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부부는 요즘 바쁘다. 유사 이래 3월에 농사꾼이 바쁜 것은 새로울 것이 전혀 없지만, 이들 부부에겐 요즘 특별한 일로 바쁘다.

전통적인 농사방법으로는 해빙되는 3월이 되어야 밭 갈고 거름 주고 씨 뿌리는 것을 시작하지만, 이들 부부는 벌써 한 달 전부터 씨앗을 뿌려 모종을 만들었고, 이것을 다른 모판에 이식하느라 바삐 일하고 있는 중이다.

	▲ 아내 서윤경 씨는 지금 다른 비닐하우스 한 동에서 마을 아줌마와 함께 모를 이식하고 있는 중이다. 다른 모는 벌써 키가 훌쩍 자라 버린 것이 눈에 들어온다.

"요즘 대세가 비닐하우스를 3중으로 하는 것이에요.”

비닐하우스 농사 10년 동안 2중으로 잘 버텨오다 요즘 대세(?)를 따라 3중 비닐하우스 설치 작업을 최근에 끝낸 정운길(안성 양성면 덕봉리) 씨의 말이다. 3중이라고 하니까 딸랑 비닐만을 세 겹으로 덮는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철봉으로 된 하우스 대를 세우고 비닐을 입히는 것을 비닐하우스 한 동에서 자그마치 세 번을 한다는 이야기다. 큰 상자 안에 작은 상자, 작은 상자 안에 또 더 작은 상자를 상상하면 되는 그런 구조를 말하는 게다.

3중으로 비닐하우스를 설치하는 이유는 열손실을 최대한 줄여 비닐하우스의 실내온도를 조금이라도 상온으로 유지해 연중 장기간 오이를 출하해보자는 것이다. 3중으로 설치해도 남들보다 일찍 오이를 출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상온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으니 오이 재배기간이 길 수 있다는 농사전략이 들어가 있다.

지금부터 오이를 심는 것은 ‘봄 오이’이며 4월25일 경에 처음 출하하고 7월 20일 경에 마지막 출하가 된다. 약 3 개월간의 ‘봄 오이’ 농사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나면 바로 다음 농사인 ‘가을 오이’농사를 준비해야 한다. ‘가을 오이’는 8월 중순부터 시작해서 9월 중순에 처음 출하하고 12월 중순까지 출하가 계속 된다.

그러고 보면 옛날처럼 ‘농한기’와 ‘농번기’의 구분이 따로 없다. 모든 농사를 야외에서 짓던 옛날에야 날씨가 추워지는 늦가을부터 겨우 내내 농사를 못 짓는, 그래서 놀 수밖에 없었던 농한기는 이젠 옛말인 셈이다. 그래도 굳이 농한기가 있다면 1월 한 달이다. 1월 한 달이 지나고 나면 또 한 해 농사를 준비해야 하니 말이다.

	▲ 남편 정운길 씨는 요즘 바쁘다. 3중으로 친 비닐하우스를 계속해서 손보기 때문이다. 또한 이맘때면 마을사람들끼리 비닐하우스를 돌아가면서 치는 '품앗이'를 해야 하기에 더욱 바쁘다.

그리고 남편 정운길 씨는 안성농민회 사무국장이다. 소위 농민운동을 하는 시민사회운동가다. 그러니까 농사만 들입다 짓는 사람이 아니라 이 나라 농업의 현재와 미래를 염려하며 조직적으로 노력하는 농민운동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농사꾼 되기’ 이력도 신세대(?)답다. 농촌 출신이 아닌 이들 부부는 땅 한 평 없이도 농사꾼이 되었다는 것이다. 11년 전 서울에서 농민운동을 하던 이들 부부는 결혼을 하자마자 무작정 지금의 안성으로 내려와 농사를 시작했던 것. 물론 지금도 모두 소작농이긴 하지만, 그래도 비닐하우스 농사 800평, 논농사 13,000평 등이 그들의 임대 농지가 되었으니 그동안의 땀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닌 게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농민운동이 이젠 운동 차원이 아니라 엄연히 그들의 생존수단이 되었다. 11년 전만 해도 ‘농사의 농’자도 모르던 농사 문외한 부부가 이젠 전형적인 시골 농사꾼이 다 되어버린 게다. 무엇보다도 소득 증대가 최대 목표인 이 시대의 평범한 농민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야무진 꿈을 접은 것은 결코 아니다. ‘농민이 대접을 받는 사회, 우리의 먹을거리가 대접을 받는 사회’를 향한 꿈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농민 운동의 이론과 실제를 겸비하고, 국제 정세를 읽어내는 안목과 농촌의 미래를 점치는, 그러면서도 농사 자체를 사랑하며 지어가는 신세대 농사꾼 부부라고 하는데 누가 물음표를 달 것인가.

봄이 아직도 만연하지 않은 3월 7일의 봄날 들녘, 아내 서윤경 씨는 하우스 한 동에서 모종을 옮기고 있고, 남편 정운길 씨는 다른 비닐하우스 한 동에서 설치된 비닐하우스와 트랙터를 손보느라 춘삼월의 하루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