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3월 초순.
“교수님, 안녕하세요. 2학년 조영이예요.”
“영이 학생, 전 의원 잘 계시지?”
“예.”
“그래, 일년 만에 내 방에는 무슨 일로 방문 하셨나?”
교수님 말대로 일년만의 방문이다. 과외수업 첫 봉급을 타서 교수님이 즐겨 피우시는 청자담배 2보루와 박카스 한 박스를 감사의 선물로 드린 후에는 강의시간과 유적지 견학에 가끔 뵙지만 개별적으로 교수실을 방문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저~, 신입생 중에 아르바이트 구하려는 여학생이 있는가 해서요? 아는 분이 부탁을 해서…..”
영이는 교수님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할까 봐 아예 먼저 선수를 쳐 버렸다.
“응, 있어. 시골에서 농사를 짓기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지방 여학생인데, 여고 때부터 전교 수석이며 올해 우리학과 수석으로 입학한 장한 재원이야.”

영이는 교수님에게서 교양학부 시간표와 신입생의 이름을 받고는 교수실을 나와서 희조가 공부하고 있을 도서관으로 향 한다. 봄을 맞은 교정의 식물들은 겨울에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청초한 모습을 보이건만, 올 초의 전 의원의 일과 변화된 자신의 모습으로 깨끗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 사표를 제출했지만, 전 의원이 일 년은 채워달라는 간곡한 부탁으로 신입생이 입학하기만 기다린 영이는 지난 겨울이 너무나 힘들었던 것이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비침이니라> (요일2:7~8)
“어제 하루는 지나가고 새로운 오늘 하루가 시작되는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여러분의 정성에 감사를 드립니다. 신약에는 새 계명, 새로운 것, 새사람, 새 언약, 새 예루살렘 등의 새로움이란 낱말이 많이 등장을 합니다.
이 구절은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은 같다고 말을 하면서 새 계명을 사용하겠다는 말을 하는데 새 계명은 참 빛 즉 기다리던 메시아의 탄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시절에 살고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어제 낮에 고등학교 친구가 저를 찾아왔더군요. 그는 모태신앙이고 열심히 교회에 봉사를 하는 믿음의 친구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 바로 사업을 시작하여 큰 돈을 벌었기에 저희들에겐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사업이 기울어 부도직전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게다가 부자청년처럼 율법을 다 지켰는데 이런 결과가 온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울먹거리더군요. 제가 벌어 산 집이 있다면 은행에 잡혀 도와주고 싶은 친구입니다.

저는 친구에게 실패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 것 같다는 냉정하게 들릴 말을 했습니다. 성공에 성공을 계속하여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으나 낮은 곳에서 떨어지면 재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100명 중에 일등은 한 명이라 나머지는 실패한 사람이면 인생은 더 고달파 집니다. 오늘 세상에 나가서 성령님과 함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결과는 새 계명일 것 같으나 옛 계명이며 땀을 흘리는 순간이 새 계명입니다.”


“사학과 2학년 오희조, 이쪽은 조영이. 만나서 반가워요.”
“남은주 입니다. 학과 선배님을 만나서 무지 반가워요.”
심한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점이 일년 전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했으며, 계속 수석을 차지했다는 교수님의 말에 초생달처럼 굉장히 새침데기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정반대로 훤한 보름달의 풍만함을 지닌 여자였다.
“교수님 방에 갔더니 은주씨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한다고 신청했기에 한번 만나보자고 했어요.”
지금 마당발 희조는 영이의 부탁으로 영이를 대신하여 은주를 테스트 하고 있는 것이다. 영이가 부탁을 하였을 때 그 좋은 자리를 왜 관두냐는 질문에 아직도 시원한 답을 못한 상태지만….

“가정형편으로 하루라도 빨리 구해야 하는 입장이구먼요. 선배 언니들이 좀 도와주세요.”
부잣집 맏며느리같이 듬직하고 복스럽게 생겼는데 성격은 솔직한 편으로 보였다. 항상 수석이라 새침데기인줄 알고 희조를 내 세웠는데 이정도면 자신도 테스트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주여고 졸업생이던데 고향도 전주예요?”
“집도 고향도 전주에서 시외버스타고 두 시간 가야 하는 진안군인데 부모님들은 농사지어요.”
영이도 자신이 있어 한마디 물어 보았더니 희조가 팔꿈치로 살짝 치는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고향을 물으면 민감해져 있는 지방색 문제와 집안까지 물어보는 실례를 범하는 것이다. 일년 전의 전 의원이 교수님만 믿고 아무 질문 없이 자기를 채용한 일을 생각하니 같은 학생으로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이도 지방에서 올라왔기에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영이도 지금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처음에 잘 선택을 해야 해요. 개 좋아 하나요?”
마당발은 역시 발이 넓으며 순발력이 있었다. 영이의 실례를 부드럽게 감싸고 풍월로만 들은 전 의원 집을 겨냥해서 키퍼와 밍키를 의식하여 질문을 한 것이다.
“개는 무지 좋아해요. 다리 한쪽은 자신 있게 묵을 수 있구먼요.”
은주의 요상한 대답에 희조와 영이는 한 손으로는 서로 잡고 한 손으로는 테이블을 두드리며 박장대소를 하자 은주는 물론이고 실내의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다. 지성을 논하자는 대학에 먹성을 강조하는 여인투사가 남자들을 제치고 학과수석으로 들어왔으니 75학번은 태풍을 몰고 올 것이 예상되는 것이다.

그날 오후 5시에 수업이 끝나고 개다리에 힘을 얻는 희조는 기습으로 사학과 신입생 여자들을 비상 소집하였는데 신입생은 3명, 총 5명이 학교 앞 통닭집에서 생맥주 파티를 열었다. 달변의 희조는 처음부터 남학생들을 휘어잡고 갈 것을 후배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자 후배들은 놀라는 표정이었으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잘 따라 주었는데, 여자들이 모여 처음부터 남자 길들이기 모의는 원죄의 일부분인지도 모를 일이다.

세 명의 신입생과 희조는 2차 단합을 위해 명동으로 가고 영이는 은주와 아르바이트를 마무리를 짓기 위하여 남아 있었는데, 저녁식사 시간이 된 것 같아 전기구이 통닭을 더 시켰는데 은주의 통닭을 먹는 솜씨로 보아 개다리의 이야기가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은주야, 면접 때 교수님이 왜 사학과를 택했나 물을 때 뭐라고 대답을 했어?”
이미 생맥주로 신고식을 하였기에 영이는 은주에게 말을 놓으며 질문을 하였다.

“나는 한국 사람이니 지나간 우리의 근본인 역사를 배워 세상의 근본에 사는 농촌 여성들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라고 했어요.”
역사 속의 여인을 추적하는 희조에 비해 범위는 좁으나 자신의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헌데 역사를 통해 자신을 알고자 하는 영이는 선두인지 꼴찌인지 혼돈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목표의식이 뚜렷한 여성이라 삼총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주는 영이가 건네 준 통닭 반쪽까지 다 먹은 후 생맥주로 조금 입가심을 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은주는 딸 5공주 집안의 장녀이며 아버지는 6.25전쟁 때 전투에서 왼팔을 잃은 상이용사이며 방랑생활을 하다 시골에서 농사만 지어 본 어머니를 만나서 곧 바로 결혼을 한 후로는 고향을 떠나 본적이 농사꾼이 되었다고 한다.
마당만한 논농사와 손바닥만한 밭을 가꾸면서 가축도 기르지만 가축은 수컷만 낳아 재미를 못 보았지만 아들을 낳기 위해 계속 쏟아 부은 딸들이 공부를 아주 잘 한다는 것이다. 은주는 아예 중학교 때부터 전주로 나와 중 1때부터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서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고 고2, 중3의 여동생들도 자신과 똑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에 온지 10일정도 되는데 독방을 쓰는 고향 선배 하숙방에서 눈치 밥을 먹고 있다며 싱긋이 웃는 은주의 웃음은 비굴하거나 슬퍼하는 쓴 웃음이 아니었으며 이것마저도 감사하며 이 정도는 서울 생활에서 당연히 겪어야 할 긍정적인 시련으로 받아들이는 긍정의 미소인 것이다.
은주와 헤어지면서 영이는 통닭 2마리를 건네주며 내일 오전10시에 가방을 챙겨 학교 정문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은주는 어떤 집인지 보수는 얼마나 주는지 조차 영이에게 묻지 않았기에 젊은 학생들에게는 아직까지 때묻지 않은 현실에 대한 순수한 시각이 밑천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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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운 빙판을 기어가며 겨우 통과한 셈입니다. 겨울이 지나면 모든 만물이 다시 출발을 하는 봄이 오는 것처럼 개천에 빠진 영이도 복덩이 은주의 등장으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일어서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지 못해 은주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지 못하는데(편집인이 고쳐 주시면 고맙겠음) 여러분이 알아서 분위기를 잡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운영자 註: 그대로도 좋습니다. 괜히 섣부르게 수정하다가 오히려 티가 될 듯합니다. 계속해서 [창녀구원론] 올려 주느라 정말 수고가 많습니다. 대단한 열정입니다. 덕분에 당당뉴스가 조금씩이라도 자리를 잡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