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4일 주일

     뿔로의 예수왕국

     오후 1시가 되니 뜨거운 더위를 헤치고 어린이들이 임시 예배당으로 꾸민 연립주택 마당에 모여들기 시작한다. 제일 어린 아이는 4살이고 제일 큰 어린이는 15살이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점심은 먹었느냐고 물어보니 한결같이 먹고 온 아이가 없단다. 안 물어본 만 못하다. 예수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전하였다. 너무 어려운 말인 것 같아 다시 ‘예수는 빵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시무룩하게 앉아 있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치며 좋아한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빵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체면도 권위도 땅에 떨어지고 만다. 예수의 복음을 거창한 철학적인 말로 전할 필요가 없다. 예수는 우리에게 빵으로 오신 거다. 어제 바타안에서 오는 길에 대원들이 어린이들을 주려고 사온 옥수수를 센터의 자매들이 정성껏 삶아 가지고 나왔다. 하나씩 나누어 주니 반만 먹고 가슴에 숨겨두는 아이가 있다. 알고 보니 집에 있는 동생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예배 후 아이들의 거주지역인 빈민촌 뿔로(pulo) 마을을 방문 하였다. 마을 어귀에 요즈음 선교센터에 와서 살고 있는 메리제인의 아버지가 서너 살 된 두 아이를 안고 길목에 앉아 있다. 일터에 나간 부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점심도 먹지 못하고 앉아 있다가 우리를 보고 힘없이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아마 일 나간 부인이 오면 주리고 허기진 배를 좀 채울 수 있을까 해서인가보다. 라스피나스의 K선교사 말에 의하면 59세인 메리 제인의 아버지는 어느 날 다 쓰러져 가는 막사 부엌에서 맹물을 끓이고 있었다고. 그날은 딸의 생일이었고 딸을 위해 무언가 해 주어야 되는 데 해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그저 맹물만 끓이고 있었다고. 그 모습을 보고 K선교사가 그 날부터 메리제인을 센터로 데리고 와 밥을 먹이고 학교에 보내 주고 있다. 메리 제인은 뼈저리게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가난은 그 아이를 지혜로운 아이로 성장시켰다. 하여 그 아이는 센터에 오는 날부터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센터 식구들의 시중도 잘 들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많은 칭찬도 받는다고.

     거지 소굴이나 다름없는 뿔로 마을에 들어서니 쓰러질 듯 한 판잣집들 사이의 좁은 골목길에서 술주정뱅이가 대낮부터 취한 모습으로 횡설수설하며 우리의 앞길을 막는다. 그가 서 있는 뒤편엔 비좁은 틈에서 아이들이 남루하게 찢어진 옷을 몸에 걸치고 조그마한 당구대 같은 것 위에 장기 알 같은 동그란 원판 모양의 물체를 올려놓고 당구 치듯이 그것을 치며 노름을 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실제로 돈을 걸고 노름하는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일이다. 화장실 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들 사이로 흐르는 시궁창에는 대소변 냄새와 쓰레기 썩는 악취가 합쳐져 이상야릇한 고약한 독소가 코를 찌른다. 그런 역겨운 냄새를 맡으면서도 그 곳에서 살아야 하는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 어린이들의 얼굴빛에는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나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항상 맑고 순수하구나. 비록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흉내를 내어 골목골목 마다 짝을 지어 놀음을 할지언정 그들의 눈빛은 생기가 있다.

     성인 남자들은 대낮임에도 크게 할 일이 없어 여기저기서 술판을 벌인다.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고, 흐느적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잡담을 하다가 우리가 쳐다보면 부끄러운지 술을 몸 뒤로 감추기도 한다. 아무리 천하게 살아도 인간에겐 양심과 자존심이란 것이 있어 수치스러운 점을 남에게 들키고 십지 않은가보다. 조금 지나가니 여자들이 마작 같은 것을 땅바닥에 넓게 펴 놓고 십여 명은 되는 사람들이 밭일을 하듯이 앉아 열심히 노름을 하고 있다. 가난한 자기네끼리 노름을 하여 돈을 딴 들 얼마나 따겠으며 그 돈이 그 돈인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 건가! 서로 눈을 부라리며 친구의 돈을 탐하지 말고 그냥 차라리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서로 사이좋게 나누며 살면 어떨까하는 마음이 든다. 조금 지나가니 트럼프를 하며 노름하는 젊은 여자들도 있다. 처음엔 오락으로 하는 줄 알았더니 실제로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를 꺼내 주고받는 모습이 보인다. 시궁창 물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 담배를 입에 물고 노름하는 젊은 여자들, 술 먹느라 횡설수설하는 남자들---, 이런 팀들이 한두 곳이 아니고 마을 구석구석 여기 저기 가는 곳곳마다이다. 조그만 마을에 왜 그리 사람들은 많은지! 온 마을 전체가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자기들끼리 노름을 하던가 아니면 술을 먹으며 몽롱한 상태이다. 간 혹 집에서 힘없이 집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와 몇 몇 아기 돌보는 여자들 외에는 남녀노소 거의모두가 노름 아니면 술이다. 이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난민공동체라기보다는 말로만 듣던 카지노 도박장 같은 느낌이 든다. 카지노는 호화로운 설비와 멋진 분위기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으므로 초라한 이곳과 비교가 안 되겠지만, 노름을 하고 술로 흥청거리는 모습들은 같은 내용이 아닐까! 그러나 주린 배를 조금이나마 잊어 보겠다고 쌈짓돈으로 재미로 노름하는 이들과, 더 많은 돈을 단번에 끌어 모아 보겠다고 카지노를 애용하는 분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KBS 뉴스에서 필리핀 마닐라에 한글간판을 붙인 카지노가 있다는 보도를 하였다. 원정도박을 하기 위하여 그만큼 많은 한국인들이 마닐라를 방문한다는 의미이다. 처음엔 부유층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다가 요즈음은 일반관광객도 많이 다녀가고 심지어 유학생들까지 드나든다고. 빈민촌 뿔로 사람들의 의식이나 돈 많고 잘 배웠다는 한국인 카지노 출입자 들이나 물질 앞에선 의식수준이 다를 바 없다. 교육과 재물이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사람 되는 것도 아니다. 베드로는 충성을 다하여 예수를 따라 다녔지만 결국 십자가 처형을 앞둔 나약한 예수를 보고 배반하지 않았던가! 가롯 유다는 열심히 예수를 따라 다녔지만 결국엔 은 30냥에 예수를 팔아먹지 않았던가!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다.  

     안내하는 선교사에 의하면, 뿔로 마을엔 마약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얼마 전에는 마약하는 사람들과 경찰이 총격전을 벌여 세 명이나 이곳에서 사살 당하기도 하였다고. 그리고 이들은 특별한 직업이 없으므로 도둑질을 일삼기도 한다고. 술이나 마약을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너무 배가 고픈 것을 잊으려는 마음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마을 뒷골목으로 들어가서 다니다 보니 앞쪽으로 나오게 되었다. 입구에 마을 이름을 알리는 아치형 표지판이 있는데 그곳에 뜻밖의 글이 쓰여 있다. “Christ the king subdivision(예수왕국마을)”이라는 표지판이다. 이 표지판을 바라보자 상당한 의미와 상징성이 내 마음에 다가온다. 마을 표지판은 정부기관에서 세웠을 것이다. 뿔로마을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그런 아치를 세울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당국에서는 어떤 의미로 그런 이름을 이 마을에 붙였을까! 너무 불쌍한 사람들이라 예수님이 특별히 좀 돌보아 주셔야 되는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일까? 아니면 정부로서는 통제 불가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통제해야만 되는 곳이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예수님이 특별히 관심 갖고 불쌍히 여기는 곳이라는 뜻일까? 어찌하였든 오랜 기간 동안 천주교 신앙이 몸에 배인 종교 문화적 발상으로 생겨난 이름으로 추측된다.  

     사실 예수 당시 사회상황을 보면 예수께서는 이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다. 당시 성전중심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나라를 식민지화한 로마정부의 관료들이 멸시하고 천시하였던 무리들을 예수께서는 특별한 관심을 갖고 만나러 다니셨다. 그러자 그런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거하시는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들이 예수를 중상모략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마침내 예수가 천민들을 꼬여 로마행정부에 대항하는 반정부 운동을 한다는 죄명을 씌워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예수를 처형하도록 모략을 꾸민 장본인은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이었다.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고 예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예수를 죽이는 성전무리들의 반열에 서게 된다. 교회라는 거대한 조직과 회중을 치리하기 위한 막강한 교리와 규범은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던가, 아니면 자기가 속한 공동체만을 위해 사는 모습들은 모두 예수를 죽인 성전무리들의 반열에 서게 되는 것이다. 사랑엔 너절한 말이 필요 없다. 예수처럼 사랑하길 원한다면, 비록 크게 갖은 것이 없더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예수처럼 고난의 삶의 현장에 나가야 한다.

     뿔로 마을뿐만 아니라 필리핀 전역에 가난과 질병으로 허덕이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 천주교 국가라는 나라에서 이렇게 불쌍한 이들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정부의 잘 못 보다도 천주교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의 책임이 크다. 진정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엇보다 이렇게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면서 상처받고 헐벗고 굶주리며 사는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교리적 입장에서 천주교회를 공략하려고 전시체제를 갖추고 덤벼드는 일부 개신교회도 마찬가지다. 개신교회나 선교사들은 교리적 논쟁을 앞세워 천주교회를 물리치고 개신교회를 세우려 하지 말고,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먼저 이런 불쌍한 이들을 위해 희생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믿고 고백할 진대 우리 모두는 함께 잘살기 위한 인류평화주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아시아 여러 나라의 오지를 돌며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무수히 많이 보아왔다. 갑자기 바다가 뒤집혀 밀려오는 파도로 가족과 고향을 잃고 멀리 외딴곳에 가서 무리지어 사는 스리랑카 쓰나미 난민들, 흙으로 집을 짓고 땅만 파먹고 사는 인도북부 마니푸어 산골자기의 원주민들, 하루 두 끼만 먹는 것도 전혀 양념도 없이 풀을 끓여 먹고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 가는 미얀마 북부 갈레뮤 시골 사람들, 필리핀 피나투보 산 계곡에서 옷도 안 입고 산열매만 따먹고 사는 아이따 부족민들, 그리고 금번 민도로 섬에서 마났던 망얀부족들 등 등.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무수히 만났지만 오늘 만난 예수왕국마을 사람들처럼 쓰레기 더미위에 원두막과 같은 허름한 막사를 지어 놓고 술과 마약과 도박으로 하루 일과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처음이다. 어른들의 모습을 닮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들조차도 머리를 맞대고 입에 담배를 물고 노름에 정신이 없으니! 어차피 가망 없는 인생 될 대로 되라는 심산인가! 골목골목마다 눈에 초점을 잃은 술 취한 사람들이 우리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노름을 하던가 술을 먹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이들은 가난할지언정 욕심장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가난한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위험하고 나쁜 사람들로 소개하였지만,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선하였으며 비록 가난할지언정 간악한 모습은 더욱 보이지 않았다! 노름이 끝나면 다시 정답게 둘러 앉아 식사도 함께할 한 마을 사람들인 그들은 사실 돈에 크게 집착하기 보단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놀이로 하는 것으로 보였다.  

     예수운동은 생명운동이다. 영원을 구원한다고 호화스러운 성전에서 사치스러운 말잔치만 하지 말고 예수처럼 고난의 삶의 현장을 찾아가 피흘림이 있어야겠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낮아짐을 배우는 일이요,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 아닌가. 천대받는 무리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 그 천하고 낮은 사회적 소외당한 자들과 함께 있는, 그러면서도 그 낮은 민중들과 함께 혁명을 해나가는 정신적인 왕국, 이 불굴의 해방정신, 영원히 사는 정신이 크리스천이 아닌가. 그러한 예수가 다시 부활하여 이 마을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바램에서 마을 이름을 ‘예수왕국’이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료제공 : 아시아미션(http://www.amccm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