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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서...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산상변모주일(20100214)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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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2월 11일 (목) 18:00:04
최종편집 : 2010년 02월 11일 (목) 23:22:50 [조회수 : 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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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후 여섯 번째 주일. 산상변모주일(20100214)
성서일과/ 시 99; 출 34:29-36; 고후 3:12-4:2; 눅 9:28-36(37-43)
본문/ 누가복음 9:28-36 
산 위에서...

          (눅 9:28-36)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 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오늘은 주님이 변화산에 오르셔서 그 모습이 변했던 일을 기념하는 산상변모주일입니다.
이날이 특별한 이유는 이 일 후에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산상변모주일이 지나면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모습이 변화한 사건이 우리 믿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달아 아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산(山)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산이라는 말이 갖는 독특한 의미중 하나는 그곳이 죽은 사람들의 거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북망산에 간다고 합니다.
평지에 묻어도 산을 만듭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무덤을 산소(山所)-산에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산에 간다고 하는 말은 그저 산이 좋아 산으로 간다는 뜻 외에 죽은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와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굴을 파서 죽은 사람들을 모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산에 간다는 말이 우리와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뜻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시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하나님은 당신의 특별한 뜻과 은총을 나타내시기 위해 산에 임재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훗날 이스라엘은 거기에 성전을 짓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여호와의 산은 바로 그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시 그 산,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나 율법을 주셨습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중 출애굽기 34장은 바로 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출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에게 산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을 바라보듯 그렇게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시 121:1-2) [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그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들어서 아는 자와 보고서 아는 자의 차이는 큽니다.
듣고 믿는 믿음과 보고 믿는 믿음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평안할 때에는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겠으나 환란 때에 그 차이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체험,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보고, 그 음성을 귀로 듣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환란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산 아래에 남은 자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주님이 변화산에 오르실 때도 그랬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가 있었으나 주를 따라 산에 오른 자는 셋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산 아래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왜 주와 함께 산에 오르지 않았는지 성경은 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들은 적다고 하실 때 예를 든 사람들에게
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 22:3-6)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 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좋은 것을 마련하고, 청했는데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밭으로 일을 하러 가고, 자기 볼 일을 보러 가고, 심지어 심부름꾼을 욕보이고,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짐작컨대 산 아래 머문 제자들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피곤하기도 했을 것이고, 자기 볼 일을 보기에도 바빴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실제로 주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도 있었습니다.

본문은 주님이 산에 오르시기 전에 있었던 일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죠, 사람들이 나더러 무엇이라 하느뇨?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이는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고 합니다.
주님이 다시 물으셨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눅 9: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오늘 봉독한 본문 28절에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서라는 것을 바로 이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말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되리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그냥 넘길 수 없는 중대한 말씀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불과 팔일 후 제자들 중 사분의 삼은 그 말씀의 중대함을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들을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주의 말씀을 잊었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산에서 내려오신 후에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내 아버지가 죽었으니 장사를 치르고 따라가겠다고 하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눅 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한 일이 주를 따르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홉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산에 오르지 못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해도, 그 어떤 경우도 아비의 장례를 치루는 일보다 급하고, 큰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라 가셨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라면 마땅히 주와 함께 갔어야 했습니다.
주님이 늘 하시는 일이니 내가 한 번쯤 빠져도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에 오직 한 번 있을 영광에 참여할 기회를 놓쳐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일, 주와 함께 있는 일, 주의 전에 모이는 일을 주와 함께 산에 오르는 일과 같이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밭가는 일보다, 장사하는 일보다, 심지어 아비를 장사하는 일보다 더 귀하고 중한 시간이라고 여겨야 하겠습니다.

주와 함께 산에 오르지 않는 일이 다시 주를 능욕하고, 죽이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없는 그 시간, 어쩌다 내가 빠진 그 자리가 평생에 다시 없는 은혜의 시간과 영광의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여호와의 산 곧 하나님의 전에 주님과 함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산 위에서 생긴 일

산 위에서 벌어진 일들도 팔일 전 주님이 제자들과 나눈 말씀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 날 오갔던 말들이 그대로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첫째,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바뀌셨습니다.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얼굴의 꺼풀에 광채가 났던 것과는 전혀 다른 변화였습니다.
그의 얼굴이 달라지고, 옷까지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주님이 산 아래에서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눅 9: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모세의 광채는 얼굴 꺼풀에 나타난 광채였는데, 예수님은 그 얼굴 자체가 변하였습니다.
모세의 영광은 잠시 있다가 사라진 영광이었으나 예수님의 영광은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믿는 자들의 소망은 바로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중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보게 될 영광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이라면 우리가 죽어서야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섰는 사람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도 있느니라.”
그리고 불과 팔일 만에 그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보는 영광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사람들이 요한을 빼고는 모두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살아서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리운 사람입니다.
선지자 중에 하나가 살아난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모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 동편에서 죽었으나 그 무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스라엘은 모세가 죽은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올리웠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장차 다시 올 것이라는 믿음도 함께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보고 선지자 중의 하나가 다시 살아온 것이라고 말한 까닭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예언자의 대명사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달리 말하면 율법과 예언입니다.
율법과 예언은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의 책, 구약성경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과 함께 주님이 계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 주신 새로운 약속의 말씀, 신약입니다.
주님이 모세, 엘리야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다시 살아나면, 그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되어 싸워줄 것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오랜 꿈입니다.
모세가 다시 살아난다면, 옛날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것처럼 로마의 압제에서 자기들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한 때 세례 요한을 통해 그 소망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이라고 말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문득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 그대로 엘리야나 모세와는 견줄 수가 없는 이,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 산에서 증거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오랜 기대와 소망을 이루어주는 분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을 온전히 이루시는, 그 모든 약속의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고백을 헛되이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백에 깃들어 있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서 내 목자가 되신다고 고백하면, 주님은 선한 목자가 되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는 나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실 것입니다.
주는 나를 구원하실 분이라고 고백하면,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소망과 기대를 담아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고백하는 자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산 아래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당신이 죽고 다시 살아야 할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죽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으면 그들의 소망이 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이 한결같았으나 베드로가 앞장서서 그래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불같이 화를 내시며 베드로를 일러 사탄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산 위에서 주님이 모세, 엘리야와 함께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거기서도 주님의 별세 곧 세상을 떠나셔야 할 일에 대한 말들이 오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 베드로 일행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졸고 있었습니다.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주님이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하고, 그들이 함께 있는 것만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취한 베드로가 꿈을 꾸는 듯 말합니다.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 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그냥 그대로 거기 머물고 싶었습니다.
초막 셋을 지어 그냥 살자고 주님께 말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몰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듣지 못해서 알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이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산 아래서도 그것을 알지 못해 주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산 위에 올랐으나 정작 주님이 그 일에 관해 말씀하실 때 잠들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이후로도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이 왜 죽으셔야 하는지를 몰라서 두려워했습니다.
주가 잡히셨을 때 주를 부인했습니다.
마침내 실망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던 그 해변으로 돌아가, 버렸던 배와 그물을 다시 찾았습니다.

베드로는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다시 그를 찾아온 주님을 만난 후에야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21:18-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리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산 위의 영광 가운데 마냥 머물고 싶은 것이 베드로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지고 주의 뒤를 따르는 자에게만 임할 영광입니다.
하늘에서 들린 소리는 그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34] ...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그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원하지 않는 곳이라 할지라도 가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한이 있더라도 따라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산 위에서 보여주신 영광은 제자들이 땅에서 고난당할 때 잊지 말라고 보여주신 소망의 약속입니다.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 사는 일이 힘들고 어려워도 마침내 산에서 본 그 영광이 임할 것이니, 잊지 말고 기억하여 이기라는 뜻입니다.
십자가가 죽음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알고 십자가를 지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이 날에 보았던 그 영광을 잊지 못했습니다.
극한 환란에 처해 믿음이 흔들릴 위기에 처해있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그 일을 들어 말함으로 힘있게 그들을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벧후 1:16-18)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우리가 눈으로 본 것만큼이나 분명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산에 짓고자 했던 그 집은 부활하신 주께서 하늘에 지으실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요 14:2-3) [2] ...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하리라

마침내 그 영광집에 들어갈 소망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내 삶이 천국의 그것과 같지 않다 할지라도 실망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뜻과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주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원치 않는 환난이 닥쳐도 그 소망을 기억하여 견디고 이기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다시 산 아래에서...

하늘로서 나는 소리가 그치니 그 신비로웠던 광경은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아 있었습니다.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제자들은 그 일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왜 그같이 놀라운 일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 말해도 알 수 있는 자들이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조차 그날 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당장에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라 하지만 아직 주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자기들 편한대로 주님을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바울처럼 그 영광을 묘사할 방법이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갔었다는 말을 할 뿐 그곳이 어떠했는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의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찌 되었든 문제가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님 홀로 남으셨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도 결국은 예수입니다.
예언자들의 입에 두신 말씀이 가리키는 것도 결국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이 땅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가시는 길이 우리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하시는 일이 우리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이 험하고, 그 일이 어려워도, 우리가 보고 따라가야 할 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이 라는 것입니다.

홀로 남으신 예수님은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냥 그대로 머물고 싶었던 베드로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라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주님과 제자들을 기다리는 것이 무었이었습니까?
큰 무리가 예수님 일행을 맞이하였는데 그 중에는 귀신 들린 자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오니 그곳에 많은 사람이 있었고, 귀신들린 자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입니다.

귀신 들려 고통 받는 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은 세례 요한을 죽여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 들고 다니는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 궁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주님은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눅 9:41)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너희를 참으리요

믿음이 없는 곳이 그곳입니다.
패역한 곳이 그곳입니다.
험하고 악한 곳입니다.
결코 성도들이 머물 곳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곳입니다.
그것도 그 악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고난이 닥치고, 환란이 오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마저도 이겨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본 자는 주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나중에라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기억하는 자는 능히 악한 세상에서 겪는 고난을 견딜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나시기 전, 변화산에 오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고, 기억하게 함으로 다가올 고난을 이기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는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 또는 참회의 수요일이라고 부르는 날입니다.
그날로부터 주님이 고난당하심을 기억하여 지키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옷을 찢거나 재를 뒤집어쓰는 것은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하는 일입니다.
사순절의 첫날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하는 것은 회개함으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무엇을 회개하여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이해하지 못해 그 고난에 참여하지 못한 일들을 두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지도 받아들지도 못하여 십자가를 외면하고, 두려워하며, 부인하고, 실망했던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악하고 패역한 곳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소망을 두고,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좇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다가오는 사순절이 바로 그렇게 사는 절기입니다.
바울처럼, 훗날의 베드로처럼 그렇게 사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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