는 인격이 있기 때문이지만

인간의 사랑은 제한된 사랑이며
어머니의 가슴처럼 영원하지 않습니다

향기를 심어준 꽃보다
이름을 남긴 사람보다
아름다운 것이 나무입니다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에 일생을 헌신한 나무에서

행복도 슬픔도 훌훌 내려놓고
강인한 가슴으로 역경의 세월을 보듬은,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고난을 이긴 어머니의 침묵을 배웁니다

봄이 오면
나무의 가슴에 귀를 대고 듣겠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가지마다 움트는 새 생명을 위해

忍苦(인고)의 젖줄을 끌어올리는,
밤과 낮을 잊은 참사랑의 기도를,

겨울 나무를 닮은
청빈한 귀로 듣겠습니다
(김유화·시인)

+ 오 나의 하나님

오 나의 하나님!

당신은 그토록 크신데
아무도 당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당신은 그토록 큰 소리로 부르시는데
아무도 듣지 못하고,

당신은 그토록 가까이 계신데
아무도 느끼지 못하고,

당신은 모두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는데
아무도 당신의 이름을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당신을 멀리하면서
당신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당신께 등을 돌리고는
당신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귀를 막고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한스 뎅크)

+ 우리들의 기도

아빠의 어머니는
날마다 날마다
하느님께 기도하지요
우리들이 바위처럼 살 수 있도록

엄마의 어머니는
날마다 날마다
부처님께 기도하지요
우리들이 꽃처럼 살 수 있도록

우리들은
일주일마다
할머니 댁에 가지요
할머니는
그게 바로
우리들의 기도래요.
(서금복·아동문학가)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싹틔우고, 꽃피우고
열매 맺고, 떠나보내고

땀 흘려 보살피고
몸과 맘 나눠주고
허리 굽은 어머니
어머니처럼

늘 엎드려 디딤돌 되어 준다
아무 말 않는다.
(최향·아동문학가,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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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복 (220.93.33.165)
2010-04-29 18: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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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빛 (124.137.70.237)
2010-04-28 18: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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