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피플

     2010년 1월 14일 목요일

     필리핀 루손섬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바탕가스 항구. 7천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사람들을 태워 나르기 위하여 각처로 떠나갈 채비를 차리고 여객선들이 대기하며 떠 있다. 여객선 옆 바닷물에 혹시나 하고 기다렸던 그들이 탄 조그만 보트가 나타나며 어렴풋이 지난 5년 전의 생각이 뇌리를 스쳐간다. 그 때 그들은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청년이 한 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청년이래야 워낙 작은 체구라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간 모습을 멀리서 보면 어린아이인지 청년인지 잘 분간하기 어렵다. 그 때 있었던 아이들은 모두 안보이고 한 가정만이 보트를 타고 부인과 어린자녀 세 명 그리고 친구인지 아버지인지 보트 중심(키)을 잡아 주는 남자 한명 이렇게 모두 여섯 명이 보트에 타고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아무생각 없이 갑판위에서 멀리 지나가는 여객선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들이 도착한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한 승객이 동전을 던져주었고 그 순간 그가 물속에 ‘풍덩’ 소리를 내며 다이빙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가 온 것을 알았다. 지난 5년 전, 그 때는 어린아이들이 바글바글 매달려 여객선 갑판위에서 동전 한 닢을 던져 주면 서로 주우려고 한꺼번에 다이빙하여 그 중에 제일 빠른 녀석이나 하나 겨우 주울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아이들은 아무도 안보이고 가정을 꾸린 가장이 가족과 함께 작업(?)하러 나왔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으나 그 때 동전을 구걸하던 아이들은 다 자랐을 터이고 그리고 당국에서도 그들의 구걸행각이 위험하여 금지하고 허가 낸 사람만 하게 하는가 보다.

     오늘 여객선 손님들의 자선을 기다리는 보트피플 가족은 제법 세련되었다. 비록 손님들이 물에 던져주는 동전 한 닢을 줍기 위해 갖은 힘을 다해 다이빙하여 그 동전이 바다 밑에까지 가라앉기 전에 주워야 하는 민첩함이 필요하지만, 그런 작업을 하는 보트피플 사나이의 모습은 전혀 비굴하지 않고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한 번 물속에 담금질 하고 나올 때 마다 숨을 몰아쉬며 얼굴의 물기를 닦고 잠시 쉬는 순간에도 배 위에서 내려다보는 많은 손님들이 언제 어느 방향에서 동전을 던질지 몰라 한시라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의 옆에는 5년 전처럼 동전 한 닢을 위해 물속에 함께 뛰어들 아무 경쟁자도 없고, 오직 그를 격려하고 응원할 가족들이 배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모든 게 여유 있다. 세 아이 중 막내 아이가 쪽 배에 앉아서 손님이 던져 준 귤을 까 먹는다. 그 모습을 아기 엄마가 흡족한 모습으로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남편이 한 번 물속에 다이빙하고 나올 때 마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좋아한다. 남편이 주워온 동전 한 닢을 부인의 양철통 안에 뗑그렁하고 던져주니 부인은 만족한 모습으로 좋아한다. 가끔 빨리 배를 저어야 할 경우에는 뒤에 키를 잡고 있는 남자가 잽싸게 배를 움직여 작업을 도와준다. 온 가족이 함께 협력하여 수입을 올리는 공동사업이다.

마침 내 주머니에 휴지 사고 남은 동전 9페소가 있어 던져 주었다. 처음에는 남들처럼 물속에 던져 주다가 다이빙하는 일이 너무 힘들 것 같아 잘 조준을 하여 보트 안으로 던져 주니 부인이 직접 나의 동전을 받으며 너무 좋아한다. 동전이 너무 약소한 것 같아 주머니를 뒤지니 마침 20페소짜리 지폐가 있다. 잘 조준을 하여 던져 주었으나 지폐가 바람에 날려 멀리 날아가자 키를 잡은 남자가 잽싸게 배를 저어 물위에 떠 있는 지폐를 주워간다. 아슬아슬한 장면을 목격한 승객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원숭이에게 바나나를 던져 주고 그들이 먹는 모습을 재미있어하며 바라보는 사람들처럼 승객들은 동전 한 닢을 던져 주고 그가 물에 뛰어 들어 건져내 오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전엔 이런 모습을 보고 보트피플 아이들을 조롱하는 것 같아 동전 던져 주기가 민망하였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을 데리고 나온 가장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점프하여 몸을 던지는 모습이 너무 진지해 보였고, 그의 사업에 조금이나마 협력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는 단순히 동냥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 그가 동전 한 닢을 위해 다이빙 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즐거움과 호기심으로 바라본다. 그는 볼만한 쇼를 보여주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그도 이런 정당한 행위에 전혀 부끄러운 마음을 갖지 않고 자랑스럽게 가족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그의 행위는 더 이상 구걸행위가 아니고 관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받는 정당한 직업행위이다.

누구든지 어려움을 헤치고 열심히 살고자 하는 진지한 모습은 아름답다. 그 행위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열정과 사랑이 깃들어 있다면 더욱 존경스럽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 알뜰하게 벌어 선하게 살면 모든 직업이 귀하고 아름답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선박 주위를 헤엄쳐 다니며 동전 줍기를 하다가 이제 가정을 이루고 보트를 한 대 마련하여 전문적인 직업인으로 변신하였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비관하거나 천시하지 않고 멋지게 자기 인생을 발전시킨 모습이다. 그가 장하다. 그의 눈빛에서 강한 생의 의욕이 빛남을 바라보며 떠나는 배 갑판 위에서 멀리 민도로 섬 쪽을 바라보다 잠시 상념에 잠겼다. 새벽 3시에 기상하여 Y선교사님의 승합차를 타고 엥겔레스에서 마닐라를 지나 컴컴한 고속도로를 달려 바탕가스 터미널을 향할 때 일행 중 한 학생이 어두운 차 안에서 정막을 깨고 ‘탈북 하는 느낌이다’ 하여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탈북하게 되면 아마 어느 해안 지점에서 보트로 갈아 탈 것이고 그 땐 보트피플의 역할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새벽 일찍 서둘렀지만 바탕가스 항구에 도착하니 5분이 늦었다. 민도로 섬까지 1시간이면 가는 7시 30분발 쾌속정을 타지 못하고, 1시간 반을 기다렸다가 3시간이나 걸리는 9시 완행을 타게 되었다. 5분 늦는 바람에 기다리는 시간을 합하여 5시간이나 늦게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필요한 시간에 맞추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때를 놓치면 항상 처지게 마련이다. 선교도 봉사도 때가 있다. 나중에 돈 벌고 여유 있으면 하겠다는 사람은 평생 못한다. 그 때가 되면 이제 힘도 없고 죽어야 된다. 늙어서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면 이는 천륜을 거역하는 행위다. 늙어선 욕심을 버리고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여유 있는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가 여유를 만들어야 한다. 자기 인생의 여유를 만들지 못하면 평생 시간과 물질에 쫒기며 살다 혜성처럼 나타난 저승의 배를 타고 순식간에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얼마 전 옛날 전화번호 책에서 오랫동안 연락되지 않았던 분의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전화를 해 보았다. 약 3년이 지났는데 번호가 바뀌지 않았다. 그 분과 이야기하며 처음 만난 날 수를 헤어보니 벌써 30년이나 되었다. 얼마 전에 만난 것 같은데 30년이란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말았다. 참으로 인생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빠른 흐름의 속도를 보니 내가 앞으로 살날도 그리 길지 않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값지고 선하게 살자. 내일 간다고 미루지 말고 오늘 가자. 이제 한국은 경제가 성장하고 문화가 발전하였고, 교회가 수많이 개척되어 방방곳곳 그 어디에도 교회가 없는 곳이 없으며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전국 모든 곳 산골짜기 깊은 곳까지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믿건 말건 이젠 당사자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세상을 돌아보자. 지구촌의 기독교인 숫자는 겨우 5% 미만이고 약 95%의 지구촌 백성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배고파 굶주리고 몸이 아파 신음하고 있다. 물론 나도 배고프고 몸이 남들처럼 건강하지 못하지만 난 그래도 잘 사는 나라에 살기 때문에 얻어먹을 거라도 있다. 상대적 궁핍이 아니요, 절대적 가난과 질병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참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예수의 능력으로 영육을 치료하는 치유사역은 먼저 믿은 이들에게 위임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생명운동이 아니겠는가.

▲ 이강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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