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 카이로스와 회심 

1989년 7월,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한국, 나미비아, 니카라과, 필리핀, 남아프리카에서 온 제3세계 그리스도인이 서명 발표한 선언

차례

서문

Ⅰ 갈등의 뿌리
Ⅱ 가난한 이들의 믿음
Ⅲ 우리들의 예언자적 사명
Ⅳ 회심으로의 부르심

결론

서문

우리들, 이 선언의 서명자들은 서로 다른 교회적 전통을 가진 일곱 개 나라 - 필리핀, 남한, 나미비아, 남아프리카,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과테말라 - 에서 온 그리스도교인이다. 우리들 나라는 폭력적인 정치적 갈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도 갈등의 양측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 편에 선 신학이 발전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억압자의 신학이 발전하고 있는 점도 공통된다. 이는 우리들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 할 추문이자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들은 각국에서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띄고 있지만, 두 가지의 적대적 형태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해방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여성해방신학, 투쟁의 신학, 가난한 이들의 교회, 진보적 교회, 그리스도교 기초공동체가 한편에 서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우익 그리스도교, 국가신학, 화해의 신학, 신그리스도교 국가 운동, 반공 복음주의 등이 있다. 각기의 나라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는 정확히 어떤 집단을 지칭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용어 차이가 어떻든지 간에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분열과 갈등은 기본적으로 각국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선언의 목적은 그리스도교인 간의 분열을 한탄하거나 양측에 일치를 이루라고 훈계하려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이 갈등의 역사적, 정치적 뿌리를 드러내며(제1장), 우리들 나라의 가난한 이와 억눌린 이의 신앙을 증언하고자 하며(제2장), 억누르고 착취하며 박해하며 살인하는 자의 최악을 고발하려고 하며(제3장),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믿음과 사명에서 멀어져 방황하는 이들에게 회심을 요청하려(제4장) 함이다. 이제 일어나 외칠 때가 되었다.

우리 앞의 길은 사울이 초대교회 신자들을 박해하러 지나던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과 같다. 사울은 이 길을 걸으면서 회심하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자기반성과 회심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 신앙을 정치적, 경제적, 이기적 목적과 절충해온 사람들 입장에서는 결정적인 선회의 시점이다.

이 선언을 준비하는 데는 수백 명의 그리스도교인이 참여하였으며, 수천 명에게 회람하여 서명을 받았다. 각각의 나라에서 광범위한 연구 조사를 하고 자문을 받았으며, 일곱 개 나라 대표들 간의 대화를 2년 반 동안 가져왔다. 그 결과를 여기에 신앙선언, 회심으로의 부름으로 제시코자 한다.

제1장

갈등의 뿌리

1.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우리는 성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성서에 의하면 폭력적 갈등은, 방금 전에 똑같은 하느님께 함께 번제물을 받치고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시작된다(창세 4:3-8).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권력에 대항하여 투쟁하면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태어난다. 또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 등 고대 대제국과 맞서야만 했다. 예언자들은 백성들이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을 보면서 자주 이스라엘 왕과 갈등하였다. 예수는 종교 당국의 분노를 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설교하였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로마 행정관에게 넘겨 십자가형을 받게 하였다.

2. 초대교회 신자들은 로마 제국에 위해 위협으로 간주되어 박해받고 순교하였다. 그러다 4세기 콘스탄틴을 황제에 이르러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지배권력의 손에서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확장과 이후의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무기가 되었다.

식민주의

3.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된 한국의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 나라들을 식민지화하였던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교인임을 자랑으로 내세웠다. 정복과 선교, 식민지화와 교회 건설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십자가는 우리 민족의 피를 흘리게 한 칼에 축복을 주었다. 칼은 신앙을 강요하고 교회를 보호하는 한편 교회와 권력, 부를 공유하였다.

4. "발견과 정복"의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토착민들은 내몰리고 그들의 문명과 문화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또 수많은 원주민들이 식민정복자들의 노예가 되었으며, 자기 땅에서 뿌리가 뽑히고, 부와 자원을 박탈당했다. 여성과 어린이는 특별히 두드러진 억압의 희생자가 되어왔다. 자원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착취되어 고갈되었다.

5. 유럽 식민주의가 남긴 유산 중 가장 심각하고 지속적인 것은 인종차별주의이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이것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악명 높은 형태로 제도화되고 법제화되어 있다.

식민주의에 항거한 민중

6. 우리 민중의 역사는 억압과 고통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저항의 첫 소식은 토착민과 공동체로부터 들려왔다. 식민주의자들은 우월한 무기를 가졌고 토착공동체들은 함께 싸우기보다는 따로따로 싸우는 일도 자주 있었지만, 그래도 저항하였으며 때로는 공동체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목숨을 바쳐 투쟁하기도 하였다. 다른 이들은 침략자에 의해 정복되지 않은 채 남은 것을 보존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7. 정복되었던 사람들이 마침내 이 식민주의를 뚫고 나와 반란을 일으켰으며, 어떤 경우 혁명을 통해 식민 통치를 무너뜨리기도 하였다. 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승리가 지속된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민중의 예언자와 순교자들은 저항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8. 그리스도교는 식민통치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교인은 식민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 편에서도 볼 수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식민화의 첫 세기 동안 선교사들이나 심지어 주교들조차도 항의의 목소리에 함께 하여 스페인 왕이 토착민의 토지를 착취하고 민중을 지배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일본 식민주의에 대항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서구제국주의

9. 오늘날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이제 더 이상 식민자가 아니지만 아직도 하나 또는 여러 제국주의 세력 - 미국, 유럽 및 서유럽 - 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들의 통제망에는 불공정한 국제 무역체제, 우리 경제의 전략적 부문을 독점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나 정부가 국제통화기금 및 세계은행과 함께 좌지우지하는 경제정책 등이 포함되어 있다. 기술조차도 지배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엄청난 제3세계의 부채는 제국주의에 대한 예속의 한 가지 극적인 표현일 뿐이다.

10. 제국주의는 우리들 몇몇 나라에서는 국가주권을 훼손하며 민중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다. 보통 그 지역 지배자의 협조 속에 이루어지지만 여러 가지 방법의 정치적 간섭수단을 동원하여 독립성을 파괴하고 있다. 우리들의 교육제도, 언론, 종교 및 문화 제도는 예속적인 식민지 사고방식을 재생산해내고 있으며, 서구식 소비생활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11. 제국주의는 분리지배 전략을 구사한다. 제국주의는 인간은 종족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부당하게 대우하고 차별하는 정권을 지원한다. 또 성적 차별과 여성의 예속을 강화한다. 제국주의는 때때로 지배 엘리트의 분열을 확대시키기도 하지만, 민중의 반대편에 선 재배 엘리트의 결속을 추구하는 경우가 더 빈번하다. 그리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위 국가안보체제를 구축하였다.

12. 제3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의 지배는 연속적인 재앙을 초래하였다. 어린이들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일은 원하더라도 일할 직업이 없으며, 가족은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으며, 농민과 토착 공동체는 땅에서 쫓겨나고, 대부분의 도시 주민은 더러운 환경의 빈민가에서 살아야만 되고, 많은 여성들은 자기 몸을 팔아야 하는 등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누려야할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중

13. 우리들 나라에는 대중적 저항의 전통이 살아 있다. 대부분의 지배 엘리트들이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국민을 속이고 분열시키고 있지만, 민중은 억압에 비판적으로 반응하고 여러 집단과 공동체를 이루며 스스로를 조직하고 있다. 농민과 토착민, 노동자와 도시빈민의 공동체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긴급한 요구와 장기적 과제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와 똑같이 학생, 청년, 교사, 교회신도 및 문화활동 종사자, 의사, 간호사, 변호사 등 여러 전문직업 종사자, 일부 사업가 등이 대중적인 민주화 운동의 일부가 되었다.

14. 이런 운동이 보다 확산되고 조직화됨에 따라 보통 사람들의 힘과 지혜도 발전 심화되고 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오류와 성과에서 배우고, 연대를 경험하고 있다. 또한 제국주의의 본질과 그 기만성에 관해 서로 견해를 교환하고 있다. 이제는 항의와 저항의 차원을 넘어 현 체제에 대한 민중적 대안을 제안하고 추구할 책임까지 떠맡고 있다. 민중들은 투쟁이 쉽고 빨리 끝날 것이라는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15. 조직화되고 의식적인 민중의 운동은 다가올 시대의 역사적 주체를 드러내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 나라 안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 경험을 교환하면서 서로가 그 주체에 부여한 이름도 알게 되었다 - the people(피플), el pueblo(엘 푸에블로), 민중, ang sambayanan(앙 삼바야난)이 그것이다.

16. 제3세계인으로서 우리는 서구 제국주의와 소위 말하는 남북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세계의 다른 중요한 갈등도 알고 있다. 산업자본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 국가간의 동서 갈등이 있다. 자존주의 국가 내부의, 또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갈등이 존재하며, 사회주의 국가에도 같은 문제가 있다.

17. 서구 제국주의는 민족해방을 위한 우리들의 투쟁을 동서체제에 강제 편입시키려 한다. 우리는 동쪽 진영의 잘못, 즉 자신들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그리고 제3세계 국가에 대한 정책에서의 오류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것은 서구 제국주의이며, 우리는 동서갈등 속으로 말려들어 가기를 원치 않는다.

18.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고 있으며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군비경쟁을 늦추고 국지분쟁의 해결을 위한 협상을 선언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환영할 만한 발전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동서간의 평화공존을 위한 대화가 있을 때마다, 남쪽의 우리는 서구로부터 적대적 공격이 증가하는 것을 경험해왔다.

저강도 전쟁과 총체전

19. 식민 제국주의 세력은 다양한 진압 계획을 수립하여 민중의 저항에 대처하였다. 제3세계 민중이 역사의 새로운 주체로 진출하자 그들은 보다 정교한 진압체계를 발전시켰다. 그 방식은 저강도 갈등, 저강도 전쟁, 총체전, 총체 전략, 총력안보 등 이름도 여러 가지이다.

20. 제국주의 세력에게는 저강도 전쟁일지라도, 제3세계인에게는 전면전이라 할 수 있다. 저강도 전쟁은 핵무기만 빼고 모든 무기를 사용한다. 경보병뿐만 아니라 포병, 중무장 헬리콥터, 남아프리카와 나미비아에서 볼 수 있듯 카스피르 같은 장갑차, 중앙 아메리카에서 볼 수 있듯 기동함대까지 동원된다. 그들은 반란지역의 혐의만 있으면 주저 없이 폭탄을 투하한다. 또한 비무장의 공동체와 조직을 파괴하고 분리시키기 위하여 준군사 집단, '죽음의 소조', 민병대를 조직한다.

21. 전통적인 정규전과는 달리 총체전은 심리전과 사상전을 중히 여긴다. 나미비아, 선남 아프리카에서는 이를 '가슴과 마음을 획득하는 것', 혹은 WHAM이라고 부른다. 산타페 선언은 이를 문화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변화를 위해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을 분신케 하는 반면 정부를 '민주적'인 것으로 추켜세우고 있다. 고도로 억압적이고 양극화된 상황 속에서 제국주의자들은 개량주의적 대안이나 '제3의 세력'을 조장한다. 이러한 총체전략에는 그리스도교를 오용하며 서구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것도 포함된다.

갈등 속의 그리스도교인

22. 사상전에 그리스도교를 그릇 이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인이 민중의 고난과 투쟁에 참여한다는 기쁜 소식에 대한 제국주의의 첫 단계 대응이다.

23. 어떤 그리스도교인은 피억압자의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시작하여 자신의 신앙을 연대에 대한 헌신으로 이해하기에 이른다. 또 어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교 기초 공동체 안에서의 성찰의 결실로서, 신앙이 추동하는 데 따라 참여하기도 하였다. 각각의 길은 다를지라도 그들의 참여는 보다 조직화되고 의식적인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들은 민중운동 내에서 어떤 과제가 요청될지라도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신앙과 교회를 가난한 이에게 봉사하기 위한 힘의 원천으로 삼기 위해 노력하였다.

24. 이러한 새로운 발전은 제국주의 지도층 내에 심각한 우려를 안겨주었다. 그리스도교인이 민중운동 내에 조직적이고 의식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지배체제에 투쟁하는 대령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본국을 방어하는 데 그리스도교를 이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25. 산타페 선언 Ⅰ,Ⅱ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이 미국 대통령에게 해방신학을 체계적으로 공격하자고 공식 제안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제국주의를 방어할 신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새 연구소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일부 제3세계 국가 정부와 정보기관은 교회에 침투하여 보수적 신도를 키우고 진보적 신도를 '중립화' 시키려는 공동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해방신학을 정치적이라고 비판하는 일방, 자기들은 그리스도교를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맞춰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26.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제 정치적 갈등 속에 휘말려 있다. 억압자나 피억압자 모두 종교적 합리화를 추구한다. 양측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호소하며, 일곱 개의 나라 대부분에서 그리스도교인은 정치적으로 갈등하는 양편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27. 문제는 거기에서는 끝나지 않는다. 정치적 갈등은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교회 자체가 갈등의 장이 되어왔다. 교회의 일부는 자신들을 현상과 일체화하고 방어하기 위해 열심히 싸우는 반면, 또 다른 일부는 억압자와 일치를 이루며 변화를 위해 투쟁한다. 또 중립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사실 중립은 권력의 입장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권력자에게는 현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현상을 개혁하려는 사람에게 불신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중립이란 현재 상태를 지지하는 간접적인 방식이다.

28. 그러한 종교적 갈등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전에도 그리스도교인이나 성서의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치적 갈등의 반대편에서 서로 싸워 왔었다. 오늘날 새로운 것이 있다면 갈등의 강도와 우리가 그 점을 인식하고있다는 사실이다. 전에는 이렇듯 그리스도교 신앙이 함축하고 있는 정치적 의미를 자각하지 못했었다. 이 종교적 갈등은 단순한 학문적 논쟁이 아니며,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중요한 쟁점은 정의, 평화, 자유의 미래,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이다.

29.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갈등은 우리가 여기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양측이 호소하는 하느님이 동일한 하느님인가?
하느님은 양편에 계시는가?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은 어느 편에 계시는가?
예수의 신성(神性)에 관해 무엇이 밝혀져 있는가?

제2장

가난한 이들의 믿음

30. 선교사들이 설교한 하느님은 권력자와 정복자, 식민주의자에게 축복을 내리는 하느님이다. 이 하느님은 억압에 대한 체념을 요구하며 반란이나 불복종을 단죄한다. 이 하느님이 베풀어주는 것은 내적인, 그리고 딴 세상에서의 해방이 전부이다. 바로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천국과 사원 안에만 거주하는 하느님이다.

31. 그들의 설교는 예수를 거의 인간이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역사와 떨어져, 인간적 문제나 갈등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그분이 지상생활을 하던 때조차 그 높고 웅장한 왕좌에 앉아 우리를 통치하시는 지극히 높으시고 막강한 왕이나 황제로 그려졌다. 이에 따라 그분이 가난한 이와 함께 할 것도 겸손의 한 표현 정도로 격하되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을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투쟁에는 함께 하지 않고 단지 자비와 동정의 대상으로만 삼은 것처럼 보였다. 그분의 죽음은 역사적 갈등과는 전혀 무관하며 하느님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인간적 제물일 뿐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 지상의 삶과는 무관하고 완전히 저 세상에 속한 예수를 설교하였다.

32. 정복자들과 이들을 따라온 선교사들이 전한 하느님과 예수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다. 어떤 경우 칼을 들이대고 이런 믿음을 강요하였으며, 우리 선조들 일부는 강제로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한국의 경우만 식민지화하지 않고 유럽의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 이런 예수의 이미지가 유럽의 왕과 황제, 정복자의 모습과 유사하게 형성된 것을 안 것은 나중 일이다.

33. 우리들은 억압과 빈곤을 경험하게 됨에 따라 점차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은 왜 우리를 그렇게 큰 억압과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두는가? 하느님은 왜 항상 부자, 권력자의 편에 서는가?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은 시편이나 쉬운 해답을 거부하고 있는 욥기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음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빈곤과 억압이 정말 하느님의 뜻인가?

34. 우리는 곧 억압자로부터 정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수년간에 걸친 항의와 탄원 끝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하였으며, 역사의 주체(민중, 엘 푸에블로, 앙 삼바야난)가 되었다. 민중이라는 말은 단지 통치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결정의 주체임을 의식함으로써 지배권력에 대항하게 된 사람들을 뜻한다.

35. 이러한 발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은 성서도 새로운 눈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억압자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36. 우리는 예수가 우리들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났다. 그는 왕이나 고귀한 신분이 아니라 가난하게 억눌린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왔다.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섰으며, 그들의 대의를 지지하였으며, 그들에게 축복을 하였다. 반면 부자들은 비난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루가 6,20),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루가 6,24). 그는 억눌린 사람들의 해방을 자신의 사명으로 밝히기까지 하였다(루가 4,18). 우리가 배운 것과는 정반대되는 이야기이다.

37. 예수께서는 선포한 내용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가난한 이를 위한 기쁜 소식이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루가 4,18).

38. 하느님 나라는 단지 내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완전히 변화된 세상이다. 그것은 마치 노예상태에서 모두 풀려나고 모든 빚은 탕감되고 땅은 주인에게 되돌려지는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과 같은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출발하지만 이 세상을 초월하여 뻗어 있다. 그것은 이 세상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은 채 초월적이며 내세적이다.

39.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함에 있어 예수께서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당시 기존질서, 종교 정치 당국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설교를 '전복적'이라고 판단하였다. 그 때문에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40.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었고 하느님의 진정한 모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오늘날 억눌린 그리스도교인들은 가난한 이를 편들기로 한 사람들과 함께 그들처럼 박해받고 억눌리고 있는 가난한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진정한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의 얼굴에서 보는 하느님은 가난한 이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가로지르게 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이다(출애 3,17). 진정한 하느님은 세상의 불의에 분노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되찾아주며(시편 103,6),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를 들어올리시는(루가 1,52) 그런 하느님이다. 또 헐벗고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를 위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에 따라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하느님이다(마태 25,31-46).

4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가 10,21). 우리가 배우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성령의 힘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권력자의 하느님을 믿지 않으며 예수를 통해 드러나 보이는 하느님 외에 어떤 신도 원치 않는다. "너희는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출애굽기 20,1-2).

42. 예수에 대한 이 새로운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우리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시각으로 현재의 갈등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예수를 따르던 이들이 박해를 받고 죽음을 당한다고 해서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목소리, 특히 가난한 이들의 외침, 고통과 항의, 절망과 희망의 외침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다.

43. 하느님은 가난한 이, 억눌린 이, 박해받는 이의 편에 서신다. 부자와 가난한 이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의 상황에서 이런 신앙을 선언하고 이런 믿음으로 생활할 때, 그리고 부자와 권력자들이 이런 신앙을 거부하고 이단이라 비난할 때,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읽으며 위기 이상의 어떤 것을 구별해낼 수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진실의 때, 결정의 순간, 은총의 시간, 회심과 희망을 위해 하느님이 주신 기회, 즉 카이로스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제3장

우리들의 예언자적 사명

44. 역사를 통해 볼 때,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거나, 하느님의 현존을 보지 못하는 장님인 경우가 흔히 있었다 이렇듯 신앙의 부족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부여한 예언자적 사명을 실천하지 못하고, 불의와 억압을 고발하는 대신 침묵한 경우가 흔히 있었다.

45. 이 침묵과 불참여, 맹목과 불신의 원인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떤 이들에게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투쟁에 접할 기회가 없는 생활을 하는 탓에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에 참여하도록 촉구하지 않는 편리한 하느님을 택하고자 하는 데 원인이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권과 권력을 택하여 현재상태를 의식적으로 방어하려는 데 원인이 있다. 많은 경우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에 대한 공격과 억압, 가난한 이들을 죽이는 데 참여하기도 한다.

46. 그런 사람들은 듣고 볼 능력이 없기도 하지만, 듣고 보기를 거부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일 뿐만 아니라, 거짓 신에 대한 충성, 즉 우상숭배의 죄이기도 하다.

47. 우리는 비록 우리 자신의 죄를 알고 있다할지라도, 소리 높여 이런 죄를 규탄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중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총체전에 봉사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48. 제국주의의 심장부에는 우상숭배의 죄가 놓여 있다. 삶의 하느님보다 죽음의 우상을 택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민중을 향하는 무기로 쓰여지게 된다. 우상숭배는 그리스도교인에게 또 다른 죄, 이단과 배교, 위선과 신성모독을 범하게 한다.

우상숭배

49. 우상숭배는 하느님이 아닌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을 마치 하느님인 것처럼 여기면서 숭배하거나 종속되는 죄이다. "그들은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예배하고 섬겼습니다"(로마 1,25). 구약에서 모세와 예언자들은 금송아지, 바알 신, 인간의 손으로 만든 우상에 대한 숭배를 비난하였다(출애굽기 20,4-5; 시편 115,4). 신약 시대에는 우상의 주요형태는 재물 숭배였다(마태 6,24; 루가 16,13).

50. 이는 오늘날에도 동일하다. 우리들 나라에서는 돈, 권력, 특권, 쾌락에 대한 경배가 하느님에 대한 경배를 대신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우상은 소비중심적 물질주의가 신으로 군림하는 체제로 조직되어 있다. 우상숭배는 물건, 특히 돈과 재산을 사람보다 중요하게 만들었다. 이는 반인간적이다.

51. 우상은 반인간적이기 때문에 절대적 순종과 맹목적 복종을 요구한다. 성서에서 볼 수 있듯 우상은 추종자들의 자유를 박탈하며 노예, 죄수, 로봇으로 만들어버린다. 돈에 대한 추종은 인간성을 말살한다. 이윤은 타인을 희생시키면서 추구된다. 오늘날 돈의 우상은 체제를 방어하고 절대적이고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는 국가안보 안에 감춰져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나타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위장된 가면을 쓰기도 한다. 불복종하는 자에게는 잔인한 보복이 가해지며, 복종하는 자에게는 물질적 이익과 안정으로 보상한다. 우상들은 공포와 협박, 혹은 사람들을 매수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뇌물을 주고 돈으로 유혹하여 지배한다.

52. 우상 숭배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모든 것이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 지금과 다른 미래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 현재 상태가 안전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과거 우상을 숭배하였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상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참된 변화에 전면적으로 공포를 느끼며 산다. 그들은 현상을 섬기며 이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어떤 행위도 가리지 않을 것이다.

53. 고대 사람들이 바알과 다른 우상을 향해 돌아선 것은 바로 안정을 희구해서이다. 오늘날 억압자들은 돈과 군사력, 그리고 소위 안보로 회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안보는 불안정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안보가 협박과 억압, 테러, 강간, 살인임을 경험하고 있다. 자신의 안보를 위해 우상을 향한 대가로 그들은 우리의 불안정을 요구한다. 그들은 우리를 자신의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54. 우상은 희생양을 요구한다. 우상숭배자들은 기회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모두 몇몇 사람이나 집단의 책임으로 돌려 사회에서 몰아내거나 제물로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거나 사면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는 죄를 대하고 속죄하는 데 있어 우상 숭배적 방식이다. 아주 빈번히 완전히 결백한 사람들이 희생양으로 바쳐진다. 가끔 요한 복음 8장 2-11에 나오는 바와 같이 간통을 범한 여인처럼 완전히 결백하지는 않는 사람의 경우도 있다.

55. 우리들 나라의 돈의 숭배자들은 공산주의,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 심지어 그 방향으로 기운다는 의심까지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 그들이 느끼는 죄, 그들이 범하는 죄는 이 편리한 희생양에게 잘못된 것이나 미래에 잘못될 것까지 모두 그 책임을 뒤집어씌운다. 이에 따라 폭력, 인간 기본권 유린, 억압과 야만성을 공산주의 특성으로 말한다. 그리고는 납치, 투옥, 고문, 심지어 살인까지도 모두 정당화한다. 그들은 속죄양이 된 것이다.

56. 이렇게 하여 교회에 대한 박해까지도 정당화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교회내의 특정 인물, 진보적 집단, 어떤 곳에서는 교회 지도자들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다른 신도들로부터 격리되고, 그런 다음에는 불신 받고 증오를 받으며, 규탄의 대상이 되고 침묵을 강요받으며 심지어 제거되기도 한다.

57. 우상은 인간제물을 원한다. 예언자들이 바알 신 숭배에 가장 크게 분노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예레미야는, 신들은 어린아이 제물로만 달래질 수 있다는 미신적 신앙을 개탄하였다(예레 19,4-5). 이는 오늘날까지도 우리들 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 가장 사악한 차원의 우상숭배이다. 어린이와 노인, 무구하거나 방어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 국가안보와 세계 자본주의라는 맘몬신(재물의 신)에게 바쳐져 희생되고 있다.

58. 우리는 매일 기아선상의 어린이, 구속 중의 죽음, 암살, 학살, 그리고 실종 등 인간이 제물로 바쳐지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살인은 일종의 종교의식처럼 민중에 대한 총체전의 필수 요소가 되고 있다.

59. 우상숭배는 광신적이다. 그것은 비이성적이고 무절제한 행동을 충동한다. 우리는 군대, 경찰, 죽음의 소조, 콘트라, 민병대가 자행한 학살현장에서 이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저항하는 자에 대한 정신착란적 증오와 이에 항의하는 교회사람들에 대한 광포한 박해에서 이를 목격할 수 있다. 돈, 권력, 특권, 쾌락의 우상을 섬기게 되면 이성을 찾기란 불가능하게 된다. 우상은 체제 자체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피에 굶주린 감정을 만들어낸다.

60. 우상은 거짓이며, 사람들을 점점 더 속임으로써만 지속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거짓인 것은 사람보다 물질을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든 데 있다. 희생양도 거짓이다. 참된 변화를 모두 공산주의, 따라서 무신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61. 우상의 선전은 거짓말의 연속이다. 그 선전은 기존질서를 자연의 질서인양, 근본적 변화를 무질서(카오스)라 제시한다. 또 사람들이 자신의 열망을 제시하기 위해 표현하는 민주, 자유, 평화와 같은 언어를 도용하여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게 만든다. 평화는 현재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민주는 선거 조작,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차별 선거 등 대중들로 하여금 진정한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을 뜻하게 만들었다. 자유의 개념을 부자와 권력자들이 타인을 착취하고 조작할 기회로 타락시켰다. 우상은 진실을 위장하고 총체적 거짓 문화를 창출해낸다. 사탄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거짓의 아버지이다(요한 8,44).

이단

62. 이단이란 말은 선택을 의미한다. 이단은 그리스도의 메시지 중 일부는 받아들이고 일부는 거부하는 믿음의 형태로서, 그런 식으로 자기 신념에 따라 선택적으로 구성한 교의이기 때문에 스스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63.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정당화하는 신학은 이미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를 하느님의 계시를 왜곡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유명한 선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형태의 우익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고자 한다.

64. 하느님의 계시라는 요소를 거부하거나 무시하고 국가안보의 이데올로기를 지원하기 위하여 다른 요소도 선택하거나 왜곡시키는 신앙 형태는 이름이 어찌됐든 우익 그리스도교이다. 우리는 이 이단적 선택이, 우익 그리스도교 추종자들이 모두 이 점을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기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루어졌음을 확신한다. 결과적으로 우익 그리스도교는 의식적 무의식적인 우상의 정당화이다.

65. 우익 그리스도교는 우리들 모든 나라와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교파, 즉 가톨릭, 칼빈교, 루터교, 성공회, 복음주의파, 오순절 교회 등에서 정열적으로 많은 돈을 들여 선전 공세를 펴고 있다.

66. 이러한 새로운 이단의 특징 중 하나는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우기면서 그리스도교적 자유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서 13장의 그 유명한 구절은 죽음과 거짓의 정치를 하는 권력자들에게 무비판적 무조건적 충성을 바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그릇 해석되어 왔다. 어떤 나라에서는 이와 비슷하게 교회 지도자들의 절대적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67. 우익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안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책임감과 신뢰를 노예의 굴레에 복종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그것은 또 사회와 가족 내에서 권위주의와 지배관계를 조장한다. 또 한편으로는 성서를 이해나 비판적 해석 없이 복종해야 하는 하늘에서 떨어진 책 취급을 하며 흔히 성서의 권위마저 왜곡시킨다. 어떤 나라에서는 이를 근본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권위주의에 대한 맹목적 복종, 절대적 확신으로 안정을 꾀하려는 생각은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노예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68. 우익 그리스도교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그리스도교가 채용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구분, 즉 육신과 영혼, 물질과 정신, 현세와 내세, 정치와 종교, 세속과 신성, 사회와 개인간의 유효한 개념구분을 적대적 이원론으로 빠뜨린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신적 영혼, 물질과 정신 사이에 양극화와 적대성을 만들어냈다. 이는 물질과 영혼, 개인과 사회를 만든 분이 바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 반한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맺어준 것을 따로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

69. 우익 그리스도가 적대적 이원론을 믿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그것은 정신이 물질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고 하느님이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 자신들은 영적인 데만 관심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경제적 정치적 현상유지 바로 그 점에 관심이 있다. 현상, 바로 거기에서 이득을 얻고 있으며 그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 한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종교를 정치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자기들은 기실 현상을 지지하는 종교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들은 구원을 영혼에만 국한시키고 있는 것이다.

70. 그것은 성서를 내세적 해석으로만 이끈다. 성서에서 물질적 소유, 부와 빈곤, 억압과 해방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모두 왜곡되어 오로지 내세 및 개인구원과만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변질시켰다. 성서의 이러한 영적 해석은 환원주의이다.

71. 우익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특징은 광신적인 반공주의라는 점이다. 그들은 평등과 협력이라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는 공산주의 내지는 사회주의적 가치라 말하면서 개인주의 및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와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일방적으로 일치시킨다. 공산주의와 진짜 오류가 무엇인지 가리지 않고 다만 희생양으로 쓰여진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전쟁은 성전, 혹은 십자군으로 여겨진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일단 한 번 '공산주의자'나 '체제전복적'이라고 낙인찍히면 적을 사랑하라,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라, 그리고 연민, 연대, 회심의 촉구와 같은 그리스도교적 가치는 편리하게도 싹 잊혀진다.

배교

72. 배교는 이단보다도 더 심각하다.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째로 포기한 사람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린 자는 신도란 이름도 함께 내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우상숭배자들은 전략적으로 신자가 아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편의상 그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교인이라 부르며 형식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살지도 않으며 믿지도 않는다.

73. 그들이 이단적일 뿐만 아니라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배교도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신부나 목사, 수녀와 신학자, 교회 지도자와 교회 공동체를 불신케 하고 괴롭히며 때로는 투옥하며, 고문하며 죽인다. 교회와 그 신학이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보이면, 교회는 국가안보 전략의 목표물이 되면 그때는 이단 정도가 아니라 배교의 문제가 된다.

74. 우리 나라들 중 어떤 곳에서는 군종들이 민중을 억압하는 총체전을 교수하는 교관으로 파견되기도 한다. 그들은 교회 청년과 주일학교 교사 교육과 회의에 배치된다. 이들 군인들은 교리 교육을 장악하도록 특별히 훈련받고 있다. 대항적인 교회협의회, 대항 지도자 및 대항 교회가 국가안보체제를 지지하기 위해 세워진다.

75. 이러한 박해에는 해방신학에 대한 악의적 공격도 있다. 가난한 자의 편에 서려는 교회를 음해하고 분열시키기 위해 우익 분파를 조장한다. 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뚜렷한 목소리로 보여주는 산타페 선언 Ⅰ,Ⅱ처럼 이제는 목소리를 감추려 하지 않고 공공연히 진행시키고 있는 제국주의 전략의 일부이다.

위선

76.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설교하는 것을 항상 실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사실 대중의 눈에 비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회칠한 무덤이었다. 진리보다는 자신의 명성과 인기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비겁하여 자기 사회의 진짜 죄에 관해서는 말도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켰으며,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했다(마태 23,24; 7,5).

77. 우리 나라들의 일부 그리스도교파와 교회 지도자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들은 매우 '신중'하며 타고있는 배의 난파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부자, 권력자의 일부이거나 아니면 두려워한다. 심지어 명백한 불의가 존재할 때조차 그에 대하여 말하지 않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수백 혹은 심지어 수천이 실종되어도 교회 지도자들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위선적이다. 어떤 때에는 이 침묵이 우선 보다 더 사악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그들도 '추악한 전쟁'에 연루되어 있음을 가리는 가면에 불과하다.

78. 불편 부당을 주장하고 균형을 지킨다는 자들이 있지만 기실 현재상태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만 비난함으로써 당파성을 감추지도 못한다. 그들은 또 화해와 인내를 말하지만 이를 주로 체제의 희생자들과 힘없는 이들에게 역설한다. 그들은 '개량'을 제 삼의 길로 권고하지만 민중들이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들은 교회를 정치화할 위험을 경고하지만, 한편에서는 권력과 동맹 타협을 하면서 교회를 더럽힌다. 그들은 진보적인 신도들이 교회를 분열시킨다고 비난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일부 기초 공동체를 교회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기까지 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제도교회와 대중교회의 분열을 조장한다.

79. 오직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사실 이중기준을 사용하는 위선이 있다. 예를 들면 절대적 비폭력을 주장하고 민중의 무장투쟁을 비난하면서도 민중에 대한 무력의 사용에는 침묵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국가가 자기 방어권을 주장할 때는 인정하지만 민중이 자위권을 행사할 때는 그렇지 않다. 군사력의 경우 폭력의 합법적 사용을 용인하고 남용을 비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민중이 무기를 사용할 때는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이중기준의 이데올로기적 이유는 사회주의, 혹은 진보적 국가에 관한 그들의 발언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갑자기 그런 국가들에 대한 폭력의 행사는 그야말로 무차별적인 폭력일지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는 이중 기준과 위선이 뚜렷이 드러나는 경우이다.

신성모독

80. 우상숭배는 첫째 계명에 대한 죄악이다. 그것과 관련하여 모든 죄악 중에서 둘째 계명, 신성모독을 범한 죄보다 더 위험한 것도 없다. "너희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출애 20,7). 하느님의 이름으로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미국의 종교 및 민주주의 연구소의 신학자들은 심지어 다국적 기업을 야훼의 종으로 비유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이런 죄는 일부 주교와 신부들처럼 장교가 되어 군사력을 정당화하고, 민중을 살상하는 데 쓰일 무기를 공개리에 강복하고, 그럼으로써 총체전을 성전으로 정당화시켜주기까지 이르게 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일부 국가에서는 사제가 군종으로 복무할 뿐만 아니라, 테러단 두목에게까지 영적 조언을 제공하는 일마저 있다. 살인과 파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생명의 하느님을 부르는 일은 분명 신성모독이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이에게 죄짓게 하는 일이다(마르 9,42 루가 17,1-2).

81. 우상을 섬기게 되면 특정 사물과 인간이 신성시된다. 돈과 재물, 무엇보다도 안보가 신성시된다. 정부와 군부는 유사종교의 사제처럼 된다. 어떤 나라에서는 백인이 신성한 민족이 된다. 이것 역시 신성모독이다.

82. 신성모독은 성령의 역사를 악마에게 돌리는 '사탄화'의 형태를 취한다. 사탄화는 민중해방에 함께 하는 생명의 하느님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해방의 과업을 사탄의 활동으로 여기며, 악령에 사로잡힌 민중을 규탄한다. 예수께서도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그들을 치유했을 때 베엘제블의 힘에 사로잡혔다고 비난받았다. 우리는 또한 성령 모독의 죄에 대한 예수의 경고를 기억하고 있다(마르 3,22-30).

제4장

회심으로의 부르심

83. 신약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회심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의 사도 바울로 이야기이다. 회심하기 전 사울(당시의 이름)은 예수의 길로 회심한 이들을 박해하였다. 그는 대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산헤드린의 편에 서서 예수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울은 당국과 현상유지 편에 서서 "세상을 뒤집어엎기를"(사도 17,6) 원하던 새로운 운동을 억압하였다. 사울은 스테파노의 살해를 승인하고 찬동하였다(사도 7,58; 8,1). 예수처럼 스테파노도 사원과 율법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다(사도 6,14-15). 이는 종교적 갈등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바, 그것은 사원이 종교적 권력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권력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율법은 사회가 아무 것도 변화하지 않도록 보장하고 있었다. 사울의 관점에서 볼 때 유대 전통은 그 안에서 이 새로운 운동을 추방해야만 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끝까지 추적하여 스테파노처럼 돌팔매질을 해야 했다.

84.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눈에 띄는 대로 잡아 가둘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편지를 품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사울은 "여전히 눈에 살기를 띄고 주의 제자를 위협하고 있었다"(사도 9,1-2). 그 예수의 편에 있으며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는 것은 예수 자신을 박해하는 것과 같음을 돌연 깨닫게 되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3-5).

85. 사울에게 드러난 것은 하느님은 예수를 죽인 종교·정치 당국의 편에 서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반대로 베엘제블에 사로잡혔으며, 반역자, 선동가, 자칭 다윗의 왕이며 사원을 비판한 죄로 로마 당국에 넘겨졌으며, 신성모독의 혐의로 처형당한 한 분이신 그분의 편에 하느님은 계셨다(마태 26,62,65-66 ;루가 23,1-2 5,13).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사울은 하느님의 이러한 두 모습과 믿음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일로 충격을 받아 눈이 멀게 되었다. 그에게는 카이로스였다. 참 하느님은 예수 안에 계셨으며 부활하신 주님은 자기가 박해하던 바로 그 사람들 안에 있었다는 믿음을 받아들이면서 사울은 바울로가 되었다.

86.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의 이 카이로스는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선 그리스도교인의 박해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지지하는 이들은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회심으로 부르는 소리는 크고 또렷하다.

87. 우리는 재물로부터 벗어나 참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회심해야 한다. 우리는 두 주님을 모실 수 없으며,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경배할 수 없다(마태 6,24).

88.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있다. 우리는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이 진정 무엇인지 알 수 있다(마태 7,15-20). 평화가 없는 데도 평화가 있다고 말하는 거짓 예언자가 있다(예레 6,14; 8,11 에제 13,10). 박해받고 억압받는 이들의 예언자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89. 하느님은 우리 스스로가 저지른 죄악을 모면하기 위해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을 그만두라고 부르고 계신다. 공산주의를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모두 폭로되고 거부되어야 한다. 공산주의 정권과 운동도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들을 제물로 삼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90. 우리는 예수께서 위선을 꾸짖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민중들이 박해받고 착취되고 살해되고 있는데 양다리를 걸친 채 중립을 표방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당국이 무서워, 배가 엎어져 자기까지 빠질까 두려워 침묵을 지키고있을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위선자들에게 모두 회심하라고 부르고 있다.

91. 나자렛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회심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우상숭배, 이단, 배교, 우선 및 신성모독을 보면서, 우리 자신에 남아 있는 똑같은 죄의 잔재를 찾아낼 필요가 있으며 또 영웅주의, 독선, 교조주의, 편협성, 분파주의를 청산할 필요가 있다. 우리 마음속에 어떤 종류의 자아도취도 자리잡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결론

우리로 하여금 이 신앙 선언을 준비하고 서명하도록 이끈 위기와 카이로스는 바로 그리스도교인들 간의 갈등이다. 우리는 제국주의, 억압자, 민중의 착취자 편에 선 그리스도교인은 바로 돈과 권력, 특권, 쾌락의 우상을 숭배하는 자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려 하였다. 억압을 옹호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를 오용하는 일은 이단임을 밝히고, 억압받는 그리스도교인이나 억압받는 이들 편에 선 그리스도교인을 박해하는 일은 배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포기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자 한 것은 단순한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참뜻이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참 예수는 어디 계신가? 억압에 항거하여 투쟁하는 그리스도교인이 이단이 아니라, 악마와 죽음의 세력을 지지하는 자들이 이단이다. 하느님의 이름이 함부로 불리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이 선언을 작성하고 서명한 것은 희망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사도들이 엠마우스로 가는 길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희망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우리는 그분(예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루가 24,21). 그들이 예수께로부터 계속 배워야했던 것이며, 또한 우리도 그 일로부터 재삼 재사 상기해야할 것은 자유와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가 24,26). 값싼 해답이나 해방은 없다. 쉬운 길은 없다.

예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인간적 기대를 충족하고 또 초월하는 어떤 것, 즉 하느님 나라를 거침없이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우상에 부역하는 이, 그리고 오늘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도 생명의 하느님으로 회심할 것이라는 희망 속에 살도록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고통과 수많은 죽음 없이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약속하지만, 동시에 "너희를 산헤드린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이다", "너희는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갈 것"이며, "형제자매끼리 서로 잡아 넘겨 죽게 할 것이며, 아비도 제 자식을 그렇게 할 것이며, 자식도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17-22)라고 약속한다.

제자는 스승보다 위대할 수 없으며,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의 길을 따르고 있다.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굳세고 확고하게 나가자. 우리가 겪는 고통은 새로운 창조의 아픔이다.

일곱 나라에서 모여 2년 반에 걸쳐 함께 일한 경험은 연대의 본보기였다. 우리는 이러한 협력과 대화가 지속되고 모든 이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발전되기를 희망한다.

우리의 억압자들은 국내적으로, 국제적으로 자신을 조직한다. 우리도 흩어져서는 투쟁을 감당할 수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펼치려 한다면 연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제3세계, 산업화된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의 형제들에게 나눔과 협력의 그물을 건설하자고 호소한다.

1989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