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해방의 빛에서 본 전통 교리 재해석(3)
 - 대속적 그리스도론, 부활신앙, 하나님 나라, 종말론, 구원과 인간화 

                       
11. 예수의 십자가 죽음(대속적 그리스도론)

예수는 관념적 혹은 지적 차원의 교사나 설교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 논하기만 하지 않고 그것을 실천했다. 예수의 인간애는 인류 일반에 대한 막연한 추상적 태도가 아니었다. 예수는 그 누구라도 혈통, 인종, 국적, 계급, 가문, 지능, 업적 등 어떤 자격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대했다. 이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인간관계라는 의미에서 예수는 모든 사람을 사랑했고 온 인류와의 연대성 속에 살았다. 또 바로 이 때문에 예수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다른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과 한 편이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 쓸모 없는 사람들과의 연대성이야말로 온 인류와의 연대성을 실천하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는 사회를 기층 민중으로부터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애썼다. 예수가 종교적 경제적 평등주의라는 관점에서 의도적으로 결합시킨 주술과 식사, 기적과 식탁, 값없이 베푸는 동정과 열린 공동식사는 유대교의 엄격한 정결규정들과 더 나아가 계급체제를 구축하고 차별을 지속시키려는 문명의 영원한 속성에도 도전했다. 이것은 정치혁명을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수준의 사회혁명을 낳았다.

예수의 활동과 메시지는 철저히 정치적이며 권력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예수의 활동의 정치적 차원은 파생적이거나 우연한 게 아니라 그의 활동의 본질이며 핵심이다. 그것은 예수가 선포한 정의의 구체적 요구, 즉 권력과 소유의 재분배, “희년”(喜年)의 요구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1세기 팔레스틴에서 성전은 죄의 용서를 독점하는 기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전의 독점권에 대한 거부, 즉 “우리는 성전이 불필요하다. 우리는 성전 없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성전 반대 선언이다. 우리는 ‘예수의 피에 의한 속죄론’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신화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했다는 교리는 그분의 죽음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우리에게 있어 궁극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그분의 삶과 죽음이지 그것을 설명하는 해설이나 교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와 끊을 수 없는 연관이 있다는 진리”가 중요하지 그것을 설명한 “대속의 교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설교했던 영적이고 경제적 평등주의가 종교적 및 정치적 차원 모두에서 불평등하고 후견체제적이고 심지어 억압적인 모든 것의 소굴인 성전에서 폭발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가르침과 치유와 공동식사 선교를 통해 말하고 실천한 것의 구체화다. 그래서 병사들이 즉각 그를 체포하기 위해 움직였다. 예수는 유월절 축제 기간 중에 체포되었으며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달아났다.

지금까지 십자가는 정신적으로, 순전히 개인주의적으로 해석되었다. 십자가는 종교적 상징이 아닌 실제적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십자가는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처형하는 로마제국의 고문 수단이었다. 이 세상에 정의를 수립하려는 사람들은 수난 당한다. 예수의 수난사에서 우리는 국가 권력이 십자가처형을 어떻게 써먹는지 읽을 수 있다. 주모자들에 대한 잔인한 형벌, 혁명분자 집단 파괴, 동조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협박, 이 세 가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십자가는 안성맞춤이었다.

예수는 종교적 십자가(cross)가 아니라 정치적 십자가처형(crucifixion)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려면 교리나 신학을 섣불리 들이대지 말아야 한다. 교리나 신학으로 채색되기 이전의 역사적 예수의 삶의 모습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역사상의 한 시대를 살았던 예수를 교리와 신학으로 함부로 재단하려 드는 것은 살아 숨쉬는 예수의 생동하는 삶을 일정한 틀에 가둬 질식시키는 비극으로 귀결된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고백했다. 그렇다. 예수는 “세상 죄” 때문에 죽으셨다. 예수는 태초부터 각본이 짜여진 대로의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를 한치 오차도 없이 성취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린 게 아니었다. 불의한 세상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세상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서 십자가처형을 당했다. 예수라는 빼어난 자유와 정의와 사랑과 평등의 주창자를 십자가처형이라는 끔찍한 방법으로 제거하려 들었던 데서 세상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확연히 드러났다.

오늘날 십자가는 자신의 삶에서 매맞고 조롱받고 배척당하고 국가권력이 합법화하거나 묵인하는 불의한 재판으로 살해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가장 분명히 이해된다. 십자가를 명상할 때 우리는 철저한 현실주의가 필요하다. 역사 참여가 없이는 역사에 정확하게 자리매김된 그 사건을 올바로 인식할 수 없다.

12. 부활신앙

예수의 십자가처형은 예수 개인의 운명을 말하는 게 아니라 민중사건이다. 그 사건에 가담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모른다. 십자가 사건을 핵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정치적 성격과 그 민중사건성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부활경험 역시 예수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인식되지 못한 사건이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현재화하는 경험이다. 예수의 민중들은 예수의 죽음을 비참한 패배로 여기지 않았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예수의 민중들은 예수가 이미 종말 곧 세상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왔다고 믿었다. 바로 이런 신념이 부활경험이다.

기독교 신앙 자체는 남부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의 첫 추종자들 사이에 이미 존재했었으며, 그가 처형된 후에 시간과 공간을 따라 이어지고 발전하고 퍼져 나갔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약해지기는커녕 더 강해진, 하나님 나라에의 이 지속적 체험이 바로 부활신앙이다. 부활절 일요일에 발생한 일은 오후 한나절 혹은 일년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가 죽던 날로 신앙을 모두 잃고 행동을 완전히 멈추었는가? 아니면 그와 반대로 그들은 예전처럼 능력을 부여받고 있다고 생각했는가? 그들은 부활이 아니라 중단되지 않는 영원한 현존을 이야기한다. 갈릴리의 농민 추종자들은 예수의 지속적 현존을 접신 상태에서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체험했다. 예수의 현존과 능력 부여는 공동체가 그에 “관한” 성서를 공부하고 또 빵과 물고기의 식사를 함께 나눌 때 공동체 안에서 지속된다. 즉 예수가 처형되기 전부터 그를 믿었던 사람들이 처형 이후에도 그를 계속해서 믿었다. 그러므로 부활절은 새로운 신앙의 출발이 아니라 옛 신앙의 지속과 관련된다. 예수의 모든 제자들이 예수가 처형된 성금요일에 그들의 신앙을 잃었다가 부활절 일요일에 현현 체험을 통해 신앙을 회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끔찍한 단순화다.

부활은 문자적으로 몸이 무덤 밖으로 나온다든지 혹은 빈 무덤이나 환상과 무관하다. 그 모든 것들은 신앙을 표현하는 극적인 방법들이다. 부활의 핵심은, 하나님의 능력이 이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예수를 통해 그를 믿고 경험하는 모든 사람에게 현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발생한 일은 십자가 처형 이전에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이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다. 부활절은 새로운 신앙의 시작이 아니라 옛 신앙의 초지일관(初志一貫)에 관한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살아 있었고, 현존했고, 계속 그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유일한 신비이며 유일한 기적이었다.

부활은 십자가를 무효화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의 사랑과 정의의 실천을 확증한다.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내놓는” 대속적 사랑의 실천이 죽음을 통해 궁극적 완성에 이른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주의(主義)의 승리에 대한 주장이 아니다. 죄 없이 당하는 고난과 자기 희생적 사랑이 역사적으로 그리고 역사를 넘어서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는 신앙고백이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구성원들의 생명을 보호할 것을 요청한다. 주님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은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생명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 죽음을 통과하며 나아가는 해방실천이 없이는 생명을 천명할 수 없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역사에서 마지막 말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 예수의 부활에 담긴 메시지다.

13. 하나님 나라

예수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라는 새 지평을 가리키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 채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며 짖는 개와 같을 때가 참 많다.

예수는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소서”라고 기원하지 않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원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역사 한복판에 ‘온다’는 뜻이다. 신약성서에는 ‘천당’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이 없으며 천당에 들어간다는 표현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들어가는’ 현실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저 세상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무관한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일이다.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독점 사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몸의 차원에서 시작했으며 치유와 식사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 즉 영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을 모든 사람이 계급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공동체로 나타났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 즉 당대에 법적으로나 의례적으로나 배척받는 부류들과 교제하고 함께 식사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뜻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하나님 나라 도래를 선언하는 것은 인간의 권력 독점을 끝장내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어디까지나 정치 현실과 직결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 및 억압받는 이들과 손을 맞잡음으로써, 그리고 가장 곤경에 처한 이들의 얼굴에서 주님을 발견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 한다. 그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집요하게 버티고 있는 구조적 폭력과 다양한 형태의 물리적 폭력, 또한 무차별 억압을 조장하는 폭력의 난무로 이 시대에 우리 가운데 활개치는 죽음의 한복판에서 생명의 표징으로 존재함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는 우리의 공동 노력으로 이미 지금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그 나라는 자연과 인간 모두의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해방, 개인적 범죄와 사회적 범죄에서 벗어나는 해방, 하나님과 인간의 친교, 인간과 인간의 친교, 인간과 자연의 친교를 지향한다.

하나님 나라는 머나먼 이상이 아니다. 그 나라는 비록 새싹과 같지만 이미 작용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변혁시킨다. 우리에게 신앙이 있는 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 안에서 세력을 뻗친다. 신앙을 통해 우리도 부서진 세계를 치유하고 화해시키는 도구가 된다.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보유한 정의의 행동대원들이 된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와 이상향이라는 두 차원을 갖는다.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는 정의, 재산의 나눔, 인권 존중, 사회적 형제애가 있는 곳에서 역사적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는 항상 더 많은 정의, 더 많은 나눔, 더 많은 인권 존중, 더 많은 사회적 형제애가 가능한 이상향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주체적 활동과 동시에 인간의 모든 역사적 기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선물에 의한 역사의 근본적 변형에 대한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상황은 충분히 긍정적이다. 이 상황은 더 이상 변화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게 하며, 우리를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에로 개방한다.

14. 종말론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가까운 장래에 직접 역사에 개입할 것을 기대했던 종말론적 예언자였지만, 예수는 이 세상이 조만간 끝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예수가 진정으로 가르쳤을 20여 개의 비유들 가운데 어느 것도 이 세상의 종말 혹은 그 종말에 따르는 충격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예수에게 하나님의 통치는 일반 역사가 끝난 다음에 올 어떤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비전에 따르면, 당시 옛 시대는 끝나고 새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확신은 매우 새롭고 비상한 방식으로 그를 바꿔놓았다. 요한계시록의 묵시사상은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예수의 확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처럼 표준적인 묵시종말적 희망이 예수의 제자들의 손에 의해 복음서들 속에 삽입된 것은, 그의 제자들 중 일부가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예수의 미묘한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비전의 강렬함을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예수가 이미 결별했던 표준적, 정통적 종말 시나리오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곳에” 계신 분으로 생각하고, 구원을 (지금이 아닌) “언젠가 다른 때에” 이뤄질 것으로 생각하며, 구원을 받으려면 (즉 천당에 가려면) 사람들이 해야 할 뭔가가 있다고, 최소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정말 충분할까?

예수의 종말론적 선포를 사회 체제의 전복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요소인 가치관이나 문화의 전복을 겨냥한 가르침으로 환원시킴은 그의 종말론적 선포의 급진성을 기껏해야 비인습적 삶의 지혜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희석화시키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쟁취한 “새 인간들”로 이루어진 “새 사회”다. “새 인간”은 해방투쟁에 가담하는 인간, 연대하는 인간이다. “새 인간”은 개인적 물욕과 집단 이기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간, 투쟁 중에도 관상과 기도에 몰입할 줄 알고 민중 속에 민중 자신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관조할 줄 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낯선 하늘과 땅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시작되고 이루어진다.

묵시사상은 현세를 부정하며 복수심에 근거한 사상이다. 묵시가 호소력이 있는 것은 그것이 이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항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시가 윤리적으로 절름발이인 것은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정의를 구하기보다는 다른 세상에서 바로잡혀지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내세에서의 상벌을 갈망하는 것은 조잡하고 감상적 형태의 이기주의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 가장 단순한 필요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던 나사렛 예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15. 구원과 인간화

우리는 진실로 인간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의 공동의 이상이며, 신앙인들에게는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고 신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으며, 인간을 왜소화시키지도 않고 하나님을 왜소화시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는 세련된 종교적 거룩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는 인간에 대한 순수하고 소박한 애정이 결여된 종교적 거룩함이야말로 참으로 가증스럽다고 여긴다. 예수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단순한 인간적 선”, 즉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직해야 할 인정(人情)과 타인에 대한 공감과 개방적인 친교와 인간 상호간의 용서 같은 소박한 가치들이다.

부활 공동체가 예수를 참된 인간이요 참된 신으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공동체가 예수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에서 신적인 거룩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복음서에서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인간적인 것을 매개로 하지 않는 신적인 것, 인간적인 모습을 상실한 신적인 예수는 신학자들의 발명품이지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는 아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분의 존재는 지속적으로 타자를 위한 존재였다. 인간-예수가 하나님 안에 머물면 머물수록, 그분은 그만큼 더 신화(神化)되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 실존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그만큼 더 인간화(人間化)되셨다. 우리가 무한자와 타자를 향해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인간화된 존재에 가까워진다. 타자에의 개방성은 인간 존재의 구원이 여기에 달려 있을 정도로 결정적 요건이다. 소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비유(마 25:31-46)에 따르면, 심판관은 모든 인간을 타자를 사랑하는 그들의 능력으로 헤아리실 것이다. 인간적인 사랑과 연대, 일치, 그리고 참된 인간적 성장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현존한다.

구원은 인간의 문제이므로 인간과 관계된 일체의 것, 곧 세상과 무관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일들 곧 종교, 교육,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에 대한 관심은 모든 신자들의 의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치 현상이다. 우리는 정치 영역을 벗어난 인간의 행위를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결국 정치적 의미를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