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다 재활용함에서 '좋은생각' 다섯 권을 건졌다. 평소에 기웃거리다 쓸만한 책이 나오면 단숨에 읽고 다시 내 놓곤 했다. 김성동의 '백색여인' 상하 권도 주워 읽다가 재미도 없고 아내가 저런 유치한 책을 읽느냐고 눈 가늘게 뜨고 힐난하는 바람에 던져 버리려던 참이다. 요즘 유행하는 이야기 책을 주워 들은 이유는 글쓰기 소재를 찾는 데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돈 주고 사기에는 아까워 이런 부류의 책은 재활용함에 버린 것을 챙기곤 한다.    

다섯 권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 보니 1999년도 5월 호에 누군가 정성껏 쓴 일기문이 눈에 띄었다. 밑줄을 그으면서 본문의 글들만 읽다가 가끔 흘낏 들여다 보면 느낌이 잘 드러나 있는 게 아닌가! 

그 책을 버린 사람으로 추정되는 정혜라는 여자는 누구일까? 그런데 혹시나 다른 책에도 일기가 있나 찾아보니 4월호부터 쓰기 시작했다. 주로 녹색 펜으로 또박또박 기록된 두 달치의 그 일기를 손에 넣고 이것을 나혼자만 읽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우리 동 사람 중에서 누굴까 궁금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글이 짧지만 애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여성의 심리가 고스란히 드러나 옛 연애 시절이 떠올랐다. 버린 것이지만 극비의 연애 편지라 주인공 이름은 살짝 바꾸었다.

남의 글을 훔쳐 보는 재미란 이런 것일까? 보통 일기를 보기도 힘든 일인데 여성의 일기, 그것도 연애 일기를 통채로 건지다니... 

작은일기 200년까지는 274일 남았습니다

'이미 4월의 시작이 지난 다음에 이 책을 받았지만, 여기에다도 쓰기로 했다. 현상아! 항상 힘차게 생활하고 이번 4월에도 너의 달이 되길 빈다. 파이팅!!'

이 일기는 1999년 4월 초에 썼나 보다. 이 책을 혹 현상이가 사 준 것일지 모른다.  약 4월 3일 쯤 받은  듯. 현상이란 사람을 '현상아~"라고 부른 점에서, 현상이가 자기보다 나이 어린 남자라고 짐작했다. 이분은 별도의 일기장이 있는 듯.  작은일기란 '좋은생각'의 하단부에 독자들이 30일치의 일기를 쓸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박스를 말한다. 여자 글씨로 4단 정도 쓸 수 있는 약 4cm의 공간. 건조체의 글씨로  보아 그녀의 성격은 차분하고 꼼꼼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기록이 담은  이 책을 왜 버렸을까 궁금하다.

혹 일기장의 주인은 2주 전 일요일에 이사를 간 106호 집 식구였을까? 그 집은 피아노 레슨을 한 중년 부인이 살았는데... 아니면, 그 주인공은 혹시 중하교 여 선생님은 아닐까? 혹 어린 제자를 사랑하는 이야기? 이크! 가슴이 벌렁거린다. 아닐 거야... 그분은 내 아들도 가르치신  분인데, 정녕 아닐 게야.

2005-08-18(목)
이일배

 

연애일기 훔쳐읽기-2

헤어지기 싫어

이일배 6_9@naver.com [조회수 : 16]

'작은일기 D-273' 에서 그 숫자가 처음엔 뭔가 했다. 서기 2000년에서 273일 남았다는 표시란 것을 4월 1일자 일기에서 알 수 있었다. 작은일기 D-273 '이 글을 읽으면서 정말 사랑이라는 단어가 위대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나도 언제쯤 이런 사랑을 남에게 베풀 수 있을까.... 어! 프로포즈 방법도 있네. 아저씨도 잘 읽고 배우세요. 아셨죠.' 글씨 검정색. 이 글은 1999년 4월 2일(금)에 해당하는 칸에 쓰였다. 여기에서 위대한 사랑이란 '초코우유'란 글 내용 같다. 어느 시골 할머니가 추운 겨울밤 먼 길을 가 초코우유를 사 와 감기 몸살을 앓는 손녀에게 먹였다는 훈훈한 이야기. 또 앞 페이지에는 '멋지게 프로포즈 하는 방법'도 소개되었다. 내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은 일기에 갑자기 등장한 '아저씨'란 인물 때문이다. 4월 1일자의 '현상이'와 동일 인물일까?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다. 그런데 프로포즈를 운운한 걸 보아 동일인일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이 책이나 이 일기를 아저씨란 분이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썼음도 읽을 수 있다. 흥미진진하다. 2005-08-18(목) 이일배 작은일기 D-272 '이런 사랑도 있는데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또한 너에게도 현상아! 나 노력할게. 그래서 너에게 진짜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어. 언제까지나 널 사랑해.' 1999년 4월 3일(토요일) 글씨 검정색. '이런 사랑'은 어느 재소자의 애인 이야기이다. '가장 행복한 생일날'이란 자주 면회 오는 애인에게 부러 냉정하게 자신을 잊으라고 돌려보냈건만, 생일날 다시 찾아와 케이크에 촛불을 켜놓고 생일 축가를 불러주었다는 글이다. '~아 사랑한다. ... 나 앞으로 열심히 살게.' 이 일기의 주인공도, 남자가 사랑에 대한 결심을 다짐해 주길 기원했을 것 같다. 작은일기 D-271 '너에게 '좋은생각'을 선물 받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널 떠나 보내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허전한 이 마음. 우린 언제 헤어지지 않을지...' 1999년 4월 4일(일요일) 글씨 녹색. 그러니까 현상이가 이 책자를 선물한 모양이다. 사랑 고백의 한 방법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여자들은 이런 선물을 좋아하는 것 같다. 선물을 받고 한껏 고무된 상태에서 그 남자를 돌려 보낸다. 연인끼리 헤어질 때 허전해진다. 품에 안긴 선물도 그 사람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 언제나 헤어지지 않을까 독백하는 그 심정 절실하다. 그런 간절한 바람도 결혼하고 나면 시들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미리 알아버린다면 인생은 너무 싱겁겠지. 작은일기 D-270 '나에겐 별로 즐겁지 않은 식목일이다. 함께 조금이라도 더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 갔으니까... 넌 뭐해? 아마도 체육대회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난 집에서 방콕. 과자 먹어야지.' 1999년 4월 5일(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쓴 것 같다. 마음은 어제의 데이트의 연장선에 있다. 공휴일이 마침 일요일이다. 너라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기에 식목일에 체육대회를 하는 걸까? 여자가 집안에 틀여박혀 있으면 아마 과자를 씹나 보다. 애인이 궁금해진 데다 입마저 궁금해지면 군것질로나마 그리움의 허기를 채워야 하나 보다. 글 전체는 녹색인데 '과자 먹어야지.'만 검정색. 글씨 색을 바꾸었다. 왜?

연애일기 훔쳐읽기-3

실직의 아픔을 견디며

이일배 6_9@naver.com [조회수 : 17]

작은일기 D-269 '좀 전에 치과에 다녀왔다. 이빨의 느낌이 약간 이상하다. 과자를 먹어도 영 신통치가 않으니 말이다. 넌 뭐하니? 하긴 오늘부터 실습이라 바쁘겠구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길 바란다.' 1999년 4월 6일(월) 과자를 먹을 때부터 알아 봤다. 이가 시원치 않은 여자구나. 초등학교 시절 건치아로 선발될 정도로 튼튼한 이를 가진 내가 중년에 약해지기 시작한 것은 즐기던 마른 오징어 때문이다. 지금은 그토록 좋아하는 오징어를 못 본체 한다. 이 아가씨는 과자 때문에 충치가 생긴 모양. 마취약에 취해 몰롱해진 채 남자 친구 먼저 생각하고 있다. 부모님 이야기는 전혀 없다.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는 딸들은 다 몹쓸 년 아닐까? 이가 아플 때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함께 고통을 느낄 수는 없어ㅏ도 곁에 있어만 줘도 마음 든든한 사람일 게다. 이럴 땐 애인이 없거나 이 아가씨처럼 있어도 와 줄 수 없을 때는 서러운 생각이 든다. 몇 년 전 내게도 갑작스런 풍치가 왔었다. 내가 근무하던 출판사의 제일빌딩 치과를 두고, 선생님에게 보응하겠다는 제자 장윤정의 남편이 운영하는 치과를 찾아 공덕동에서 서울 북쪽 끝으로 다녔다. 나와 함께 해 준 사람이 없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늘 고맙다. '넌 뭐하니?' 그가 무얼 하는지 몰라서 묻는 걸까? 물론 아닐 게다. 아마 그 남자는 교생실습을 하는 것일까? 혹 고등학생이라면 실업계 학생? 이가 아파도 몰라주고 관심도 없는 그 친구가 얄미웠을 게다. 속상해서 찔러 보듯이 '난 아픈 데도 넌 뭐하고 있었니?' 라는 투정 같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뭐니 뭐니해도 관심이다. 무심한 세상 남자들... 그 새에 여성들은 속으로 곪는 걸 모른다. 사랑에도 최선을 다하라는 이 메세지를 남자는 언제나 체득할 것인가? 이래서 연애는 비극이다. 작은일기 D-268 '오랜만에 시골에 내려왔다. 이상하게도 시골에 내려오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데 고생하고 계시는 엄마를 보면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파. 또 그런 엄마에게 힘이 되지 못해서 더 죄송하고...' 1999년 4월 7일(수) 검정색 글씨.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다. 연애할 땐 부모님 생각도 안 하는 딸이라고 폄하하자 마자 엄마 생각을 해 주는 일기라니... 그 시골이 어딜지 모르지만 아마 고향을 말하는 거 같다. 시골과 엄마 둘 다 아늑한 품같은 존재 아닌가? 딸이 엄마가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몸은 편해도 마음은 안타깝다. 엄마를 도와드릴 형편도 못 되는 처지라니 얼마나 죄송할까? 최근에 누님 댁에 가서 오랜만에 엄니 손맛이 나는 음식을 대접받았다. 나이 들어 생기는 외로움에 대한 푸념 끝에 시집 가 인근에 살면서 외손주딸을 데리고 매일 놀러오는 장녀 때문에 위로 받고 산다고 하셨다. 딸 없는 여자의 적막감은 누가 달래 주어야 하나? 남편이라도 딸 노릇 해 주어야 하련만...아내보다 더 심한 왕 잔소리꾼이라지만 아빠에게도 딸은 살갑다. 작은일기 D-267 '나 혼자 집에 있다. 엄마는 일하러 가시고... 난 한가로이 방에 누워 커피 한잔 마시면서 tv를 보고 있다. 다행히도 유선 방송이 나와 심심하지는 않다. 아저씨는 뭐하쇼?' 1999년 4월 8일(목) 주인공은 시골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다. 엄마는 일하러 가고 딸은 빈둥거린다. 시집 가고 나서도 친정에 오면 손 하나 까딱 않으려고 할 게다. 게다가 커피 한 잔을 음미한다. 모처럼 맞은 휴가를 탓할 수는 없다. 자기도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일터로 가야 할 테니까. 최근 우리 집에도 sky를 일부 시청하고 있다. 주로 집사람은 흘러간 드라마를 즐긴다. '신입 사원'과 '황태자의 첫사랑'을 좋아하는 아내는 그 시간에 맞추어 정신을 못차리고 달려온다. 어쩌다 나도 따라서 보다보면 언쟁이 붙는다. 논리에 안 맞는 이야기의 전개나 캐릭터를 두고 뭐라고 내가 평하면, 아내는 대뜸 혼자 보라며 역정을 낸다. 거기에 푹 빠져들어야지 따지고 들면 안 된단다. 유선 방송 앞마당에는 죽은 시간의 시체들이 널부려져 있을 것이다. '아저씨는 뭐하쇼?' 딱 한 줄... 애인이 떠올랐나 보다. 아저씨란 말은 딱히 꼬집어 낼 수 없지만, 친근감의 표시 아닐까 싶다. 작은일기 D-266 '혼자 계신 엄마를 뒤로 하고 광주에 왔다. 왠지 안스럽고 축은하게느껴진다. 또 나 자신에게 죄책감도 들고... 아무 힘이 되지 못한 나 자신. 언제나 엄마에게 힘이 될 수 있는지...' 1999년 4월 9일(금) 주인공은 전라도 광주에서 남쪽에서 더 멀리 떨어진 지역 사람 같다. 아마도 내 고향 장흥 사람은 아닐까? 문득 친근감이 더 든다. 고흥이나 해남, 완도, 강진 사람일 수도 있다. 혹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면, 섬이 고향일지도 모른다. 광주에 왔다는 게 광주에 살고 있을까, 아니면 광주 터미널에 들렀다는 것일까? 나는 인천 부평 에서 이 책자를 얻었기 때문에 필자가 인천 사람이라고 굳게 믿어 왔는데 낭패감이 든다. 어딜까? 그 엄마는 홀어머니일까? 사흘간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없고 어머니에게 보탬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아마 이 여자는 직장이 없거나 안정된 직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학생이 아니라면 4월 초순에 사흘간 휴가를 얻을 수 있는 직장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작은일기 D-265 '사무실에 다녀왔다. 오랫만에 시내도 나갔다 왔어. 그런데 힘이 나지 않는다. 송죽이(가명)가 집에 오라 했는데 그냥 가지 않았어. 그래서 집에 와서 그냥 잤다. 아무 생각 없이...' 1999년 4월 10일(토) 사무실이라면 다니던 직장 같다. 주인공은 그 직장을 그만 둔 듯하다. 송죽이란 인물도 처음 등장한다. 친구 같아 보이는데... 외롭고 힘들 때 친구가 불러 주면 고맙게 가는 게 정상인데, 그럴 기분도 아닌 모양이다. 실직의 아픔은 아무도 알아주거나 풀어 줄 수 없나 보다. 아무 생각 없이 자는 게 절망에 빠진 그녀로서는 최상의 방책일지도 모른다. 친구라면 이런 친구들 찾아가 깨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체념할 때 다가와 힘을 주는 그런 친구가 아쉽다. 작은일기 D-264 '한번도 널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지 못한 나인데 이 글을 읽으니 왠지 부끄럽다. 또 나 자신에게 실망도 되고.... 어떻게 해야지 나도 마음이 넓고 따뜻해질까? 정말정말 싫다, 나 자신이...' 1999년 4월 11일(일) 주인공은 '서랍속의 사랑'이란 글을 읽었다. 자취방에서 사는 사내에게 어느 날 애인이 혼자 들어와 방도 치워 놓고 바쁜 일이 있어 나가면서 식사를 거르지 말라는 편지를 남겨 두었다. 게다가 며칠 전 떨어진 양말을 버리려고 하자 슬그머니 챙겨들더니, 언제 그것을 꿰매고 수놓아 서랍 속에 개켜 놓고는 쪽지를 얹어 두었던 것. 사랑이란 이렇게 살가운 짓을 가능하게 하나 보다. 이런 특별한 사연의 글을 읽은 주인공에게 부끄러움과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교차했나 보다. "사랑의 표현은 사람맏 똑 같을 순 없어요." 라고 이 아가씨를 위로해 주고 싶다. "왜내하면 사람과 환경도 완전히 다르니까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요. 같아질 수 없는 남과 비교하여 세상에 하나 뿐인 자신을 제발 싫어하지 마세요." 이따금씩 스스로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는 내게도 들려주고 싶은 다짐이다. 2005-08-20(금) 이일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