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선생

‘기러기 노러를 부르며 선향을 찾아 길떠나는 남궁억. 화려했던 30년의 정치, 사회생활을 뒤로하고 아무도 모를 강원도 산골(보리울)을 향해 짐을 쌌다. 날씨 만큼이나 그 때의 사회분위기도 싸늘했다.

보리울이 그의 고향이라지만 그가 태어났거나 어린시절의 꿈이 담긴 그런 고향이 아니라 대대로 남궁씨들의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던 그의 조상들의 땅이었다. 그는 이미 부친 대 이전에 고향을 떠난 ‘실향민’이었다. 이제 50대 중노인이 되어 세속의 영욕을 체험한 후 때가 되면 고향을 찾아가는 기러기처럼 할아버지의 땅을 찾은 것이다.

보리울은 행정구역 명칭으로는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이다. 보리울은 모곡리의 순 우리말 이름이다. 남궁억이 보리울에 정착한 후 처음 얼마동안은 요양으로 시간을 보냈다. 워낙 궁벽진 곳이라 3·1운동 소식도 한참 후에야 들을 수 있었다. 문병오거나 바깥 세상일이 궁금해서 찾아오는 시골사람들을 앉혀놓고 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왜 만세를 불러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조선 통치개념을 바꾸었다. 겉으로는 완화정책을 펴며 신문, 잡지도 만들게 해주고 어느 정도 사상발표의 자유도 허락하였으나 속으로는 오히려 더 철

저한 일본화 정책을 수행해 나갔다. 일본가요, 일본술과 공창등 퇴폐문화를 앞세우고 일본문화가 침투해 들어왔다. 일본말이 구어가 되었고 우리 역사는 부록 취급을 받게 되었다. 3·1운동이후 총독부가 표방한 문화정치는 미소로 위장된 무서운 음모정치였다. 3·1운동이후의 정치, 사회적 변화를 눈여겨 본 남궁억은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자 보리울에 온 목적을 실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우선 착수한 것은 보리울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춘천에 있는 남감리교 선교부에 연락을 취해  전도인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자기 사재를 털어 보리울에 열칸짜리 기와 예배당을 마련한 것이 1919년 9월이었다. 서울에서 정5품 통정대부란 높은 벼슬을 하다가 내려온 양반이 교회를 한다니까 보리울사람들도 별로 반대하는 기색이 없이 적극 협력하였다. 교회 안에서 마을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후일 모곡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남궁억이 직접 가사를 지어 아이들이 불렀던 노래가 있다.

“동막산과 강구비 앞뒤둘렀고 / 모곡구역 모곡리는 우리집이라 / 세상영화 누릴자는 우리들이며 / 그가운데 뜻부칠손 주일학교라

금동여야 모여서라 세동리에서 / 하나님의 뜻이있어 입적한우리 / 구주님 은혜를 더욱감사해 / 천국낙도 바라보는 십자동무야”

모곡학교는 1923년에 제1회 졸업생을 냈고 그해에 100여평 대지위에 교사와 기숙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4년제였으나 1925년에는 6년제로 발전하였다. 자신이 직접 아이들을 가르쳤고 송병휘선생 등 젊은 이들을 교사로 초빙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그가 보리울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운 것은 이름도 날리고 돈도 벌어보자는 세속적인 목적에서가 아니라 다만 한 가지, 3·1운동이후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조선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일제의 치밀하고도 집요한 통치에 맞서 그 혼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꾸려나갔다.

유리봉은 매일 아침 그의 생활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이른 새벽 그곳에 올라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그의 하루 생활 시작이었다. 밤늦게 혼자 일어나 앉아 무릎꿇고 기도드리는 모습도 종종 가족들의 눈에 띄었다.

1922년 어느날 밤기도 드리는 가운데 떠오른 시상을 적은 것이 유명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 하나님 주신 동산/ 이 강산에 할 일 많아 /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 곧 금일에 일 가려고 / 누구가 대답을 할가 /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 삼천리 강산 위해 /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1930년대 가장 널리 불려졌던 찬송가의 하나인 이 찬송은 일제말기에 총독부가 찬송가 가사를 뜯어 고치라 했을 때 이 찬송은 아예 삭제당하였고 금지곡이 되었다. 남궁억은 가사문학가로도 또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나라잃은 슬픔과 고뇌를 노래로 표현하였다. 그의 가사는 주로 4·4조이며 이것은 당시 민중들의 노래가락 이었다. 또 어떤 것은 미국의 흑인영가나 민요곡에 맞추어 부르도록 가사를 지었다.

일제의 경제침략의 결과로 대대로 농사짓던 이 땅의 사람들이 땅을 빼앗기고 남부여대해서 만주로 길 떠나는 비참한 현실을 바라보며 지은 노래가 “시절 잃은 나비”이다.

“일락은 서산에 황혼이 되고 / 바다와 온 우주는 캄캄하는데 / 옥토를 떠나서 어데를 향해 / 정처없이 어데를 향해 가느냐 / 애닯다 이천만의 고려 민족아 / 너의 살 길 바이없어 떠나가느냐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을 / 누구르 주고 자꾸만 떠나가느냐 / 정든 산천 고국을 등에다 지고 / 애닯은 눈물방울만 연해 뿌리며 / 두만강 푸른 물결 건너서 가는 / 백의의 단군민족 내 말 들어라

무궁화의 화려한 금수강산은 / 우리들의 소유인줄 너도 알건만 / 의식주의 핍박을 바이 못잊어 / 주린배 훔켜 쥐고서 떠나가느냐 / 너희의 정경이야 차마 가긍하다 / 그러나 낙심말아라 고려 민족아”

농촌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집 떠나는 농부들을 바라보는 남궁억의 가슴은 아프기만 했다. 그러나 절망을 하고만 있을 수 없는 것. 이 땅의 혼과 역사를 지키고 가르치는 것으로 남은 삶의 모든 것을 바쳤다.

보리울 모곡학교 마당에서는 백발에 하모니카를 불며 아이들과 뛰노는 노인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하모니카 할아버지’란 별명을 들으며 자신이 만든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 동요풍의 ‘조선의 노러도 그중의 하나이다.

“금수의 강산에서 우리 자라고 / 무궁화 화원에서 꽃피려 하는 / 배달의 어린 동무 노래 부른다 / 세상의 부러울 것 무엇이냐 / 라리랐다 라라 라리라리라 / 라리랐다 라라 라리라리라”

그에게 있어 이 땅은 ‘금수강산’이고 ‘무궁화 동산’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이 담긴 땅이었다. 소중하게 아끼고 지켜야 할 땅이었다. 그래서 자기 터밭에 무궁화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묘목 모양이 비슷한 뽕나무와 섞어 심었다. 친히 지게를 지고 거름을 지어 날랐다. 조선의 혼을 키우는 심정으로 무궁화 묘목을 가꾸었다. 1933년 일경이 모곡학교 교사를 체포하고 무궁화 사건을 터뜨렸을 때 강원도 경찰부에서 주문형태로 캐내어 간 무궁화 묘목이 7만그루나 된다고 밝힌 것을 보면 보리울 전체가 무궁화로 덮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강을 회복한 후 곧바로 우리 역사정리에 착수했다. 1924년에 <동사략>을 만들었고 1929년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이야기체로 쓴 <조선니약이>를 만들었다. 이 책들은 미농지에 20-30부를 인쇄해 모곡학교 선생이나 가까운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만든 노래가 금지곡이 되었던 것처럼 그가 쓴 책도 금서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살던 시대가 남에게 빼앗긴 시대였고 그가 살던 땅이 남에게 차압당한 땅이었기 때문다.

그럼에도 그같은 현실을 거부하고 무궁화를 심고 이 땅의 역사이야기를 썼다. 보리울은 무궁화 마을로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리울의 주인공 남궁억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 청년들이 홍천뿐 아니라 멀리 서울에서도 찾아왔다. 정주의 오산학교나 선천의 신성학교만큼 크지 못했지만 홍천의 모곡학교는 민족주의 학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1933년 4월, 감리교 동부연회가 춘천에서 열렸다. 모곡교회 담임자는 30대 초반의 유자훈 전도사였다. 시베리아 불라디보스톡에서 성장했던 민족주의 사상가로 1930년부터 모곡교회를 담임하며 남궁억을 돕고 있었다.

그는 연회기간중 십자가당이란 비밀 지하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1년도 못되어 발각나고 말았다. 1933년 11월 4일, 모곡학교를 8명의 경찰이 덮쳤다. 안식교 잡지 판매원으로 가장하고 남궁억에게 접근, 상당한 정보를 입수한 밀정 신현규를 앞세운 경찰은 남궁억이하 교사들을 연행하였다.

남궁억과 관계있는 많은 이들을 연행하였고 모곡교회 유자훈도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무궁화 묘목 보급 및 불온사상 선전에만 국한시켜 사건을 수사하다가 우연히 모곡학교 교사 김복동의 일기장에서 ‘십자가당’의 단서를 발견하게 되어 수사는 확대되어 이미 체포된 유자훈 전도사를 비롯해 남천우 목사, 이윤석 전도사, 유진복, 김경환, 김재인 등이 체포되었다. 모두 남궁억에게서 정신적인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자들이었다. 홍천 경찰서는 큰 건수를 올렸다 싶어 사실 이상으로 확대시켰고 직접 관련이 없는 인물들로 마구잡이로 체포하였다. 유자훈이 시베리아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십자가당이 공산주의 색채를 띤 좌익 불순단체라고 선전했다. 이 사건이 경찰의 허위조작과 과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날로 드러나 1935년 1월에 있은 경성지방법원 판결에서 남궁억은 집행유예, 유자훈, 남천우는 1년6개월, 김복동은 6개월형량을 선고받았다. 비록 집행유예로 풀려나기는 했으나 미결수로 15개월을 경찰서와 형무소에서 지내기란 70노인이 된 남궁억에겐 큰 시련이었다. 체제에 협력하라는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았기에 고통이 더 심할 수 밖에 없었다. 보리울도 쑥밭이 되고 자신의 혼이 담긴 모곡학교는 일본식 공립보통학교로 바뀌었고 목회자가 잡혀간 모곡교회도 폐쇄되다시피 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남궁억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져 외롭고도 긴 투병생활이 4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끝내 회생되지 못하고 1939년 4월 5일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목 밑에다 묻어서 거름이나 되게 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비록 그가 산 시대가 어둠의 시간, 그가 디디고 산 땅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땅이었으나 차마 사랑을 버리지 못한 채 부둥켜 안고 온갖 사랑을 퍼부었다.

아마 짝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푸른언덕

                                                                                                           이덕주(목사, 교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