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 > 새패러다임신학
기독교 반 지성성의 극복마이클 호튼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1996)에서 현재의 미국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감정, 다름아닌 감정”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종교는 주관적이며 사적인 것이 되어 버렸으며
김주범  |  kjbjohn@yahoo.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08년 01월 09일 (수) 23:02:33 [조회수 : 1790]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기독교 반 지성성의 극복 

① 기독교의 반 지성성

마이클 호튼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1996)에서 현재의 미국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감정, 다름아닌 감정”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종교는 주관적이며 사적인 것이 되어 버렸으며 개인적이다. 이는 인간 중심적이고 실용주의적이며 소비지향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경향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189)고 말합니다. 현재 기독교는 호튼의 말대로 내적자아의 만족을 위한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기독교의 건전한 신학이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영적체험을 통한 신비적 만족만 있으면 그것이 정답입니다. 개인의 책임성과 사회공동체와 인류공동체의 존립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누가 뭐라해도 자기 좋은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주장할 진리가 없습니다. 모든 주장이 옳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호튼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나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들추고자 합니다.  

② 무지(無知)가 앎(知)이다 ?

우리나라 속담에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른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것을 얼버무리기 위해서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칼빈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무지(無知)가 앎(知)이라고. 칼빈은 무엇을 얼버무리기 위해서였을까요? 「예정」이란 그의 궤변에 대해서 였습니다. 구원받을 자와 유기될 자의 예정에 대하여 그 정당성 입증을 요구하는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칼빈도 적합한 설명이 없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답변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정의 문제를 탐구함에 있어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가장 깊숙한 곳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며, 거기서 그가 안심하고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돌진한다면, 그는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기는 커녕 헤어나올 수 없는 미궁에 빠지고 말 것이다. 대개 하나님이 그 자신속에 감추어 두시기를 원하시는 것들을 인간이 아무 탈 없이 꼬치 꼬치 캐낼려고 한다든지, 또 하나님은 그 속에서 또한 그의 완전하심이 나타나 보이도록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배하게 되기를 기뻐하시는 그 숭고한 영원한 지혜를 인간이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는 무지(無知)가 앎(知)이라는 이 일에 있어서 무지함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도리어 우리는 아는 것을 열망하는 것이 위험할뿐더러 어리석으며, 더욱 치명적인 그런 지식 탐구하는 일을 기꺼이 삼가도록 하자. 여기에는 우리를 파멸로 곤두박질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추측(推測)을 크게 두려워 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기독교강요. III:xxi:1,2.). 

③ 무지가 앎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논리가 정당하지 못할 때 얼버무리기 위한 논법중의 하나가 의미없는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임기응변의 속임수입니다. 어떻게 무지(無知)가 앎(知)이 될 수 있습니까? 칼빈이 이 말을 한 것은 그가 지적한대로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알고자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파멸로 이끄는 지식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에서 그렇게 말하였으나 사실은 그의 「예정」설이 하나님의 성실과 사랑과 공의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질문자들의 입을 막기 위한 억설이었던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앞뒤가 모순되지 않게 설명할 수 있었다면 그 말을 하였겠습니까?

칼빈의 이말을 기독교 신학자들이 이상한 말을 해놓고 그 말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도피처로 얼마나 많이 사용합니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면 무조건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것이니 괜히 섣부르게 알려하다 이상한데로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도 없이, 적당한 설명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설멸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적합한 이해를 구해야 합니다. 자기네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를 알려고 연구한다면서 떠들은 말이 하나님과 인간을 얼마나 이상하게 만들어 놓았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으면서, 자기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역이니 감히 침범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들만 말씀을 연구하고 탐구할 자격증이 있는 것처럼. 자기들이 인간이 알아할 지식과 알지말아야 할 지식의 경계선을 그어 놓습니다. 그들 자신이 곧 하나님 노릇을 합니다. 

④ 성경도 「알지말라」 하는가?

정작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칼빈처럼 이래저래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합니까? 오히려 성경은 분명히 알고 지식을 가지고 믿으라고 합니다. 다음의 두가지만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 하나님을 대적하는 열심

하나님은 지식없는 열심을 원하시지 않습니다(롬10:1-3). 바울 자신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어던 것 만큼이나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고 제자들을 핍박하고 성도들을 잡아죽이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어야 합니다. 바른 지식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알기를 원합니다(엡3:18-19).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앎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되는 비밀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될 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해주시기를 원하다(빌1:9).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그리스도의 지식에까지 이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골3:10,벧후3:18).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비밀과 지혜를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곳에서도 우리가 알기를 제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칼빈처럼 우리가 알지말아야 할 것을 지정하거나 선을 긋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기 위해 성경의 편지들을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계시로 자기에게 알게하신 것을 우리가 읽어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엡1:9,3:3-4). 그는 생명을 걸고 복음의 비밀을 알리려고 하였습니다(엡6:19).

 ⑤ 기독교 지성의 파산

이로 보건데 칼빈은 본 의도는 아니었겠만 기독교 타락의 대부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구교회와 사회가 절망의 늪에서 헤매이게 되었고 그 물결이 우리나라도 삼켜가고 있습니다. 이 신학과 신앙이 누구의 작품입니까? 바로 칼빈입니다.

타락은 지식이 잘못되거나 지식이 없는 무지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우리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지성적 추구를 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지성이 파산된 것은 바로 칼빈의 자기 변호를 위한 궤변에 영향받은 바가 큽니다.

칼빈의 궤변은 모든 인간들의 존재이유를 상실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전지전능의 주권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정」이라는 궤변을 만들고 그 궤변에 덤비지 못하도록 자기 궤변을 하나님의 영역으로 신격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칼빈의 예정교리는 운명론과 수동주의, 그리고 자아상실로 인한 주체성의 파산을 가져왔습니다.

 인간논리의 최고 구성요소는 6하원칙입니다. 이 6하원칙을 구성시키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창조된 인간도 6하원칙을 가지고 논리를 만드는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그분이 하신 일에 논리와 합리가 없겠습니까? 인간은 6하원칙을 구성할 수는 있어도 정당하지 못하게 구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논리와 합리는 온전 완전 무흠합니다. 때문에 인간과 피조물에 대하여 하나님의 논리와 합리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아직 알지 못할 뿐이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알면 안될 것으로 정하신 것처럼 말하는 자들이 사실 오늘날 기독교와 세계절망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무지가 미덕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실상 지푸라기 신학과 세계관을 구축하여 왔습니다. 때문에 21세기를 맞는 이 시대에 외칠 메시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설득할 논리가 없는 것입니다. 영세전에 모든 인간의 삶과 운명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미 작정되어 있는데 그들에게 더 이상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무슨 말을 한다면 그것이 논리적 모순인데.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의 타락을 기뻐하셨으며,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지옥 보내면서 그것이 자신의 절대주권을 나태내는 것이라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누가 제정신이라고 생각합니까? 미쳤어도 한참 미쳤지.

 ⑥ 우리의 소망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다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계속 알려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6하원칙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합니다. 6하원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왜」입니다.

하지만 이 「왜」가 인간의 것이 되면 비록 논리는 성립된다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의 궤변이 됩니다. 진정으로 정당한 논리와 합리는 하나님의 「왜」가 인간의 6하원칙을 다스리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왜」로 성립된 6하원칙으로 구성된 지식이 오늘날 자아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을 책임있는 한 존재로 성립시켜 줄 것입니다. 지성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자의 지식에까지 이르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 처럼 우리위에 군림하는 궤변자들의 미친 소리를 제거하고 설득력 있는 이해를 추구하여 인간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무지를 깨야합니다.

인간은 지식을 발견하는 것 만큼 발전합니다. 도덕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서는 말입니다. 과학문명은 발전하는 반면 인간성은 상실되어가는 데, 이것은 인간존재의 자아주체성의 상실로 인한 것입니다. 만사에 자신이 책임지는 확고한 주체성있는 인간이라면 상태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믿는 자이든 믿지않는 자이든 운명론속에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다분히 하나님에게 있다는 무의식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아 주체성을 발견하는 것만큼 그의 삶에 책임을 지고 삽니다.  

공중을 나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하기 그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도전 끝에 지금은 우주선이 우주공간 곳곳에 이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지식에까지 추구하는 생각하는 존재가 될 때 책임있는 개인, 사회, 국가가 될 것입니다.

김주범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008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