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hrights.or.kr

인권운동가로서 건조하게 살고 있는 제게 왜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짐을 맡기셨는지, 도통 모르겠다. 벌써 10년 넘도록 인연을 이어온 문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종수 대표의 강권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제가 맡아야 할 주제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이런 저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권교육을 하기도 하고, 평소 저의 실천과 말 하나하나가 모두 결국은 인권‘교육’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인권’은 어떻게든 감당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문화’는 제게 너무도 생소한 분야이다.

물론 저도 다양한 문화활동의 수용자로서 책도 읽고, 아주 가끔이지만 콘서트에 가보거나 영화를 보기도 하지만, 남들 앞에서 무언가를 이야기할만한 ‘콘텐츠’는 없다. 제가 저를 잘 알기에 이 부담스러운 짐을 피하려고 했는데, 10년 넘은 인연은 이렇게 빈약한 내용으로 여러분을 만나게 할만큼 질기기만 했다.

잡설이 길어졌는데, 먼저 ‘인권’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도록 해보자.

인권이 과잉으로 여겨진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이곳저곳에서 인권을 강조하고 있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라는 최초의 인권전담 국가기구가 출범해서 비교적 순항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요즘에는 검찰과 경찰이 인권 경쟁을 하는 초유의 풍경까지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인권이란 말을 예전보다 더 자주 듣게 되었지만, 막상 “인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우리는 머쓱해진다. 다른 이유는 없다. 우리 모두가 인권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탓이다. ‘도덕’이나 ‘윤리’(그것도 국민윤리)를 정규 교과목으로 배우고, 심지어 ‘교련’까지 배우며 남학생들은 허공에 대고 총칼을 찔러대고 여학생들은 붕대 감았다 풀었다는 반복하고, 너나없이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남을 매일처럼 되새겨야 했지만, 정작 나와 내 친구가 무엇보다(국가보다도) 존엄한 인간으로서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을 소중한 권리, 즉 인권을 지니고 있다는 교육은 거의 금기시 되었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배운 인권은 프랑스의 근대시민혁명이나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언급되는 그렇지만 완벽하게 죽어있는 하나의 단어일 뿐이었다.

인권이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생각을 가다듬어 보자. “인권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정의를 통해 인권이 무엇인가에 대해 접근해 볼 수 있겠지만, 결국 인권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권리’라는 평범한 말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에 대한 고민은 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작업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나열하면 그것이 바로 인권의 목록이 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사람의 변화에 따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도 변하기 마련이다. 예전에는 전혀 필요없던 새로운 것들이 필요하게 되고, 예전에는 문제되지 않았던 것들도 새로운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인권의 개념과 목록은 날로 확장되고 변화한다. IT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많은 혜택을 받고 있지만, 길거리 감시용 CC-TV의 설치와 운용, 범죄자 감시용 전자팔찌의 도입, 유선전화, 휴대폰, 메신저, 이메일 등에 대한 도청, IT 산업의 발전성과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가난하거나 군인이거나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에 살거나)의 문제 등 숱한 인권문제를 낳고 있다.

결국은 돈의 문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군다나 우리처럼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천박하기 짝이 없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돈’이다. 우리는 돈을 갖고 거의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건강(뿐만 아니라, 아프면 진료받을 권리에 이르기까지)도 돈이 있으면 훨씬 더 쉽게 구할 수 있으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 짐짓 점잖은 채 하며 교환가치가 아니라고 애써 강변하던 사랑(가정을 꾸리며, 가정의 보호를 받을 권리까지를 포함한)도 이미 돈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돈이면 무엇이나 다 되는 세상, 돈만 있으면 전세계 어느나라보다도 살기 좋다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함께 생각하려는 문화도 예외는 아니다. 문화, 그리고 문화활동으로 인한 문화적 생산물도 거의 예외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돈이 없으면 접근하기 어렵다. 돈은 가히 누구도 넘보지 못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것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이지만, 누구에게나 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이 있는 사람이 누리는 인권의 무게, 그 양과 질은 돈이 없는 사람이 누리는 것과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아파트에 사느냐 아니면 볕도 들지 않는 지하 월세방에 사느냐 또는 같은 아파트라도 몇평에 사느냐의 차이를 훨씬 넘어선다. 그것은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어김없는 현실이다. 돈이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세상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다. 인권이 모든 사람의 것이기 위해서는 이 돈 문제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가 있어야 한다. 인권운동이 다른 어떤 운동보다 급진적이며, 체제변혁적이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물론 현실에서의 인권운동은 너무 자주 현실 순응적이며, 좋은 대학 나와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엘리트들의 호사스런 취미처럼 변질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인권운동이 인권운동이려면, 가장 핵심적인 인권문제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된다. 침묵은 체제를 전복하기는커녕 체제를 강화하고 지속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문화가 사람을 위한 것이려면, 또한 장르의 구분 등을 떠나 모든 사람들의 것이려면 문화도 돈 문제에 대한 체제전복적 상상력과 대안으로 거듭나야 한다. 정태춘이 평택 문제를 알리기 위해 거리 공연을 벌이고 있다. 정태춘다운 너무도 멋진 실천이다. 그렇지만 특정한 이슈에 대한 파이팅도 좋지만, 돈이 없어서 돈이 없기에 다른 잡다한 여유도 없는 사람들을 위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한 거리 공연도 모색되어야 한다. 돈이든 무엇이든 능력있는 사람들만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은 반인권적 세상이다. 진보라 부르든 민중이란 수식어를 앞에 붙이든간에 깨어 있고자 하는 문화운동가라면 문화를 통해 세상을 전복하는 꿈만 꿀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문화에 접근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직시하고, 그들과의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전복이 가능하다.

인권을 알고 이해하고, 나아가 실천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인권의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지 지식정보적 측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감수성과 짝하는 것이며, 그 일관된 흐름, 살아 숨쉬는 원칙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권의 눈으로 본 문화현실

어젯밤에 잠깐 폭소클럽 [3․6․9]란 꼭지를 보았다. 평소 보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두사람이 나오는데 한사람은 누가 봐도 유능하고 멋진 사람이고, 다른 한사람은 무능하고 후진 사람이다. 이 코너가 노리는 것은 무능하고 후져 보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웃긴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웃음이 무능하고 후져서, 즉 정상(인권적으로 표현할 때는 ‘다수’란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적이지 않아서 웃긴 것인지, 아니면 어눌해도 고정관념과 상식을 깨는 일탈을 보여주어서 웃긴 것인지 모르겠다. 만약 단순히 ‘바보’를 보여주고 웃길 생각이라면 이건 인권 문제가 된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어젯밤 본 장면은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두명의 웨이터 이야기였다. 세상 사람들이 다들 나이트클럽에 가서 짝짓기를 시도하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냥 지켜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물이 좋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듯한, 아니 섹시한 외모를 지닌 여성들이 많다는 것이 아닌가. 괜히 심각하게 딴지를 걸자는 것이 아니라, 만약 어떤 나이트클럽에 휠체어가 아니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여성 장애인이 한두명이라도 끼어 있다면 그건 ‘물이 나쁜’ 상태가 될 것이다. 모든 게 번듯하고, 모든 게 근사하고 또한 섹시한 주류의 주류를 위한 주류에 의한 문화가 바로 나이트클럽의 문화이다. 이때는 주류가 다수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중파는 소수의 주류만을 반영하고 있다.

그저 웃자는 개그 프로그램에 대해 괜히 얼굴을 붉히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부 얼짱 연예인들이 아무런 성찰이나 고민없이 반복적으로 생산하고 유포시키는 “잘난 것은 좋은 것, 못난 것은 나쁜 것” 식의 배타적 주류 이데올로기는 어린 청소년들은 물론이고, 시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영향은 번듯하고 잘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서 온전히 버티지 못하게 하고 있다. 참으로 고약하기만 하다.

이런 식으로 꼬집어 볼 주류 문화는 한둘이 아니다. 얼굴도 잘 생겨야 하지만, 경륜이 있는 남성 앵커 옆에 꽃처럼 앉아 있는 젋은 여성 앵커 식의 여성을 상품화하는 조합은 이미 너무 오래 되어 다른 상상을 불허할 지경이다. 보도, 시사교양, 연예, 오락,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싶을 지경이다.

골든벨에 나온 관순이나 드라마 주인공 삼순이가 잘나지 않았음에도 대중의 환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개천에서 용나는 식의 역전은 가뭄에 콩나듯 보여줄 뿐이다. 왜냐면 그들이 이미 완벽하게 주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방송을 만들어가는 그들은 주류의 반영이 아니라, 주류이다. 우리는 주류가 아닌데, 우리가 보는 것은 주류와 주류의 반영이다.

인권의 역사에서 공짜는 없었다

미국민에게 그저 좋은 휴일 하루 선물한 것쯤으로 그 의미가 쪼그라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죽는 순간까지 인권을 위해 투쟁했다. 그의 보이코트 투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러나 킹목사가 전면적으로 투쟁의 장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던 [몽고메리 시티라인즈 버스회사 보이코트] 투쟁은 평범한 한 흑인 여성의 매우 단순한 그렇지만 단호한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시티라인즈는 남부연방의 임시 수도였던 몽고메리의 버스회사 이름이다. 이 회사만이 아니라, 몽고메리에서는 버스 안에 백인이 서 있으면 흑인은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흑인이 앉아 있는데, 백인이 서 있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백인이 흑인 옆의 빈자리에 앉으면 흑인은 백인 옆에 앉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버스 앞부터 열개의 좌석은 무조건 백인 승객 전용이었다. 요금은 버스 앞문으로 타서 내고는 다시 버스에서 내려서 흑인들만 타는 뒷문으로 흑인들만의 자리로 가야 했다. 이러한 불평등은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이 당하는 숱한 차별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이를 깬 것은 조라 리 팍스라고 하는 흑인 여성이었다. 그는 백화점 재단사 보조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한 일은 단지 백인들의 전용 자리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었고,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금액인 100달러의 보석금을 내고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1955년 12월 1일의 일이다.

이 일은 흑인 공동체의 보이코트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 싸움은 1년이나 계속되었다. 몽고메리의 흑인들은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유일한 교통수단인 버스를 보이코트했고, 간디가 소금투쟁을 벌이며 그랬던 것처럼 ‘걸었다.’ 그들이 걷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도 미국 남부는 온통 백인전용이라는 팻말이 거리 곳곳과 음식점, 극장, 심지어 법원에까지 차고 넘쳤을 것이다. 물론 그때의 싸움이 모든 것은커녕 기본적인 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 미완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이번 뉴 올리안즈의 참화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지만, 그래도 성과는 싸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훗날 로자 팍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나는 내가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했던 것 같이 행동하는 것, 즉 지시에 다르지 않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에는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일어나지 않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하루가 끝나고 늘 그렇듯이 그날도 피곤했다……. 나는 만일 누군가가 일어나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하면 거부하겠다는 생각을 이미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이 회고는 1988년 무렵의 것이다. 30년이 지난 다음이어서인지 “그냥 일어나지 않기로 결심했을 뿐이다”고 쿨하게 밝히고 있지만, 일어나지 않을 경우 어떤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잘 아는 그로서 그냥 일어나지 않기로 한 것만도 ‘결심’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결심과 실천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남성에게만 참정권과 이와 짝하는 일할 권리가 보장되고, 여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1870년부터 1920년까지 50년 동안 미국 여성들은 참으로 가열차게 투쟁하였다. 아무런 무기도 갖지 못하고 그저 단식으로 저항하며 자신을 지키던 여성들에게는 전향공작을 당하던 1970년대의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행해졌던 것보다 어쩌면 더 끔찍한 국가폭력이 행해졌다. 바로 강제급식이었다. 인권을 요구하는 여성들에게 체포와 고문, 사법적 단죄로 화답했던 국가에 대해 여성들이 꺼내들 수 있는 무기는 단식투쟁뿐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여성들의 단식을 용납하지 않았다. 단식으로 여성들이 죽는 것은 물론이고, 단식 자체도 국가의 패배로 생각했다. 그래서 강제로 우유를 먹였다. 국가가 보낸 거구의 남성들이 작은 체구의 여성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우유나 죽을 먹인다. 저항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다. 이같은 강제급식으로 많은 여성들이 죽어갔다. 여성이 참정권을 가지게 된 것은 어느날 갑자기 남성과 그들만의 국가가 생각을 바꿨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처절한 여성들의 투쟁에 밀린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인권의 역사는 이처럼 우리에게 공짜는 없다는 것은 준엄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도 전태일부터 수많은 열사들 덕분에 이만큼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들이 목숨을 내걸고 싸우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도 육참총장과 보안사령관의 이름을 달달 외우고 있어야 할지 모른다.

경찰서 유치장이나 교도소, 구치소에 입감될 때, 유치인, 수용자들은 언제나 몸 수색을 당해야 한다. 이유는 남을 해치거나 자해할만한 흉기를 찾아내거나 관리상 금지된 물품(담배 따위)의 반입을 막기 위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참으로 고약하다. 일단 옷을 모두 벗긴다. 이때 옷을 벗는다는 것은 목욕탕에서 벗는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경찰관들이나 교도관들은 옷을 입고 있고, 관리 대상이 되는 사람들만 벗는다. 그저 벗고 있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앉아 일어서’도 반복적으로 시키고, 몸을 샅샅이 훑어보기도 한다. 남성이 여성의 몸을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옷을 벗기는 목적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정작 속내는 관리대상을 완전히 굴복시키려는데 있는 것 같다. 수치심을 주고, 아무 것도 걸치지 못한 초라한 몸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 그저 시키는대로 움직여야 하는 관리대상임을 초장부터 확실히 알려주는 효과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2000년 봄까지 알몸수색을 거부했다거나, 알몸수색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는 사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모두가 순응한 탓이다.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관리대상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른바 ‘양심수’라 불리는 사람들마저 저항하지 못했던 상황은 너무도 고약하다. 이 고약한 상황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민노당 당원으로 성남 시내에서 유인물을 뿌리다 선거법 위반의 혐의로 체포된 두명의 20대 여성은 달랐다. 그들은 알몸수색에 저항했고, 스스로 옷을 벗지 않고 경찰관들이 옷을 강제로 벗길 때까지 저항을 거듭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옷을 벗어야 하냐는 것이었다. 방금 변호사를 만나는 장면을 경찰관들이 지켜보았는데 왜 또 옷을 벗어야 하냐고 저항했다. 이들의 저항은 세상에 알려졌고, 민․형사 소송이 뒤따랐다. 이들의 단호한 저항 이전의 유치장과 이후의 유치장은 너무도 다르게 변했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가운이 지급되고, 얼차려에 가까운 ‘앉아 일어서’도 없어졌다. 여성의 몸수색은 여경이 맡게 되었다. 덩달아 유치장 환경도 개선되었다. 온기라곤 하나 없는 차가운 마룻바닥은 전기판넬이 깔려 훈기를 느끼게 되었고, 경찰관들이 훤히 볼 수 있었던 화장실에는 가림막이 설치되었다. 조명도 밝아졌으며 여성과 장애인을 위한 배려도 하나둘씩 생기고 있다. 많이 개선된 것은 아니지만, 보리밥에 짠지 두세개를 주는 관식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처럼 민주주의, 또한 민주주의의 목적인 인권의 의미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 없다. 인권은 단 한번도 피흘림이나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진전되지 않았다. 매우 작아보이는 권리 하나도 그 권리를 위해 간단없이 싸웠던 인권피해자, 인권당사자들 때문에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싸움이 격렬한 경우도 있지만, 단순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 등 다양한 형태의 싸움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문화권도 공짜는 아니다

인권이 무언가를 할 때 우리의 것일 수 있듯이, 문화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가만히 앉아서 소극적인 수용자로 머물기만 하면 우리에게 열심히 무언가를 선전하려는 국가와 자본의 손바닥 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문화권 - 문화를 누릴 권리도 다른 인권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내 것, 우리 것, 내게 필요한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 나서야 하고, 내게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문화활동가들과 연대하고 함께 가려고 할 때 그 권리를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종수 대표가 하는 역할은 아직은 작지만 매우 중요하다. 우리도 이제 우리에게 맞는 음악(등)을 찾아야 한다. 내 돈을 내어 CD를 사고, 내게 맞는 공연을 보러 가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연출하여 우리에게 맞는 문화생산물 - 상품을 넘어서는 소중한 권리 - 들을 만나야 한다. 이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천박하기 짝이 없는, 돈이면 다 되는 상황이지만, 우리의 구체적인 실천과 참여로 얼마든지 전복이 가능한 상황이다. 중고등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방송국에 엽서 보내기 같은 적극적인 참여(이제는 이메일이나 시․청취자 코너 등으로 예전보다 훨씬 편해졌다)에서부터 우리가 꿈꾸는 전복은 가능해질 것이다.

아직 어정쩡하기 짝이 없지만, 토요일 늦은 밤 한국방송이 내보내는 콘서트 7080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은 제쳐 두고서라도 비주류도 주류(공중파)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전복의 가능성’은 확실히 보여주었다.

우리 모두가 노력하고,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면 불가능은 없다.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 - 박노해 그리고 김현성

나면서부터인가

노동자가 된 후부터인가

내 영혼은 불안하다

새벽잠을 깨면

또다시 시작될 노동의 하루

거대한 기계의 매정한 회전

주임놈의 차가운 낯짝이

어둠처럼 덮쳐 오고

아마도 내가 자살한다면

새벽일거야

잔업 끝난 늦은 귀가길

산다는 것, 노동자로 산다는 것의

깊은 불안이 또다시 나를 감싼다

화창한 일요일

가족들과 오붓한 저녁상의 웃음 속에서도

보장 없는 내일에

짙은 불안이 엄습해 온다

이 세상에 태어나

죄진 적도 없고

노예살이 머슴살이 하는 것도 아닌데

풍요로운 웃음이 하늘에 닿는

안정과 번영의 대한민국 땅에서

떳떳하게 생산하며 살아가는데

왜이리 종놈처럼 불안한 세상살이인가

믿을 거라곤 이 근육덩어리 하나

착한 아내와 귀여운 딸냄이

기만원짜리 전세 한 칸뿐인데

괴롭기만 한 긴 노동

쪼개고 안먹고 안입어도

남는 것 하나 없이 물거품처럼

이러다간 언제 쓰러질지 몰라

상쾌한 아침을 맞아

즐겁게 땀흘려 노동하고

뉘엿한 석양녘

동료들과 웃음 터뜨리며 공장문을 나서

조촐한 밥상을 마주하는

평온한 저녁을 가질 수는 없는가

떳떳하게 노동하며

평온한 저녁을 갖고 싶은 우리의 꿈을

그 누가 짓밟는가

그 무엇이 우리를 불안케 하는가

불안 속에 살아온 지난 30년을

이제는,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

평온한 미래를 위하여

결코 평온할 수 없는

노동자의 大道를 따라

불안의 한가운데로 휘저으며

당당하게 당당하게

나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