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월교회에서 오랜 시간 전도사로 일했던 장용근 목사(늘샘교회)는 허병섭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꿇은 무릎을 끝내 펴지 않았다. 허 목사의 투병을 안타까워하는 속 마음이 그의 무릎으로부터 물씬 풍겨났다. 허 목사와 사역을 함께했던 얘기를 할 땐 목소리 마저 떨렸다.

장용근 목사가 허 목사를 만난 것은 1969년이다. 장 목사가 손수 동월교회를 찾아 전도사를 자청했다. 허병섭 목사의 활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 목사는 야학에서 봉사하다가 허 목사를 만났다. 군대에서 있을 때 소개받은 야학을 제대 후 다시 찾아 판자촌에서  같이 살던 허 목사였다. 둘은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헤어졌다. 허 목사가 목동, 중랑천, 이문동 등에서 철거민 보상 문제로 투쟁하다가 하월곡4동에 동월교회를 지었다는 얘기를 듣고 따라갔다. 

	▲ 늘샘교회 장용근 목사는 "허병섭 목사와 대화가 결정적으로 삶을 끄는 힘이 돼 오늘의 내가 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김세진

“제2의 허병섭이 되길 원하지 않아요”

장용근 목사는 동월교회에서 일하는 동안 평생에 영향을 미친 두 사건을 만났다. 동월교회에서 일한지 3년 쯤 흐른 어느 날, 장 목사는 불안했다. 당시 신학을 하지 않은  장 목사가 한신대 여러 학생들을 제치고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다. 허 목사는 자신의 진보 성향과 장 목사의 보수 성향이 어울리면 좋겠다고 했다. 장 목사는 몸이나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동월 교회 바닥을 파다가 지붕이 무너져서 깔려죽을 뻔도 했다.

허 목사는 "한 번 소신껏 해봐라"는 말을 던지고는 3년 동안 "잘했다", "잘 못 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장 목사는 참다 참다 허 목사를 불러냈다. 나이 차이도 얼마나지 않은데 감정도 상하니 순간 목사라는 말이 안 나왔다. "당신, 나 좀 봅시다.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오?" 놀란 허 목사에게 " 잘하면 잘한다, 못하면 못한다고 한 마디 해야 하지 않나. 아무 말 없으니 무섭다. 시원찮은데도 자칭 전도사라 말 못하고 나가기만을 기다리나? 속히 말해라. 나가겠다"고 했다.

그 때 허 목사가 싱긋이 웃으면서 한 마디를 했다. 장 목사 자신을 찾는 계기로 지금도 마음에 남아있는 한 마디였다.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해서 그대로 하면 전도사님이 나를 닮은 제2의 허병섭이 될지 몰라도 하나님이 전도사님에게 준 달란트는 찾지 못할 게요. 전도사님 보니까 나보다 더 목회자의 소양과 좋은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잘해왔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소리를 안했고 그런 까닭에 마음껏 해보라는 거예요. 부담됐나? 미안하오."

이 말은 장 목사의 성장 과정을 이해하고 한 말이었다. 어려서 고아로 남의 집에서 일하며 자랐던 장 목사는 "다른 사람의 지시대로 살았기 때문에 인간 기계같이 인격이 형성되었다"고 말했고, 이 상처를 허 목사에게 자주 털어놓았다. 장 목사는 당시 모방은 잘하는데 창의성이 없었고 자신을 찾는 고민이 깊었다고 했다. 동월교회에서 일할 때도 이렇게 저렇게 하라면 쉽겠는데 알아서 하려니 어려웠다. 그래서 "일하는 게 시원찮아, 일을 그만 두기를 원하면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을 전달한 것이었다.

"전도사님이 성장했던 과정을 얘기했지 않나"로 시작하는 그 말을 듣고 장 목사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 꿇고 허 목사에게 잘못을 빌었다. 장 목사는 "허 목사가 쓴 책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다. 스스로 나를 찾지 못했다. 정체성을 찾지 못해 계속 나를 찾아가는 순례를 했다. 허 목사와 대화가 견인력이 돼 결정적으로 내 삶을 이끌었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 분의 말 한마디가 깊다"고 고백했다.

“이용당하는 달란트 주신 것 감사”

장 목사가 목회 현장에서 떠올리는 허 목사의 다른 말은 "이용당하는 게 감사하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장 목사의 몫을 유린한 것이 괴로워, 허 목사에게 이만저만한 일이 있는데 견디기 힘들다 토로했다. 장 목사는 허 목사가 한 말을 듣고 탄복했다고 한다.

"사람이 시원찮은지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아요. 주변 사람들이 무수히 많이 배반했어요. 화가 났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이용당하는 달란트를 주신 게 얼마나 감사한가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했더니 배반하고 이용한 사람이 스스로 돌아왔어요. 그분도 전도사님에게 그렇게 되기를 바라오."

목회 현장에서 이용당하고, 배반하면 안 될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마다 장 목사는 이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래 맞다. 그 사람이 뭘 어떻게 하든 간데 날 이용할 수 있는 것, 내가 빈 깡통처럼 버려지지 않고 이용당하는 게 감사하다."

	▲ 동월교회에서 오랜 시간 전도사로 일했던 장용근 목사는 허병섭 목사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꿇은 무릎을 펴지 않으셨다. ⓒ뉴스앤조이 김세진

‘큰 교회, 동월교회’
 
허병섭 목사와 장용근 목사가 함께 있던 동월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 장 목사에게 물으니 '동월교회는 큰 교회'라고 한다. 30년이나 된 교회에 교인 몇 명만 남았기에 공간 개념으로 실패한 교회이지만 에클레시아, 즉 공동체 개념으로 보았을 때 큰 교회라는 것.

영향 받은 사람이 곳곳에서 목회자로 평신도로 살고 있고, 공동체 개념에서 건축 일꾼 두레도 생겼고 텔레비전을 통해 그것이 널리 알려져서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장 목사는 동월교회는 교인들이 스스로 하는 교회, 열린 교회, 사회에 참여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교회라고 했다.

동월교회에서 있던 사람들이 네 곳에서 교회를 세웠으니 과연 큰 교회이기도 하다. 동월교회가 있는 월곡4동 옆 동네 월곡3동에 늘샘교회가 세워졌고 그곳에 장 목사가 갔다. 지금은 무주에 있는 오용식 목사는 노원구 양돈마을에 영은교회를 세웠다.

김성훈 목사는 돌산교회를 운영하면서 허 목사의 정신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이어받아 이웃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다. 새뜻교회는 이철용 장로가 삼양동에 개척해 정우성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동월교회는 허병섭 목사님이 목사직을 내려놓으면서 김한종·최인화·김옥성·강건수 목사가 왔다. 장 목사는 지금 동월교회는 처음과 다르다고 덧붙였다.

당시 동월교회는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허 목사는 유신정권이 감시하는 요주 인물이었다. 3.1절 등 특별한 날은 북부 경찰서 형사들이 예배와 활동을 감시했다. 메리야스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야학을 열었지만 허 목사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방해했다. 의식화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에게 검정고시를 치르게 하려 한 것인데도 훼방을 놓았다. 유신2기 때 허 목사는 반정부 유인물을 만드는 작업을 하다가 정보원에게 발각됐다. 허 목사는 당시 도피해서 청과시장에서 번데기 장사, 엿장수 등을 했다고 한다.

이밖에 동월교회는 한국 최초로 탁아서 똘배의 집을 운영하고, 최초로 예배에 국악을 도입했다. 이성재 선생과 김영동 선생이 와서 한국 찬송가를 국악으로 했다. 판화가 이철수 씨가 교회 벽에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고 영화감독 이장호 씨, 배창호 씨, 배우 안성기 씨 등도 교회에 모였다고 했다.

장 목사는 "허 목사는 누구에게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한 적이 없다. 공동모임에 가도 자신이 주장하기보다 저들로 말하게 하는 일을 하셨다. 그 분의 교육이나 정신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이해하면 매력에 빠진다"고 했다. 사람들이 "목사님은 예수님의 제자로는 100점인데 목사로는 0점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목사 하기엔 소박하고 말하는 것이 청산유수 같지만 않기 때문이다. 그런 허 목사는 장 목사의 스승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더러 신들메 매는 것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내가 허병섭 목사를 마주하는 마음이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