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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신학자 박경은 목사와의 질의와 답변 3이사야 7:14의 임마누엘은 과연 누구인가
이용섭  |  lys9791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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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6월 04일 (월) 00:00:00 [조회수 : 2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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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아하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라. 저 깊은 곳 스올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보여 달라고 하여라."

아하스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그 때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될 때에, 그 아이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되기 전에, 임금님께서 미워하시는 저 두 왕의 땅이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유다가 갈라진 때로부터 이제까지, 이 백성이 겪어 본 적이 없는 재난을, 주께서는 임금님과 임금님의 백성과 임금님의 아버지의 집안에 내리실 것입니다. 주께서 앗시리아의 왕을 끌어들이실 것입니다."

위는 표준새번역 이사야 7:10-17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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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위는 표준새번역 마태 1:22-23입니다.

1984년 봄 저는 서울 수유리 송암교회(기장)에 나가면서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했었습니다. 처음 새벽기도회에 나간 날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방언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보수주의 개신교 쪽에서는 기장에는 성령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주일 낮 예배와 새벽기도회는 고 기원형 목사님이 인도하고 계셨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회에서 이사야 7장을 기 목사님이 강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기 목사님이 이사야 7:14의 '임마누엘'이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시라고 하셔서 제가 그 분은 유다왕 히스기야로 봐야 한다고 항의했었습니다. 그랬더니 기 목사님이 웃으시며 역사적 의미로는 히스기야가 맞지만 예언적 의미로는 그리스도님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기 목사님의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더 묻지를 않았었습니다. 위의 이사야 7:14의 '처녀'는 히브리어로 '알마'이고 그 뜻은 결혼 적령기에 있는 여인(약 13세부터 약 40세까지)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마태복음사가가 이를 '동정녀'라고 번역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그리고 70인역에서 최초로 이를 '동정녀'로 번역했다고 하더군요. 참고로 루터는 자신과 동시대의 유대인들이 바로 이 이유로 인해서 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한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박 목사님의 좋은 답변을 기대합니다. 그럼...

아래는 박경은 목사의 답변입니다.

• 하나님이 손대지 않으시는 것들 중 두 경우

하나님이 손대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는 것들 중의 대표적인 두 경우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직통교제”로 인해 체험된 신비한 경험에 관한 자기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양보할 수 없는 내 신앙이론에 관한 강철고집”이다.

• 가타부타 할 수 없는 개인들의 신앙적인 관점과 그에 따른 신학적 이론의 차이

이 두 가지의 경우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대체로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누구든지 수긍할 만한 주장이나 이론이 되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객관적인 증거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런 노력이 ‘학문적’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하지만 신학은 이미 신학하는 사람의 신앙이 전제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타인의 주장이나 이론에 대해 학문적으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를 말하지 않는다. 그 주장이나 이론이 어느 정도 객관적인가를 통해 그 타당성의 정도를 가늠하여 판단할 뿐이기 때문이다.

• 가능한 한 납득할 수 있도록 해석하려는 ‘객관적인’노력이 신학 방법론

다음으로 하나님이 손대지 않으시는 것들 중의 다른 하나는 “양보할 수 없는 내 신앙이론에 관한 강철고집”인데 이것은 대체로 후세대 사람의 신앙관점과 입장에서 [이미 기록된]성경을 보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다 보니 같은 본문, 같은 구절을 두고도 여러 가지 다른 의견들, 다른 주장들이 나타난다. 관점과 입장의 차이가 곧 의견과 주장의 차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구약에 근거한 삼위일체론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

이런 “양보할 수 없는 내 신앙이론에 관한 강철고집”의 예를 든다면 그 중의 하나가 창1:26을 근거로 하는 그리스도교회의 삼위일체 설명이다. 이 구절에서의 “우리”라는 복수형태는 “왕궁 어전 회의”의 분위기를 그리면서 읽을 때 매우 자연스럽다. 단 한 분뿐인 천지의 주재시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중대한 결정을 내리시기 위해 왕궁 회의를 주재하신다는 그림을 그릴 때 유일신 하나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로 이 한 분뿐이신 유일한 왕, 천지의 주재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어전회의를 주재하시고 거기서 신중하게 결정하신 후에 창조하신 각별한 존재라는 ‘인간의 특별성’이 부각된다.

• 둘 이상이면 복수형태를 갖는 것을 삼위의 복수로 보는 견해는 [재해석]의 입장

그런데 그리스도교회의 입장에서는 이 ‘우리’라는 복수형태를 삼위일체의 근거로 삼는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이 ‘우리’라는 복수형을 삼위일체를 계시하는 말씀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세기의 본 구절은 원래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유대교는 삼위일체 개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문법적으로는 둘 이상이면 복수형태를 갖기 때문에 이 복수형태가 삼위일체의 삼위를 가리키는 셋을 나타낸다고 단정할수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회는 이 복수형태를 삼위일체를 증거하기 위해 계시된 여러 구절들 중의 하나로 [재해석]한다. 이미 기록된 성경을 후세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키기 위한 목적을 갖고 유대교 유일신관의 관점에서 기록된 구절을 그리스도교 삼위일체 신관에서 [재해석]하는 것이다.

• 마리아의 동정녀성의 원래의 의미와 [재해석]

마리아의 영구 동정녀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원래 마리아의 영구 동정녀설을 말하려는 목적으로 마리아의 동정성을 말한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인용한 사7:14에 사용된 ‘알마’라는 단어는 통상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데 마태복음 저자는 이를 번역할 때 ‘알마’에 상응하는 단어인 ‘네아니스’를 사용하지 않고 ‘동정녀로서의 미혼의 여성’을 뜻하는 ‘파르세노스’를 사용했다. 이것은 이미 마태복음 저자가 구약의 문맥을 대할 때 자신의 관점에서 그렇게 [재해석]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어휘대로 대응시킨다면 ‘알마’는 ‘네아니스’로 번역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저자는 마리아의 결혼전 동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파르세노스’를 사용했다.

• 희랍어의 동정녀를 뜻하는 단어는 문맥 정황상 해석된 입장에서 선택된 단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본문이 마리아의 영구 동정성을 의도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올 수 있을 것같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희랍어의 ‘파르세노스’라는 단어는 대체로 ‘동정녀로서의 미혼의 여성’을 가리키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혼 전의 동정성을 강조하는 것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툴라’이다. 이 단어는 결혼전 100% 동정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 역시 결혼전까지이다.

그리고 이 ‘파르세노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베툴라’라는 단어와는 달리 남성 관사를 붙일 경우 ‘미혼의 남성’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여건상 대체로 ‘미혼의 여성’은 동정녀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 ‘파르세노스’에 남성형 관사가 붙어 ‘미혼의 남성’으로 사용될 때 ‘동정녀’로 이해되는 것에 버금가는 ‘동정남’으로 이해될 수 있었을까? 권력과 부를 한 손에 거머쥔 ‘있는 집 자식들’의 동정성은 미혼의 여성만큼 보장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미혼의 여성’이라는 단어도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동정성’의 여부가 달라진다고 볼수 밖에 없다.

• 신약이 구약을 인용할 때에는 이미 [재해석]의 관점에서 그렇게 했다

그래서 결혼 이전에는 절대로 남자를 알지 못했던 동정녀임을 나타내기 위해 ‘남자를 알지 못했다’는 암시를 넣는다. 구약 사7:14의 ‘알마’가 통칭적으로 ‘젊은 여자’를 가리키지만 그 ‘젊은 여자’가 남자를 전혀 몰랐다는 것을 ‘징조’라는 단어로 암시하기 때문에 마태복음 기자는 그녀를 정식 결혼 이전의 동정녀로 전제하고 이 단어를 취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정황상 여자의 정혼연령은 12세~14세로 현재 우리나라의 여중생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파르세노스’라는 단어는 결혼 이전에 남자를 알지 못했던 여자라는 선입견적인 이미지를 갖게 만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 ‘파르세노스’라는 단어만 갖고서는 히브리어의 ‘베툴라’가 갖는 의미를 완벽하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서 마리아의 임신은 다른 남자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마1:18,20; 누가복음은 마리아 자신이 이를 스스로 밝힌 것으로 기록되었다.눅1:34).

더군다나 통상적으로 결혼전의 동정성을 의미하는 이 희랍어 단어인 ‘파르세노스’가 구약에서 동정녀를 나타내는 경우에 한정되어 번역이 된것도 아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러 정황이 가능한 경우에도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여건을 염두에 둘 때 ‘미혼의 여성이기 때문에 동정녀로 이해되는 경우’에 한해 두루 사용되었다. 그리고 마태복음 본문 자체가 마리아 영구 동정성을 논하는 문맥이 아닐 뿐만이 아니라 마태복음 저자의 관심은 온통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마리아의 동정녀성은 예수 출산때까지 한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결혼 이후에도 그 동정성을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마태복음이 구약의 ‘알마’를 ‘파르세노스’로 번역했다고 단정적으로 보는 견해에는 무리가 있다.

• 뿌리로서의 성서신학, 줄기로서의 조직신학, 열매로서의 실천신학-신학의 통합화, 현장화

그러므로 후세대 신앙인의 입장에서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본문의 원래의 뜻을 “[왜] 그렇게 재해석한 것일까”와 같은 질문을 통해 그러면 오늘날에는 그 본문을 “[어떻게] 재해석할 수 있겠는가를 위한 재해석의 원리와 방법을 터득하여 이 시대를 사는 ‘신앙인 각자 개인의 믿음을 강화’하고 공동체의 삶의 지표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에 맞추어 가도록 하는 일이다.

따라서 근거 희박한 지나친 비약이나 일방적인 자기주장, 혹은 억지논리, 궤변으로 일관된 강철고집 등은 아무리 성서의 문자나 본문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해도 [객관성을 확보하여 이뤄진 학문적 수고의 결과]에 의해 조절되거나 조정, 보완, 수정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어 고착화되어 있는 성경이라는 ‘책’이 생생하게 내 삶을 움직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들려지게 된다. 이것이 ‘성서신학을 뿌리로 조직신학을 줄기삼아 실천신학을 통해 열매를 맺게 하는’ 신학의 통합화, 신학의 목회현장화를 이뤄가는 일이다.

아래는 저의 또 한번의 질의입니다.

그러나 박경은 목사님은 제가 이사야 7:14절을 새로 오실 메시야의 탄생의 의미, 즉 소위 예언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이사야 7장 본문은 임마누엘이라는 아이의 출생을 기점으로 하여 그 아이가 채 성장하기 전에 두 나라(시리아와 북 이스라엘)가 멸망을 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예언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근거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만을 따로 질의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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