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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머리에 담뱃재를 떨고‘당신의 예수’를 죽여라.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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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5년 10월 15일 (토) 00:00:00 [조회수 : 3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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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떨고”라는 스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얘기다. 자기가 믿고 섬기는 분의 머리 위에 어떻게 담뱃재를 떨 수 있는가.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얘기이며,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열린 마음의 표현이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 ‘살부살조’라는 말이 있다. 선 수행을 하는데 “부처님이 와서 방해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선사)가 와서 방해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매이지 말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라도 ‘문구’에 매이면, 그 말씀(문구) 너머에 있는 속깊은 뜻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건 기독교적인 해석이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뿐 아니라 그 분에게도 매이지 말며, 그 분의 깨달음까지도 넘어서라는 말이다. 부처님까지도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부처를 죽이라”든가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떨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불교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동의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왜냐 하면 부처님은 수많은 성인들 가운데 한 분일 뿐이기에, 얼마든지 그를 부정할 수도 있고 넘어설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동의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다. 기독교인은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예수님은 다르지 않은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본질상 신의 성품을 갖고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기에 그 분은 오류가 있을 수 없으며, 그 분의 말씀이 담긴 성경 역시 한 점 오류가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이른 바 <성경 무오류설>인데, 성서를 그렇게 이해하는 한, 기독교는 독선과 배타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기독교와 견해를 달리하는 문화와 종교를 존중할 수 없게 되고, 대화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 채 끝없는 분쟁과 갈등을 양산하게 된다. 교리의 틀에 갇혀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10여년 전, 성철 스님이 입적하셨을 때, 그 분의 말씀이 세간에 크게 소개된 적이 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 말씀을 듣고 “말장난 한다”고 비아냥거리던 기독교인이 많았다. 당연한 얘기를 뭐하러 하느냐는 것이다. 또한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아우성이냐고, 어린아이도 그런 말은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빈정댄 것이다.

성철 스님의 말씀은 깨달음의 세 번째 단계에서 하신 말씀이다. 첫 단계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산과 물은 산과 하나가 되기 이전, 물과 하나가 되기 이전, 즉 맛보고 체득하기 이전에 관념으로 이해하던 산과 물, 그저 멀리서 대충 보고 알았던 산과 물이다. 그러나 어쨌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로, 앞의 전제가 부정된다. 어느 정도 산을 만나고 물을 만나며 그것을 경험하고 맛보게 되니, 전에 알던 산과 물이 아니더라는 말이다. 관념으로서의 산과, 경험하고 맛본 산은 분명히 다르다. 물론, 물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이다.

두 번째 단계를 거쳐야만 비로소 세 번째 단계에서 산과 물을 제대로 논할 수 있다. 개념을 넘어 실체를 경험하고 나니, 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제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개념이 삶과 체험을 통해 깨달음으로 와닿게 된 것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문장이 꼭같은 말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다. 말이나 글에 담긴 뜻과 의도를 보지 못하면 말은 그냥 말장난이 된다. 아니, 말장난에 그치면 다행이지만, 그 말이 사람을 가두고 죽이기도 한다. 의미를 떠나 왜곡된 말, 그 말이 예수를 죽였고, 수많은 ‘이단자들’을 죽였으며, 지금도 종교간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다.

나 역시 어설픈 말로, 혹은 어리석은 말로, 감히 큰스님의 깨달음을 설명해 보았다. 무식하고 미련한 짓이다. 어쩌면 성철 스님께서 “그게 아니야, 임마!”하고 꾸짖으실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개념과 문자에 매여있는 한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며, 실체를 바로 만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자꾸 “깨달음”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고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그런 사람의 맹목과 맹신에 대해서는 정말 두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다.

논의를 계속하기 전에 한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는 “한국의 주류 개신교가 말하는 기독교”이지, 결코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원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교리에 갇힌 죽은 종교가 아니라, 진정 사람을 살리고 사회에 생기를 주는 생명의 종교가 되려면 먼저 성서의 문자를 넘어서야 한다. 성서는 사람이 기록한 책이다. 그것도 2~3천년 전 고대인들의 기록이며, ‘성서에 기록된 신’은 ‘그들이 인식한 신’이다.

‘그들이 인식한 신’은 어떤 신인가? “그들의 인식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신”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인식한 구약의 야훼는 남녀를 차별하고 이방인을 가차없이 죽이며, 심지어 가나안땅을 정복한 후에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하나도 남겨두지 말고 죽이라”고 명령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잔혹하고 무지한 신을 21세기에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들은 왜 스스로 2~3천년 전의 원시 세계로 돌아가려 하는가? 그들의 이성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교리에 세뇌되어 있다.

보수적인 목사로부터 신앙심이 돈독하다는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다 함께 세뇌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그들의 무리 속에서 “봐, 나만 그런게 아니잖아. 저 신실한 목사님도 저렇게 확신에 차 있는데... 의심하는 건 사탄이 주는 마음이야.”라는 생각으로 자꾸만 도피하는 것이다.

왜 그들은 자기 이성이 가끔씩 제기하는 의심을 떨쳐버리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낡고 무지막지한 교리 속으로 자꾸 도피하는가? 경제 논리를 빌자면, 안전한 쪽에 투자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만일 자기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별로 손해볼게 없는 쪽에 투자하고 싶은 것이다.

“천국이 없으면 그만이지, 뭐... 그러나 만약 천국과 지옥이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리고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맞다면, 그 지옥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라면, 그 곳은 기필코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세계관이 얼마나 원시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비이성적인지를 분별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세뇌되었다. 이미 이성과 분별력을 박탈당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논리를 들이대며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힘주어 설교하는 목사들의 무식한 논리에도 반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공포심 때문에 사나운 교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연약한 기독교인을 나무랄 수는 없다. 또한 그런 유치한 신앙을 절대 진리라고 찰떡같이 믿고 설교해대는 무식하지만 진솔한(?) 목사들 역시 나무라기 어렵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사(?)를 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연약한 심리를 이용해서 교회 장사를 잘하는 이른바 ‘유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종님’들은, 그 옛날 그들을 꼭 빼닮은 바리새인들에게 퍼부었던 예수의 날카로운 비난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위선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막고 서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막고 있구나.” 물론 예수가 말하는 천국은 금은보화가 가득 쌓여있고 예수를 믿는 사람만 가는 그런 천국이 아니다.

예수의 천국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가두고 질식시키는 무지함과 잔혹함이 극복된 상태와 사회, 사람이 종족이나 권력, 신분, 남녀, 노소 등의 문제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이 함께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상태와 사회를 말한다.

그 ‘예수의 천국’은 ‘지금 여기서’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예수를 죽여야 한다. 예수를 죽이지 않고는 예수도 천국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 ‘당신의 예수’를 죽이라는 말이다. 당신의 예수를 죽여야 진짜 예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교리의 틀 속에 갇힌 어리석은 골수 기독교인들이여! 지금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들리지 않는가. “산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여, 나와 너를 함께 가두고 있는 교리의 감옥을 허물어라. 나를 풀어다오. 네가 만든, 너의 우상, 너의 예수를 죽여라. 그래야 나를 바로 만날 수 있고, 너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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