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 기독교 신앙은 독재를 거부한다

우리는 한국 기독교인의 공동 이름으로 이 선언을 발표한다. 그러나 일인이 정부 삼권을 장악하고 군사 무기와 정보망을 국민 탄압에 사용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기를 주저한다. 우리의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지하에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10월 이래로 한국민은 비통한 역사적 상황에 놓여 있다. 박대통령이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한국민과 국가는 악마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되었다. 기독교계는 한국민의 일부로서 메시아 왕국의 성스러운 부르심을 받아 현재의 상황을 고발하고 궐기한다.

제2차대전 이래 우리 국민은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착취, 특히 비극적인 한국전쟁과 그 결과로 나타난 독재정치의 시련과 고통을 겪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 국민의 간절한 소망은 우리 생활이 새롭고 인간적인 사회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의 희망은 박대통령의 절대적인 독재정치와 무자비한 정치 탄압에 의해 무참히도 부서졌다. 이것은 이른바 '10월 유신'의 이름으로 행하여졌다. '10월 유신'은 몇몇 악인의 간악한 계획으로서 거짓 약속에 불과하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은 다음과 같은 근거로 고발하는 동시에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1)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의해 구체적·역사적 상황에서 그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승리에의 도취감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앞에서 우리 죄의 고백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한국의 상황에 대하여 진리를 말하고 행동한다.
2) 한국민은 음울한 상황에서 기독교인에게 행동을 취할 것을 기대하며 촉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대변하기에 족하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채워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촉구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우리가 우리 국민의 대표라고 자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통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들을 악의 세계에서 구출하도록 움직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해서 독립운동을 한 역사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기독교계가 궐기할 용기를 간혹 갖지 못했던 것을 알고 있다.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공식기구는 신학적 견해로 인하여 혁명적 행동을 취하기에는 너무 경건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 형제자매들의 연약함에 실망하기보다는 우리 교회의 역사적 전통으로부터 신학적 신념을 추구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의 말과 행동의 확고한 기초는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 메시아 왕국의 포고자이신 예수, 민중 속에 활발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성령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눌린 자와 약한 자와 가난한 자의 최후의 옹호자임을 믿는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에서 악한 세력을 심판하였음을 믿는다. 우리는 주 예수가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선포하신 것을 믿는다.

메시아 왕국은 악한 세력을 꺾고 재산 없는 자와 거부당한 자와 짓밟힌 자의 안식처가 될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성령이 새 역사와 우주를 창조하며 또한 각 개인을 부활시키고 성화시킬 것을 믿는다.

이 어두운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음 사항을 믿는다.

1) 우리는 역사의 심판자이며 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통받고 억압받는 인민의 해방을 위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2)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사회에서 행했듯이 눌린 자와 가난한 자와 버림받은 자들 한가운데 살도록 주 예수의 소명을 받았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제국 관헌 앞에서 행했듯이 권력자에 저항하여 진실을 말하라는 주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다.
3) 우리는 새로운 사회와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성령의 개조력과 운동에 참여하고 우리의 성품을 개선하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 이 성령은 메시아 왕국의 성령이며, 이 세상을 사회·정치적으로 변혁시키는 투쟁을 전개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우리의 신앙을 표명한다.

1) 현재 한국의 독재정치는 법과 설득에 의한 통치를 파괴하고 있으며, 폭력과 위협만으로 통치하고 있다. 사회는 정글 세계로 돌아가고 있다. 실로 하나님 이외에는 법을 초월할 수 없다. 이 세상의 권력이란 인간 사회에 정의와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나님이 권력자에게 위탁한 것이다. 누구든지 법을 초월하고 신이 위탁한 정의를 배반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동양의 전통에서 보아도 좋은 정치란 통치자의 덕망과 도덕적 설득으로 이루어진다. 칼로 민중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칼로 민중을 다스릴 수는 없다.
2) 한국의 정권은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파괴하고 있다. 한국에는 표현의 자유도, 침묵의 자유도 없다. 기독교회의 예배, 기도, 집회, 설교 내용 그리고 성서의 가르침까지도 정권의 간섭을 받고 있다. 기독교회와 다른 종교단체는 국민을 위해 양심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양심의 파괴야말로 저주받을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정권의 간섭에 저항하여 종교적 자유를 지키려면, 기독교회는 한국민을 위해 양심의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
3) 한국의 독재정권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기만과 조작과 세뇌를 조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언론기관은 정권의 선전기관이 되어 국민을 철저히 기만하거나 진실을 반쯤만 알린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진리의 증인으로서 언제나 기만과 조작의 통제를 파괴하는 투쟁을 한다고 믿는다. 진리를 알리는 것이야말로 민중을 하나님의 메시아 왕국으로 이끌어 가는 최후의 힘이다.
4) 한국의 독재정권은 음흉하고 비인간적이며 동시에 무자비한 방법으로 정적들과 비판적 지식인과 죄 없는 국민을 탄압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정보부는 나치의 게슈타포나 스탈린 시대의 KGB와 유사한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이 육체적·정신적으로 고문당하고 공갈과 협박을 받으며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실종된다. 이러한 조치는 인간성을 완전히 거역한 악마의 행위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창조하셨음을 믿는다. 육체와 영혼은 다같이 메시아 왕국의 심판의 날에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특히 인체의 성스러움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폭행은 살인과 마찬가지이다.
5) 현재의 독재정치는 한국에서 가장 강한 자가 가난한 자를 지배하는 경제체제를 낳았다.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심한 착취와 사회·경제적 부정의 희생물이다. 이른바 '경제 발전'이란 가난한 국민에 대한 몇몇 지배자의 음모임이 드러났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저주받을 환경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러한 극단적인 비인간화와 불의의 체제를 파괴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 실현되어야 할 메시아 왕국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 왕국에서는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고 억압받는 자가 옹호될 것이며 인민은 평화를 향유할 것이다.
6) 현재의 남북한 정권은 통일 논의를 권력 유지에 이용할 따름이다. 그들은 통일을 갈망하는 민중을 배반하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민중이 진실에 기초한 올바른 사회를 열망하고 있다고 믿는다. 지난날의 쓰라린 전쟁 경험과 이념적이고 정치·경제적 체제의 차이를 초월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억압받는 우리의 역사적 상황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통일이 실현될 수 없다.

<행동과 지지를 호소함>

1) 한국민에게: 1972년 10월 17일 이후 이루어진 독재정치의 모든 정치 과정과 법률, 명령, 정책 등을 어떤 형식으로든지 인정하지 말 것. 남한에서 민주정치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에 국민을 어떤 형태로든 뭉치게 할 것.
2) 한국의 기독교인에게: 위에 말한 투쟁의 준비로서 우리 기독교인은 교리를 깊이 생각하고 눌린 자와 가난한 자와 유대를 굳히고 보조를 같이함으로써, 또한 메시아 왕국의 복음을 전하고 우리 나라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교회를 개혁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우리 조상들이 그랬듯이 순교자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
3) 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무엇보다도 우리는 당신들의 기도와 연대성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의 용기를 북돋우고 지원해 줌으로써 다같이 공동의 유대를 갖고 있음을 표명해 주기 바란다.

<맺는 말>

우리 주 구세주 예수는 유대 사회에서 눌린 자, 가난한 자 그리고 병든 자들 한가운데 사셨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관리에게 과감히 저항하여 진리의 증언을 하다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인민을 해방할 화신의 힘을 보이셨다. 우리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억압받고 가난한 인민들 가운데 살고 정치적 탄압에 저항하여 역사 변혁에 참여할 것을 결의한다. 이것이야말로 메시아 왕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1973년 5월 20일                 
한국 기독교 유지 교역자 일동

* 1972년 '10월 유신'으로 본격화된 박정희 정권의 살벌한 장기 집권 독재 체제에 맞서 이듬해인 1973년 봄, 이 땅의 신앙 양심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발표한 이 선언문은 만 36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교회와 신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필자는 기존의 선언문 중 표현이 어색한 부분을 내용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다듬었음을 참고로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