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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현하신 주 예수님을 뵈온 화가 형 이야기목사라면 신비 현상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용섭  |  lys9791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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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6월 07일 (목) 00:00:00 [조회수 : 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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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은 나에게 특히 의미가 있는 해이다. 그 해에 나는 나 스스로 하느님을 믿기로 작정했고-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사이비 신자이다-성탄 전날에 세례를 천주교에서 받았다. 세례받기 여러 달 전에 수유리로 왔고 교리를 배우기 위해 수유리 성당에 나갔다. 그런데 당시 성당 근방에 조그만 서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 서점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당시는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성당의 보좌신부님을 자주 찾아갔다. 신부님을 면담하고 나면 거의 그 서점에 들렀다. 그 서점에서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되었지만 그 서점이 사라지면서 그들과도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다. 당시 이들 중 현재 전주 모대학의 동양화 교수인 풋내기 화가 하나 그리고 한국신학대생 한 명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 화가는 나보다 나이가 위였고 그 신학생은 나보다 어렸다. 그 화가는 1978년 봄에 전주로 내려가면서 연락이 끊어졌고 그 신학생과는 1979년에 연락이 두절되었다.

나는 작년에 교회연합신문에 약 5개월 동안 정기적인 기고를 하였다. 기고 중 내 글에 대한 반응이 궁금해서 몇번 신문의 기고문 아래에 내 휴대폰 번호를 넣었다. 그랬더니 전화가 가끔 왔다. 하루는 그 신학생이 목사가 되어 작년 10월 나에게 전화를 했다. 신문의 내 사진을 보고 맞는가 확인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치홍이다. 나에게 기장성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을 그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 통화 중 자기는 춘천의 교동교회(기장) 담임목사로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화가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 화가의 이름은 잊었으나 그에게서 들으니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통화가 끝난 후 바로 그 화가에게 전화했다. 전화하니 그도 나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김치홍 목사와 만나게 되면 종종 내 얘기를 했다고 했다. 통화 중 그가 나보다 두 살 위인 것을 알게 되어 옛날처럼 "형"으로 불렀고 지금도 통화 중 "형"이라고 부른다. 김 목사는 나보다 두 살 아래라서 통화하면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른다. 서로 20대에 연락이 두절되어 50대에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이다. 어찌 보면 기적인 것 같다. 아직까지 김 목사와는 통화만 가끔 할 뿐 대면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11월 말 그 화가 형은 전주에서 서울 수유리까지 나를 보기 위해 왔다. 수유리에서 함께 술도 진탕 마시고 스탠드바에도 갔다. 스탠드바에는 수유리에 다시 와서 처음 갔다. 물론 돈은 그 형이 다 냈다.

요사이도 그 형과 자주 통화하는데 내가 전화하면 곧 바로 그 형이 전화해준다. 내 전화 요금을 아끼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전 통화 때 그 형이 나에게 "취중에 주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다. 잠시 들어보니 환상(환시. vision)이 아닌 발현(apparition) 같았다. 그후 여러번 통화하면서 자세히 물어보니 발현이 분명했다. 주 예수님과 함께 앉아 대화하면서 체온도 느꼈다고 했다. 나는 적지 않은 세월 신비 현상에 대하여 탐구했으므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조금 안다. "환상의 체험"을 하는 사람은 적지 않으나 "발현의 체험"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20세기 인도의 성자 선다싱이 발현의 체험을 했다고 들었다. 나의 노모도 과거 주 예수님의 환상의 체험은 적지 않게 했으나 발현의 체험은 없다. 요사이 그 형과 통화 중 나는 몇번 그에게 "예술가(화가)답게 형이 본 주 예수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했다. 그랬더니 주 예수님의 얼굴은 못 보았지만 본 것만이라도 사실에 가깝게 그리겠다고 했다. 이 형은 개신교 모태 신앙인이다. 그리고 아직 독신이다. 모든 발현에는 하느님의 뜻과 목적이 분명히 있다. 그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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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81.49.211.46)
2007-06-09 19:10:07
성서에 개인구원 이후 사회구원 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소?
성서에 사회구원, 개인구원 이란말이 있소?
그리고또, 개인구원이 선행되어야 사회구원이 있다는 말이 있소?
이것은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요.
그리고 그 개념은 어떤것을 배척하기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요?
이것은 만들어진 종교적 개념으로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성도들을 절름발이로 만드는 것이요. 그리고 그러한 개념으로 우리의 사고도 이분되어 사고하고 있소.
이건 가라지가 뿌려진 것이 올시다.

위와같이 신비를 체험한 사람은 개인구원받은 사람이고, 사회적으로 발언하며 그것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개인구원을 못받은사람일 수 있기 때문에 (철저히) 개인 구원에 관심을 집중하라는 말씀이오?

오히려, 개인구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기독교 사회적 책임에 대해 의무를 다 하려는 자들을 매도하는 현상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오.

"개인구원 먼저 그 후에 사회구원" 이라는 등식 자체가 우스운 등식이며,

오히려 말씀 하시려면

"개인회개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라고해야 옳습니다. 님께서는 그 논리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는 말씀에 다 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된다면, 느리게 걷든 빠르게 걷든 그것이 크게 나를 힘들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글이든, 어떤 고백이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하는 것이라 믿지만, 만일 그 글의 동기가 주님의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다른 수고들을 왜곡하게 될때 그 글이 아무리 감동적인 것이라 할찌라도 옳지 못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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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125.128.217.163)
2007-06-09 10:42:12
목사에게 4
답변을 어느 방향에서 해야 할지 모르겠소. 나의 신앙의 목적은 "성 삼위일체 하느님"께 매일 조금씩 더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오. 그러나 이것이 생각처럼 잘 되지가 않아서 문제라오. 내 신앙의 나침반은 성경(성서)과 고대교부들이라오. 그리고 나는 소위 "사회구원"을 부정하지 않소. 다만 이것은 소위 "개인구원"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즉 개인구원이 선행되어야만 한다는 말이오. 그러나 주객이 전도가 되면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하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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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82.126.165.17)
2007-06-08 22:57:07
이용섭님의 신앙의 방향과 촛점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 체험담을 감동스럽게 읽었습니다.
저는 아래 체험을 부정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신비 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용섭님은 저보고 "목사면 회개 하고 정신차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성서, 특별히 신약성서의 복음서의 담겨진 내용들의 진술들이 아래와 같이 그러한 체험이 중심 주제인가를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러한 체험으로 삶이 변화되는 것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진술들이 그러한 주제(신비)로만 다루어 질때
성서가 우리에게 추구하도록 하는 신앙의 내용들이 외곡될 수 있다는 말을 저는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쓰신 기사를 생각해 보면 "그분에게 나타나신 분은 참 예수님이셨다, 환시가 아니라 발현이었다" 라는 것을 강조 한다고 해서 그 기사 내용을 읽는 사람들 ("특별히 목사라면 신비현상을 잘 이해해야 한다")이 그 예수님 나타난것에 관심을 가지고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증언해야만 한다는 식의 강요로 보이는 기사로 느껴지기때문인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성서적 진술과 성서에서 요청하는 성도들의 신앙의 내용이 그러한 것이 되라는 것인가?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의 진술들은 그러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이땅에서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라는 부르심의 요청을 위한 예수를 중심한 사건의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기사는 사회와 교회에 대한 개혁적인 우리의 기독교적 발언들과 진술들의 관점을 분산시키며, 사회와 교회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과 열정을 개인내면적의 신앙으로만 성서를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렇게 댓글을 달고 있는 것입니다.

이용섭님의 신앙의 방향과 촛점이 무엇인가를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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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기린 (210.205.148.17)
2007-06-08 22:01:44
체험 당사자의 글
어떤 체험

내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20대 초반부터였다. 아마 내 인생의 3분의 1은 술집에서 보내지 않았나 싶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선술집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주로 단골로 정한 잘 꾸며진 까페나 스텐드 빠를 선호했었다. 술집에 앉아 있으면 세상의 어느 곳 보다 가장 편하고 안락함을 느꼈었다. 그렇게 술을 마신 것이 젊었을 때는 거의 날마다였고 최근 까지도 2틀에 한번씩은 밤 늦게 까지 주량을 셀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셨고 만약 기분이 상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그 날이 이 세상이 마지막 날인양 주체없이 술을 마셔댔고 그 다음날은 왼 종일 침대에 누어 주독을 풀어야만 하였다. 오후 그림 수업이 있는 날은 신경안정제로 견디며 억지로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다.

그러나 몇 년전부터 술이 많이 취하면 필름이 끊기고 주사가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술을 마시면 난폭해지고 이성을 잃고 물건들을 던지며 주변 사람들과 싸움을 걸다가 파출소에 끌려 간 적도 몇 번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다음날 새벽에 깨어보면 그 전날 술 마시던 기억도, 어떻게 집에 돌아 왔는지도 까맣게 잊어 버리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무서운 불안감과 격한 우울증과 회환으로 괴로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의사가 처방한 항 불안제와 안정제를 먹고 겨우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여, 저는 술 마시기가 싫습니다. 저의 힘으로는 불가능 하오니 주께서 도와 주소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결심과 자신만의 맹세를 셀수도 없이 많이 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 저녁이 되면 다시 오늘은 조금만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자는 결심과 함께 술집에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정도 술이 취해지면 고갯길을 힘들게 넘어가던 수레가 언덕의 정상에서 아래로 거침없이 달려 내려 가듯이 나도 모르게 한없이 술을마시게 되고마는 일들이 몇 년이고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지난 5월 8일새벽에 일어난 일이다.
그 전날밤도 나는 여느 때처럼 단골 술집을 여기 저기를 돌아 다미며 술을 많이 마셨다. (뒷날에 들은 얘기로는 그 날도 역시 술집에서 주정과 추태를 보였다고 하였다.) 아마 새벽 한시가 넘어서 술집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동네 까페에 불빛이 켜져있는 것을 보고 택시를 세우고 그 곳에 들어 간 것과, 친절한 주인 마담과 한두병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한 것 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 다음날 그러니까 5월8일 새벽 다섯시 반 쯤 되었을까. 나는 소파에 앉아있었고, 내 왼쪽 옆에는 흰옷을 입은 한 남자가 않아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내 마음에는 예수님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내 바로 옆에 앉아있는 그 분의 체취와 인기척을 분명히 느꼈으며, 그분은 나에게 많은 위로의 말씀을 해 주고 계셨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 말들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방언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내 마음은 한없는 위안과 평안에 넘쳐있었다. 그리고 그 분의 얼굴을 돌아 보았으나 이상하게도 그 분의 얼굴은 뿌옇게 흐려져 보이지가 않았다. 다만 평범한(눈 부시지않은) 흰옷과 육신만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던중 다시 왼쪽에 고개를 돌려 보았을 때 그 분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 방문과 아파트 현관물을 열고 찾아 보았으나 그 분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뒤에 나는 놀라서 마음속으로 어제 마지막에 들렸던 동네 술집에서 어는 동네 사람을 만나 우리집으로 데려와서 밤새 얘기를 했나..? 라고도 생각해 보고 아니면 새벽에 날 찾아온 사람이었나 라고도 생각해 보았었다.
그러나 그 분이 사라지고 난 뒤에 나는 여는 때와는 다르게 불안이나 우울감은 느끼지 못하였고 가슴 속에 넘치는 이상한 환희를 주체하지 못하여 지갑만 들고 집을 나서서 마침 아파트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 젊은 기사에게 아무데나 드라니브를 가자고 말했다. 시내를 여기 저기 다니던 나는 시외에서 호스피스를 하고 있는 후배 목사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새벽 여섯지쯤 도착하자 원장목사와 사모는 갑자기 방문한 나를 놀라워 했고 그 집에서 아침을 먹고 같이 나와 오후 수업을 하였다.
내가 만난 예수님이라고 느낀 그분은 무엇으로 보나 특별한 분이 아니었고 평범하고 인자한 이웃 아저씨 같은 분이었다. 한없는 자비와 안타까움 으로 내게 많은 권면을 해 주셨다.
나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신비체험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내가 수십년전에 내가 절실히 구하지도 않았던 방언의 은사를 받았을 때도 나는 크게 감격하거나 놀라워 하지 않았었다. 유아세례자이며 미션수쿨을 다녔던 나는 그 은사를 당연하고 평범하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나는 신비주의적 신앙보다는 이성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번에 만난 예수님의 사건 역시 나는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또한 주변의 몇 사람에게만 이 체험을 이야기 하였을 뿐이다. 주님은 술 때문에 무너져 가며 자신을 간절히 찾는 나를 극적인 순간에 찾아와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 체험이 꿈이던 취중의 환상이던 확실한 것은 오늘이 그 체험의 한달 째되는 날이지만 나는 그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과, 평생동안 나는 결코 술에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2007-06-08/저녁)
www.iwi.pe.kr/오늘생각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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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철 (211.49.80.36)
2007-06-08 17:20:54
예수는 교회마다 있기에 ....
어느 큰 대형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사를 하면서 그 대형교회의 지점에 해당하는 교회로 교적을 옮겼는데
본교회에서 침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적을 옮기면 침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구
합니다.
예수는 각기 본점교회에 있구 또 다른 예수는 지교회에도 있구 장로교에도 또 다른 예수가 있구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심지어 합동 통합 구분져서 예수가 각기 있는것입니다.
환상이건 발현(애매모호한 단어)이건 간에 자기가 만들고 스스로 그렇게 단정지어버린 일종의 정신착란 현상이라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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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125.128.217.163)
2007-06-08 14:47:45
목사에게 3
하여간 그 형이 자살의 충동을 가끔 느낄 정도의 극한 상황에서 주 예수님께서 발현하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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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125.128.217.163)
2007-06-08 14:28:49
목사에게 2
그 화가 형의 발현 체험에서 1) 주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사실로 재재................재.......................재재확인됨 2) 내가 그 형을 조금 무시하려는 찰나에 그 사건으로 인해 그런 생각 버림 3) 약 30년만에 다시 연락들이 된 게 우연이 아닌 하느님의 섭리하심이라고 깨달아짐 4) 더 있으나 이것 이상 못밝힘. 목사라면 진정 회개하고 정신차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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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82.126.170.92)
2007-06-08 11:24:45
유익이 없는자리
자신이 증명하고픈 신비현상이나 믿고싶은 신비현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사이비 신자라고 말한다면 빨리 그자리를 뜨시기 바랍니다.

저역시 버릴수 없는 absolute가 아니라 important라 하는 자리를 계속 맴돌다가 지치고 지치다가 전혀 다른 말씀(주님이 하셨다는 성서의 말들(진술들)), 진실(진리를 진실이라고 쓰는 이유를 알기 바라오)을 시작으로 관심을 바꿨습니다.

여하튼 성서의 신비적 표현들은 말씀을 증명하기위한 성서 저자들의 덧칠이라는 것을 이해하지않으면 주객이 바뀐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만 하오.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고 무조건 목사를 미워하지말고 ...

그러한 관심은 영원히 진리에 서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 긴시간 방황을 거듭하며 진리에 이르게 하지못하는... 다른것에 관심을 바꿔놓는다는 사실을 익히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오.

오히려 많은 대부분의 목사들은 위의 기사를 더욱 좋아 할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목사를 미워하시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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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125.128.217.163)
2007-06-08 09:33:09
목사에게
나는 신비 현상을 absolute 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important 하다고 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내가 글을 쓴 의도를 전혀 간파하지 못했다. 그리고-아직까지 사이비 신자이다-라고 쓴 것은 못 보았나 ? 이래서 나는 대체적으로 목사들을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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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82.126.170.92)
2007-06-07 20:05:22
발현을 하건 환시를 하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말인가?
발현이면 어떻고 환시면 어떠랴? 성도 맘속에...괴로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면 충분하다
성서에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의 기록으로 역시 충분하다.
수많은 사람이 환상으로또는 꿈으로 또는 위의 기사와 같이 발현 체험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성서의 부활하신 주님의 이야기는 주님께서 하신일이 정말 옳은 일이었고 우리도 그 일을 하라(십자가를 지라)는 증명의 뜻이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행하고 따르라는 진리를 모르니까 자꾸 신비적인 (주님 출현)것에 관심을 쏟는 것이다.

이런기사는 그리스도의 신앙함(따름)이 무엇인지 모르고 신비를 추구하게 만든다.

주님나타났다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무엇을 해야하는 것이 제자도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진리가 무엇이고 주님이 이세상에 오심이 뭘말하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마치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도 계속 집에 앉아있는 제자들의 모습과 같다.
신약성서의 예수님의 진리가 뭘 하라고 하는 요청인지 모르는 모습이다.
그러한 신앙은 "주여주여" 라고 부르고 앉아 있을 뿐이다.

불교도들도 수없이 부처가 나타나고, 부처가 발현한다.

예수가 더 많이 발현하면 그게 진짜 발현이므로 예수를 신앙할건가?
신앙을 거기에 기준하며 거기에 근거할건가?

신앙은 , 기독교 신앙은, 예수신앙은 그가 하신 말씀과 그의 삶이 옳았기때문에 그를 신앙하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신비한가를 탐구할 것이 아니라(탐구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의 하신 말씀과 뜻이 무엇인가를 연구할 일이다.
진리에 서야 한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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