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학년초에 부담스러워하는 여러 선생님들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공개 연구 수업을 자청했었는데
오늘 오전에 성공적으로 마쳤다.

동학년 선생님들이 내가 수고했다고 관례대로
상동 일미 숯불갈비집에 가서 축하를 겸한 회식을 했다.
나는 사이다만 마셔도 술취한 사람처럼 된다.
회식 후 밖에 나오니 걸음걸이가 느긋해졌다.
상동 호수공원으로 가는 육교로 귀가하는 중이었다.

작은 베낭을 맨 약간 뚱뚱하고 작달막한 키에
허름한 차림의 중년 여자가 걷는 게 보였다.
그리고 '혹 노숙자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그런데 내 뒤쪽에서 앙징맞은 베낭을 맨
유치원생 남짓한 단발머리 꼬마 여자 아이가
그 여자에게 달려가 척 달라붙는 게 아닌가? 
도란거리며 다정하게 걷는 거였다.
'혹 내가 잘못 짚은 건 아냐?'
다시 한 번 눈길을 주었다.

'동네 사람이 나들이 나왔다면
둘 다 베낭을 멜 리 없을 텐데?...'

깔갈거리며 앞서 가는 걸 유심히 살피며
마침내는 그들을 따라잡았다.
육교를 다 건널 때 쯤 그들이 도란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엄마, 우린 어디로 가는 거야?"
"나도 몰라."
"그럼, 어떻게 해?"
"저 아저씨에게 물어 볼래?"

그 여인은 약한 강원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듯 했다.
외곽순환고속도로 밑을 가로지르는 그 육교 주위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없어 아저씨라면 나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하여 흠칫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소녀가 내 쪽으로 다가와 길을 물었다.
관심 없는 듯 얼굴을 돌려 그들을 보지 않았다.
그들의 인상을 못 본 게 지금은 약간 후회가 되기도 한다.

"저어... 아저씨, 걸어서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뭐? 걸어서 서울로?"
"예, 차비가 없어서요."
이 대답은 그 어머니가 받아서 했다.

가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런데 도저히 그 모녀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들하고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내 맘이 약해질까 봐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비겁한 사람이다.
그냥 앞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으음... 저 불빛 쪽으로 죽 걸어나가면
전차 길이 나와서 길이 막혀요.
거기서 왼편으로 걸어 가면 서울이 나오긴 합니다만..."
그런데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어떻게 서울로 걸어갈 생각을 다 하세요?"
"돈이 없어서 그래요."
"그럼 서울엔 아는 분이라도 있나요?"
"그럼요. 있고 말고요."

그들이 어떻게 돈도 없이 이 현란한 신도시
상동까지 왔단 말인가?
내 오른손은 언제부터 내 양복 포켓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지갑을 열어 보니 만원 권 몇 장뿐이었다.

"이 걸로 따뜻한 밥이라도 사 먹고 가세요."

그 어머니는 잠시도 거절하는 기색 없이 넙죽 받았다.
그리고 인사를 꾸벅했다.

"아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꼬마도 반갑게 인사했다.
"뭘요. 안녕히 가세요."

챙피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정신없이 호수공원 돌계단을 내려왔다.
자꾸 그들에게 내가 해 준 말이 부끄러웠다.
'일 만원으로 과연 따뜻한 밥을 배불리 사 먹을 수 있을까?'

조금 전에 식당에서 돼지 숯불 갈비를 질리게 먹고
물냉면까지 포식하고
포만감에 젖어 어슬렁거리며 오던 내가 아닌가?
먹다 남은 불고기를 애완견에게 준다고
여 선생님 두 분이 한 봉지씩 들고 가셨다.

'그 두 사람은 저녁도 못 먹었을 텐데.'

사람이 개 신세보다 못 해 보였다.
문득 내가 호사스러운  부자처럼 사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배 곯지 않음을 인해 감사하고 행복한 줄도 모르는
주변에 주린 자들에게 마음을 못 써 주는
하나님이 보시기엔 내가 더 한심한 인간이 아닐까?
돈이 있어도 내 배만 부르게 하고,
선한 일보다는 죄 짓는 데 더 쓰이는
그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호수를 돌아가면서도 줄곧 그 모녀 생각뿐,
부개동에서 23번 버스로 집에 와서도 
자족할 줄 모르는 자신을 여전히 자책하였다.

아내에게 그 이야길 들려 주니 한 술 더 뜬다.
"잘 했어요. 당신이 어만 데 쓰는 것보다
주린 사람이 따뜻한 밥 사 먹는 데 쓰였다면 다행이죠."

그 여자가 나에게 다가와서
"차비가 없어서 그런데 돈 좀 주시겠어요?"
"밥 좀 사 주세요."
라고 구걸했다면 돈 줄 생각이 막혔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내게 돈을 빌지 않고
서울 가는 길만 물었을 뿐이다.
갑자기 걸어서 서울로 가겠다는 그 말에
돌 같이 단단한 내 마음의 벽이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한 거였다.

고향의 부랑인 여자 깨님이 생각이 났던 것일까?
그녀는 애기 하나를 포데기로 둘러엎고
때론 그 여자아이를 붙잡고 다니며 구걸하며 살았다.
애기가 둘인지 하난지는 기억이 안 난다.

어린 나도 동무들을 따라 무단히
그녀에게 "깨님이, 깨님이" 하고 놀리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성을 내며 몸을 돌이켜
돌을 던지거나 욕설을 뱉곤 했다.
그러면 잠시 물러섰다가 다시 몰려가 놀려 먹곤 했으니
마치 황소 꼬리에 달러붙는 쇠파리 같은 존재였을 게다.
그녀는 피곤하게 쫓아다니며 놀리는 꼬마들을 힘겹게 쫓곤 했다.
버림 받은 여자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던가?
깨님이는 서울로 올라가서 어느 버스 기사에게서 임신하고
그 여자아이를 낳아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말이 돌았다.
요새 말로는 가출 미혼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와도 먼 집안 뻘 되는 사람이라는 말을
나중에 큰형수님에게서 들었다.
우리 집이 망하고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온 다음에는
깨님이는 망각된 존재였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이나 우리 집에서도
어수룩하게 행동하는 여자들마다  깨님이라고 불렸다.
깨님이가 보통 명사화 된 것이다.
형들도 누님이나 여동생에게도 툭하면
무심코 깨님이라는 말을 쓰곤 했다.

먼 어둠속으로 히힉덕거리며 사라져 버린 두 모녀를
흘낏 돌아보며 불현듯 그 깨님이가 떠올랐다.
'그들은 과연 내가 가리켜 준 송내역 쪽으로 가서
전철을 탈 수 있었을까?
밥 한 끼라도 따뜻하게 사 먹었을까?'

서로 얼싸안고 내 눈앞에서 다정하게
걸어가던 두 사람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부디 그들을 반겨 줄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2005-10-13(목) 밤9:25

이일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