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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비판]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불신앙 그 자체다이창동 영화는 극장에서 죽어도 관람하지 말자. 일명 사탄의 영화이다.
당당뉴스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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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5월 29일 (화) 00:00:00 [조회수 : 5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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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당당뉴스 자유게시판에 실린 김인찬목사의 글입니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재미없는 영화이다. 초기 흥행실패가 입증된다.
사실 돈이 아까운 영화에 속하는 부분이 많다. 많은 네티즌들도 공감한다.

하필 부처가 세상에 왔다는 날에 이런 영화가 개봉되었다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그는 기독교를 무너뜨리고도 남을 만한 기이한 영화를 만들었다. 일명 사탄의 영화이다.
불교의 축제날 기독교에 직격탄을 날린 것과 같다. 이 영화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먼저 출연진들의 종교부터 철저히 알아봐야할 지경이다.
목사는 울산 공무원이라고 들었다. 나머지는 여러분들의 협조가 요청된다.
경상도가 불교권이 강하다고 하지만 이런 수법으로 기독교를 폄하한다는 것은 제2의 도올 사건보다 더 큰 충격적인 일이다.

다시는 이창동과 그와 관련된 영화는 극장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개종한다면 몰라도 그 이전에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의 영화를 전면 거부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전도연과 송강호가 출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의 타격은 선교자체를 심각하게 막아버리는 중대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미 해외에서 상을 받았으니 해외선교에까지 미치는 그 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이를 묵과해서도 안 되고 응당한 기독교인들의 모든 단합이 요구될 것이다.

이제 세상문화가 기독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종교영화도 아니면서 기독교를 폄하하는 비상식적인 내용들이 가득하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반감정적인 신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를 기독교인은 절대로 돈을 주고 보아서도 안 된다.
차후에 텔레비전에 나오니 그 때 보아도 늦지 않다. 보면 절대로 후회한다.
이런 영화는 망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기독교인들의 단합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 영화의 결정적인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를 기독교 전체의 문제로 오해하게 만든 요소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신앙이 일반적인 기독교신앙으로 확대되어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전도연(신애)의 역할도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신앙이었다. 철저히 자신을 위한 자신과 가족을 지켜주는 그리고 자신만을 위로해주는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자 그는 하나님과 정면으로 대결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되셔야 하는데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 하나님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결정적인 인간 중심의 신관이 이 영화에서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살인자를 전도연이 먼저 용서해주어야 된다는 것이 강조된 내용은 철저히 하나님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전도연(신애)이 용서해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살인자를 용서해줄 수 있고 전도연(신애)이 용서해주어도 하나님께서는 살인자를 용서해주지 않을 수 있다.(진정으로 회개가 필요) 이 영화는 용서의 기준을 인간에게 맞춘 전형적인 인본주의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초점은 인간의 용서가 먼저이지 하나님의 용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만든다.

과연 그런가?
여기에서 결과적으로 전도연(신애)은 살인자를 끝까지 용서해주지 않았다.
또한 그 살인자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줄 알고 크게 착각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실 그런 몰지각한 살인자의 행동은 기독교를 이기적인 종교로 오해하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충분하다. 살인자의 태도가 그렇다면 하나님도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전도연(신애)이 모르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살인자가 끝까지 전도연의 용서를 거부하고 오히려 더 악날하게 나오더라도 기독교의 사랑과 용서는 그러한 자들까지도 모두 용서해주어야 된다는 절대용서의 종교다. 왜 기독교인이 순교하면서 자신에게 고문하는 자들을 끝까지 용서하면서 죽어 가는가? 그 이유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호소한 것을 기억하면 금방 알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과 같은 호소였다. 어찌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겠는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상대적이다. 인간의 생각이 옳은 것은 하나님도 옳은 것이며 인간의 생각이 틀린 것은 하나님도 틀릴 것이라는 것이 인간중심의 사고이다. 마치 하나님을 인간과 수평적인 관계로 설정해 놓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인간중심의 사고이다.

사실 이러한 수평적인 신관은 인본주의 사회에서 지금 만연하고 팽창되고 있다.
기독교의 사랑은 어떤 종교에서도 가늠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과 용서를 말한다.
그것은 아무리 악한 자라도 죄인이며 아무리 선한 자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모두 용서받을 수 있듯이 하나님의 자녀도 모두를 용서해야 한다.

이것을 놓치면 인간을 신과 대등한 위치로 설정해놓고 인간의 선이 곧 하나님의 선이며 인간의 악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악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철저히 인간중심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사회에서 기독교의 독선적으로 보이는 신앙을 비웃기라도 할 것이다.

과연 기독교는 독선적이고 이기적인가?
먼저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이다. 이것은 다른 종교와 좀 다른 특징이 있다.
이런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은 적어도 기독교 안에서는 다른 종교를 참 종교로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범위이다.(영적) 그런데 이런 종교적인 것을 일반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려는 것은 큰 오해이다. 종교는 종교이지 사회집단이나 국가와 같은 시민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종교일 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 있는 정종분리의 원칙은 유일신이나 범신론이나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문제를 크게 일으키는 것은 사이비 종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독교의 근본정신은 종교로써 하나님 사랑과 그리고 이웃사랑이다. 이것은 불변이다.
또한 기독교는 한 종교로써 자유민주주의 국가 안에 있는 공식적인 종교다. 이것은 민주사회에서 유일신을 믿는 종교를 인정하는 미국이나 기타 모든 발전된 선진국 나라에서도 공히 인정되고 있다.(정치 선진국에서는 더 폭넓게 인정)

그런데 요즘 한국사회는 요즘 철저히 범신론적인 종교관으로 사람들이 변해가고 있다.
도올이 대표적인 예이다. 도올의 주장처럼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함께해야 된다는 것은 매우 비상식적인 종교관이다. 종교는 사회봉사 단체가 아닌 비영리 단체인 종교일 뿐이다. 그리고 정종분리의 원칙을 지키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안에서 언제든지 어느 곳에나 인정받는 종교가 기독교라는 사실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민주주의를 이룩하는데 있어서 특별히 공헌했던 종교도 기독교였다.(도올도 인정)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유렵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켜 시민혁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유렵에서 시민이 중심이 되는 의회정치가 탄생하게 됐던 것이다. 불과 약 130년 전 우리나라는 지극히 폐쇄적이었다.

그때 조선은 민주주의와는 사실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 때는 국가와 종교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즉 정종분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서양종교가 들어 올 때에 매우 심한 핍박을 가했던 것이다. 이런 나라에 민주주의 뿌리를 앞당긴 가장 결정적인 종교가 기독교라는 사실을 왜 국민들은 벌써 잊었는가?

교회를 가봐라! 대부분 의회정치를 행하고 있다. 그래서 지교회가 좀 시끄러운 것이다. 카톨릭이나 유교나 불교의 정치는 교회가 행하는 민주정치와는 비교도 안 된다. 교회는 지금 교인들의 교회로 급전환 중이다. 그러니 당연히 소음이 나고 있는 것이다.(본인은 이런 현상을 반대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기독교 평등사상으로 말미암아 조선이 유교적인 불평등한 사회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기독교가 어느 정도 감당한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덜 떨어진 것으로 비판하려는 것은 이제 한국이 배불렀기 때문이다.(도올과 같이) 과거를 벌써 잊었다는 것이다. 평민과 양반으로 갈라진 사회가 급속히 무너진 결정적인 원인도 서양의 문명과 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이제 배부른 한국사회는 과거를 벌써 잊어버리고 있다.
종교는 종교이다. 만약에 종교의 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카톨릭은 가장 독재종교이다. 그리고 불교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와 국가를 분리하지 않고 마치 기독교를 한 사회집단으로 보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시각이다. 종교는 신을 믿지만 국가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찌 서로 같은 종류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서로 인정해주면서 공존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앞서 말한 기독교의 절대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보여주었다. 우리보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해서 희생했던 것이다.

이것은 위에 있는 하늘의 사랑이 땅 아래로 내려 온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추구하는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 된다. 하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무한히 용서해야만 되는 것이다.

밀양이라는 영화는 이렇게 철저히 인간중심의 사회에서는 찬사를 받을 것이다.(칸 수상)
그렇다! 인간은 별수 없다. 인간은 인간의 기준으로 신도 만들어내고 신의 개념도 만들고 신을 저주하기도 하고 신을 선하게도 만든다. 인간중심의 극치는 신을 심지어 인간 아래에까지 놓으려고 한다.

이제 인간 중심의 사회는 신을 인간 안에서 신을 버리려고 한다.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다는 세계관으로 나타난다. 즉 인간만이 모든 것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나타나고 있다.(신도 평가)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지식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더욱더 주장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번 영화는 신을 가상적인 존재로 끌어들였지만 신을 정식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다.
신을 실존적으로 인정한 영화라면 신애는 끝까지 그를 용서함으로 결코 사람으로써는 감히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었어야 했던 것이다. 어찌 신을 믿지 않고 이 사랑이 가능하겠는가? 이창동씨는 신을 믿지 못한다. 신의 절대적인 사랑도 알지 못한다. 설사 안다고 했다면 무한한 신의 사랑을 도출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것은 요즘 지식인과 문화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교만이다.

이것은 도올의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도올도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공존하면서 화해하고 대화하면서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올의 생각은 종교는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므로 모든 종교는 인간의 화해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가 추구하는 유일신과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은 다른 이방인들에게는 독선적이며 심지어 이기적이므로 없어져야 한다고까지 말하는 안티들의 주장과 같다.

그러나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결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하늘에서 온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사랑을 믿는 자들은 인간을 사랑해야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 뿐 아니라 예수와 같이 자신을 져버리는 자들까지도 용서해야 한다. 또한 겉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속옷까지 벗어주는 선행을 가르쳐야 한다.

도올은 기독교 정신이 요즘 희박해졌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전체적으로 폄하하는 세상의 문화인과 지식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깨달으라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기독교를 그리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공산국가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지금도 연명하는 종교가 기독교이다.(지하교회)

그래도 기독교는 한국사회 속에서 여전히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 많은 교회와 목사님들과 교인들이 있으며 그리고 숨어서 남 몰래 일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까지도 도매금으로 함께 기독교를 통째로 비하하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이것이 독선이다.

기독교 정신은 남 몰래 일하는 것이 무척 강조되는 종교이다. 그래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도 많다. 사실 얼마 전에 “칭찬 합시다”라는 프로가 있었다. 거기에서 어느 종교가 더 숨어서 일을 많이 했는가? 역시 기독교였다. 한국에 18%의 기독교가 가장 큰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국민들은 종교의 특성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실 왜 기독교를 요즘 폄하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사고의 기준으로 기독교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불교나 천주교나 여타 여러 종교들과 함께 공존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종교의 특성상 함께 일하거나 타협하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범신론과 어떻게 함께 일하겠는가? 그럼 차라리 유일신을 포기하라고 말하라! 이제 국민은 좀더 정직해져야 한다. 서양종교의 특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정분분리의 원칙에 의해서 정식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있는 세계적 종교이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으며 다른 종교와 공존을 하지만 스스로 독립적인 종교로 활동한다.
기독교는 사회 속에서 그래도 선한 일을 행하고 있다. 비리는 사이비들의 일부 소행이다.
기독교는 사회집단이 아닌 종교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단순히 사회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면 곤란할 것이다.

교회문제는 어디까지나 교회의 문제이다. 만약에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면 이것은 사회적인 문제로 크게 확대 될 수 있지만 일부 사이비교회의 사회적인 부작용을 가지고 기독교 전체의 문제로 확대시키려는 방송은 큰 실수였다.(사이비들의 사회적 물의)

정말로 민주국가에서 정종분리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다른 종교는 민주주의 원리에 의해서 타도의 일순이가 되는 것이다. 천주교는 민주화도 안 되었고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독재 중에 독재이다. 민주주의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당장 타도의 대상이다. 그러나 정종분리로 바라보기에 종교적으로 특별한 것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없는 한 언론도 전체적으로 확대하려는 것은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민주주의 정치를 하고 또 그것이 성숙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종교 내부의 일이다. 그것을 사회적인 기준인 민주주의 사회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자체가 이미 정종분리의 원칙을 깨뜨리는 발상이다.

교회의 문제는 교회의 문제이다. 국가나 정부 혹은 국민들은 이런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민주정치를 하는 교회의 정치적 혼란도 내부의 문제이다. 국가정치의 혼란이나 사회의 혼란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종교적으로 해결해야하는 내부의 문제라는 것이다.

정부가 잘못한다고 교회가 대모하면서 정치에 직접 참여해서 실력행사를 자주해야 되겠는가? 종교는 국가와 분리되었기에 실력행사를 자체하는 것이다.(물론 주장은 할 수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 정종분리의 원칙을 잘 지키는 것이다. 종교에 위협이 될 만한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니면 교회는 국가의 일에 결코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없다. 이런 기본적인 국가와 종교의 특성을 국민들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일반 사회와 종교의 관계로도 볼 수 있다. 목사를 국가가 세우는 것도 아니고 시민들이 세우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스스로 알아서 운영되는 국가 안에 있지만 국가와 분리된 비영리 단체이다.
또한 종교와 종교는 서로 다른 특성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다른 종교들은 서로 함께하면서 일한다고 칭찬하면서 기독교만이 홀로 독자적으로 활동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이미 종교의 특성을 무시하는 무지한 발상이다.

이제 국민은 기본을 알자.
정종분리의 원칙을 알아야 하며 종교들의 다양한 특징을 알아야 하며 종교와 종교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것을 통해서 종교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cafe.daum.net/hosannakim

(2007년 5월 28일 김인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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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1.242.40.162)
2024-03-08 17:58:59
뭔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밀양이라는 영화는 '세상 어디선가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이미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인간과 삶의 모순된 면면에 대한 이야기지 종교적인 거대담론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영화의 결말도 반기독교적 사상으로 매듭지어지는 것이 아닌데 특정 시각으로 지나치게 확대해석된 글이라 생각되네요.
리플달기
0 0
주님은 사랑 (71.168.251.50)
2007-06-01 02:54:08
영화 '밀양' 거부운동을 펴자
김인찬님이야말로 호세아, 아모스 같은 주님의 충실하고 열혈한 선지자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이처럼 칼같이 깊이 쪼개어 미혹하는 이 세대에 사자후로 깨우쳐주는 선지자이십니다.
모름지기 예수다운 예수의 제자십니다.
님의 사자후로 사탄의 영화 '밀양'을 거부하는 범 기독교적 운동을 펼치기를 강권합니다.

2002년 우리는 사탄의 영화 '예수의 마지막 유혹' 상영을 저지하기 위한 전 성도적 거부운동을 벌인 바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뜻이 끝내 이루어지지는 못했습니다만 이런 운동을 통해서 한국기독교의 전체 성도가 일치된 뜨거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고
국회에까지 이 문제를 끌어들임으로써 국정차원에서의 기독교의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점에서 커다란 성과였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 또 '밀양'이라는 사탄의 영화가 우리 교계를 뒤흔들려 합니다.
1천만 기독성도가 또 다시 일치된 뜨거운 성령의 힘으로 일어서서 이 영화를 거부하는 운동을 펼쳐나가야 할 것임을 고합니다.

이런 사탄의 영화를 시상한 칸 영화제도 역시 사탄의 무리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읍니다.
우리 성도들은 포탄이 빗발치는 중동 아프간에도 복음화대회를 하기 위해 2천여 성도가 몰려가기도 한 복음의 전사들입니다.
이제 칸으로 몰려가서 사탄의 영화에 시상함으로써 한국교회를 능멸한 영화제당국과 사탄의 세력을 규탄하고 척결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똑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며 그런 깨달음은 김인찬님과 같이 성령으로 충만한 종님들만이 볼 수 있고 몽매한 성도들을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한기총을 필두로 전 성도들은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밀양거부운동을 펼치기 위한 특별헌금을 하기를 강권합니다.
특별헌금으로는 사탄의 영화가 더 이상 우리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을 막는 모든 활동비와 그런 사탄의 영화에 시상한 칸 영화제를 규탄하기 위해 불란서 원정할 성도들의 여비로 충당하겠지요.

조용기목사님, 김홍도목사님, 김삼환목사님을 비롯한 복음사역의 원로들도 모두 적극 이 운동에 동참하시리라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리플달기
3 7
김인찬 (222.111.231.104)
2007-05-30 22:56:48
이창동 감독이 기독교인라니...??,,또 한번 충격!!
이창동 감독이 기독교인라니...??,,또 한번 충격!!

이창동씨가 크리스천이라니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선교라는 목적은 어디갔는가?

그저 세상에서 칸 수상을 얻은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불신자들이 이 영화를 통해서 얻는 것은 기독교 불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자성을 요구했다면 교회의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가?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면 교회의 비리를 세상에 공개하지 못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치열하게 개혁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양심이다.
리플달기
4 7
밀양(펌) (121.160.10.67)
2007-05-30 00:20:43
밀양 - 허영과 탐욕의 잘못된 만남이 빚어낸 비극
영화 밀양을 보고난 아무추어 감상문입니다.
목회자가 한 번 꼭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들께서 한 번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밀양 - 허영과 탐욕의 잘못된 만남이 빚어낸 비극

이창동 감독의 신작영화 밀양이 제60회 칸느영화제에서 호평과 함께 수상이 점쳐지고 있다. 전도연의 여우주연상 수상이 멀지않았다는 프랑스 일간지의 보도와 함께 황금종려상이나 그랑프리대상까지 점쳐진다고 하니 2004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칸영화제에서 거둔 심사위원대상에 이어 또 한번 한국영화의 쾌거를 기대해도 좋을 듯 싶다.

개인적으로는 전도연의 여우주연상 수상을 기대해 본다.밀양을 감독한 이창동은 무명의 설경구를 일약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기파배우로 각인시킨 영화 박하사탕을 만든 감독이고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부장관을 지낸 감독이다. 이전 그의 영화 초록물고기라든가 박하사탕, 오하시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신작 밀양은 무조건 기대를 가지게 한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 이창동과 전도연이라는 두 이름이 주는 어떤 신뢰가 영화를 보게끔 만들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 밀양에 살러내려와 피아노학원을 차리고 새 삶을 시작하려던 주인공 수애에게 비극이 찾아든다. 어린 아들이 유괴를 당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유괴범은 돈을 노렸다. 범인은 다름아닌 자신의 아들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었다. 수애는 남편의 죽음에 이은 어린 아들의 죽음으로 쥐어짠 걸레처럼 온몸이 말라 비틀어질 정도로 통곡하며 하루 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중 약국을 하는 이웃의 권유로 어느 교회의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녀는 여기서 목놓아 처절하게 운다. 신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인간의 가장 처절한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의 통곡일 것이다. 통곡중이던 수애의 머리위에 목사의 손이 얹혀지고 수애의 통곡은 잦아든다.


그리고 갑자기 수애가 변했다(!)
그녀가 갑자기 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아마 심방전도사로 보이는 전도사의 인도 아래 드려지는 가정예배에서 자신이 마음의 평안을 얻었음을 고백하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되었다며 자신에게 닥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후 그녀는 매주 열심히 교회를 출석할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찬양하며 노방전도에까지 나서게 된다.



그녀는 누가보더라도 은혜를 받았고 변화를 받았고 열심을 가진 신자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범인을 면회가겠다고 나선다. 목사와 교인들은 그녀의 믿음과 용기를 칭찬하고 수애는 교도소 면회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범인과 마주 앉는다. 수애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 을 죽인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범인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범인은 수애의 입을 통해 하나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놀랍고 감사하다며 자신은 감옥에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았으며 지금은 너무도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한다.



순간 수애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
그래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어요?”
범인과의 면회를 마치고 나온 수애는 주차장에서 기절한다.

그리고 다시 수애는 변한다(!)
목사와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러 와서 앉아 있어도 나는 못하겠다는 식으로 우두커니 앉아있는다. 교회에 들어가 두눈을 부릅뜨고 미친사람처럼 두손으로 의자를 두들겨댄다. 자신을 위한 기도모임을 하는 교우의 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버린다. 레코드가게에서 음반을 훔치고 그 훔친 음반으로 교회의 야외집회를 조롱하며 훼방한다.

그리고 자신을 전도했던 약사의 남편 교회장로를 유혹해 야외에서 정사를 가지려고 한다. 수애는 확실히 다시 변했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팔을 칼로 그어 자살을 시도하고 미수에 그쳐 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자르는데 하필이면 미용사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의 말썽많던 딸이다. 수애는 머리를 자르다 말고 박차고 나와 자신의 집 마당에 앉아 거울을 앞에 놓고 자기 스스로 머리를 싹둑 싹둑 자른다.

영화는 그렇게 머리를 자르는 수애의 집 마당을 비추며 끝이 난다. 고장난 차안에서 바라보는 하늘을 비춤으로써 시작했던 영화는 수애의 집 지저분한 마당을 비춤으로써 끝이 난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은 종교를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을 말하는 영화라고 했다.
아마 감독의 이 말 속에는 불필요한 종교적 논쟁에 휘말리거나 특정종교세력의 부당한 공격으로 부터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호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의 구원과 용서를 다루고 있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이때 종교적이라는 말은 특정종교를 포교하거나 혹은 반대하기 위해서 특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영역의 문제, 구원과 용서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 영화가 참된 용서와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묻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수애도 범인도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수애는 고통으로부터, 범인은 죄로부터. 두 사람다 용서를 말한다. 수애는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말하고 범인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한다.두 사람 모두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영화는 비극이다. 왜 그럴까? 밀양은 바로 그 이유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수애와 범인이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이 비극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구원과 용서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는 허상이 아닌 참된 구원과 용서가 무엇이냐를 묻고 있다. 이들의 구원과 용서가 허상인 까닭은 그것이 허영과 탐욕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애의 비극의 원천은 허영이다.
수애의 돈을 노린 웅변학원원장은 어느 술자리에서 수애가 좋은 땅을 사려고 한다는 말을 듣는다.은행에 돈을 넣어두기 보다는 목좋은 땅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는 수애의 말을 듣고 범인은 수애가 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실제 수애는 이곳 저곳 땅을 소개 받아 둘러보러 다닌다. 하지만 사실 수애는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수애는 유괴범과의 통화에서 자신에게는 사실 땅을 살만한 돈이 없음을 고백하며 요구하는 돈을 마련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쩔쩔맨다.

단지 돈많은 사람으로 보여야 새로운 터전에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란 생각에 수애는 그런 허세를 떨었던 것이다. 결국 아들의 죽음은 수애 자신의 허영이 부른 비극인 셈이다.

수애의 허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수애는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며 믿음생활을 한다. 그녀는 예전에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고난 가운데 통곡하지 않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그녀의 믿음에 감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녀는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녀는 진정 그 믿음의 힘으로 범인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계에 붙잡혀 있을 뿐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지 못했다. 수애는 용서를 보여주려 했다. 범인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어쩌면 거기에는 용서하는 믿음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확인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얼만큼은 자신의 그런 믿음을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자신의 용서앞에서 참회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범인의 모습을 보고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허영이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다.
돈이 없으면서도 돈많은 것처럼 보이고자 사지도 못할 땅을 보러다녔던 것처럼 수애의 용서에는 영적인 허영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이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영적허영의 덫이 놓여있다. 차라리 범인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면 됐지 굳이 면회를 가서 범인 면전에 대고 용서한다고 말할 것까지야 뭐냐고 말하는 종찬이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가깝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용서의 세계를 굳이 눈에 보여주고자 했던 수애의 마음에는 분명 영적인 자신감과 범인에 대한 영적인 우월감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이 내게 이런 평안을 주셨다는 것을, 그 래서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는 것을 말해주러 왔다”는 수애의 말 속에서 그것을 읽을 수가 있다.

문제는 수애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바, 수애는 범인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용서 앞에 감격과 참회의 눈물을 흘릴 줄 알았던 범인이 오히려 하나님께 이미 용서를 받았고 그로 인해 지극한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수애는 분노와 배신감에 사로잡힌다. “ 어떻게 내가 용서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실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수애의 이 말은 그녀가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며 그러기에 그녀의 용서 퍼포먼스가 실은 영적인 허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았다던 수애는 마치 하나님께 시위라도 하듯 자신이 나가는 교회의 장로를 유혹해 야외에서 정사를 벌이고자 한다.
그 때 수애는 자신의 몸을 거칠게 더듬는 장로 밑에 깔려 하늘을 쳐다 보며 비웃듯이 말한다. “보여? 이게 보이냐고?”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물론 신을 조롱하며 하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았다던 수애에게 신의 거처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하늘이다. 그래서 벌건 대낮에 장로를 유혹해 보란 듯이 하나님 면전에서 한 번 해(!)보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녀가 보았다고 고백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란 무엇일까?
그녀는 한순간도 눈에 보이는 세계를 떠나본 것 같지 않다. 그녀는 끝내 참된 용서를 하지 못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의 딸이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것조차 참을 수 없어 미장원을 박차고 나오는 것은 수애가 용서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처 할 수 없었던 용서!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가지기 전에는 섣불리 할 수 없었던 용서를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것은 그녀의 허영에 불과했다. 그 영적인 허영이 그녀에게 또다른 파탄을 불러왔다. 종찬의 말대로 그냥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고 꾸준히 신앙생활을 통해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어느 날 진정으로 범인을 용서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수애의 허영과 함께 이 영화를 비극으로 몰고 간 것은 웅변학원 원장의 탐욕이다.
그는 돈이 탐나 자신의 학원을 다니던 어린아이를 유괴해 죽여버렸다.
물질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어 인면수심의 죄를 지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탐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수애를 재차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은 범인의 두 번째 탐욕이다. 바로 영적인 탐욕이다. 수애는 범인의 자기구원과 용서의 선포 앞에서 기절했다.
도대체 사람을 죽여놓고 저렇게도 평안하게 뻔뻔하게 자기구원을 말해도 되는 것인가? 피해자는 피를 쥐어짜는 통곡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정작 가해자인 범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고 있었노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수애가 차를 운전하다가 잠시 딴 생각에 잠겨 있다가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칠 뻔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부부인 듯이 보이는 두 남녀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수애에이렇게 따진다.
사람 죽여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나는 이 대사가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키가 된다고 본다.

그렇다. 사람을 죽여놓고 미안하다고 말한다고 다가 아니다. 죽인 죄에 대해서는 설사 용서를 받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죽임을 당한 피해자에 대해서 어떻게 면죄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최소한 피해자 앞에서 가해자는 영원한 참회의 자리에 남아야 하는 것이
진정 용서받은 자의 모습이 아닐까?

영화 속 범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 고통 받은 수애 앞에서 참회의 모습을 보이기는 커녕 너무도 떳떳하게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선언한다.
수애는 그의 모습에서 최소한의 죄의식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를 빌미로 내어버리고
사랑과 평안 운운하는 뻔뻔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 뻔뻔함 앞에 수애는 치를 떨었고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범인의 이 모습 속에 이른바 값싼 은혜를 탐하는 또다른 탐욕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해 뼈를 깍으며 참회하고 최소한 피해자 앞에서는 영원한 죄인으로 남아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대신 서둘러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선언하고 그 댓가로 참회의 눈물대신 마음의 평안을 구가하는 것은 분명 신의 은총을 이용하는 것이다.

죄인 스스로가 신에게 죄사함 받았음을 선포하는 것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필요가 없음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수애의 말이 그 점을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하나님께 이미 용서하셨다는 데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요?”

영화 밀양은 이 대목에서 중요한 신앙적 질문을 던진다.
죄인이 죄를 용서받음으로 죄의 형벌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언제나
신은 죄를 지은 가해자인 죄인의 구원에만 관심하는가?

죄인이 지은 죄를 용서받아 그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신의 은총이라면 그 죄의 피해자, 즉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영혼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범인은 감옥에서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 살인죄를 용서받고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그 시간 아무 영문도 모른채 자신의 가르치던 선생님 손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아이의 영혼은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으며, 어린 자식을 잃고 피를 토해내는 고통에 빠져 있는 수애의 영혼은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아야 하는가?

죄인은 값싼 은혜덕에 최소한의 죄책마저도 안고 살지 않는 동안 그 죄인의 손에 죽어가거나 피해를 입은 가련한 영혼들의 구원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영화 밀양이 기독교에 대해 던지는 중요한 신앙적 물음이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죄인의 영혼구원을 위한 사죄의 은총, 신의 사랑과 용서, 분명히 죄인에게 복음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영혼은 어디갔는가? 그 영혼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피해자는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나? 피해자의 구원없이 가해자의 구원만을 노래하는 것이 과연 신의 뜻인가?


참된 사죄란 신의 은총으로 그저 자신의 죄만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 안고 피해자 앞에서는 영원히 죄인의 자리에 머물러 참회하며 피해자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
피해자의 구원없는 가해자만의 구원이 과연 신의 은총이랄 수 있을까?


Andrew Sung Park이라는 젊은 신학자는 그의 책 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통해 보건데, 교회는 인간의 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한가지 사실, 인간의 죄로 인한 희생자에 대해 간과해왔다>
죄와 죄인의 구원을 노래하는 복음의 그늘진 곳에 그 죄의 결과로 희생당한 피해자의 영혼은 통곡하고 있다. 고통에서조차 구원받지 못하고 있다. 마치 영화속 수애처럼.

영화 밀양은 피해자의 고통따위는 아랑곳 않는 가해자 죄인을 구원하는 값싼 속죄의 은총이 아니라 죄의 희생자의 영혼까지도 구원하는 신의 은총의 햇살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용서, 속죄처럼 허영 가운데 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한 세계속에 감추어진 신의 은총의 햇살,

Secret Sunshine(밀양)속에 있는 것이다. ( 김 성 목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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