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우연히

옛방송국 동료와 대화하던중에 나의 선친얘기가 나왔는데

이는 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이두현 선생님이 발간한

<한국연극이면사>에 선친과의 대담이 있다는 것이다.

듣기만 해도 반가웠다.

그리고 그 책이 내게 우송되었는데

더욱 반가웠던 것은

표지 에 젊은날의 선친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었다.

1931년 12월 26일 방송극협회 창립기념으로 찍은 사진인데

오른 쪽 끝이 나의 선친인 朴珍, 본명은 朴勝進, 호는 愚石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선친이 살아계시다면 103세....

서럽게도  70을 겨우 채우시고 떠나셨으니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사는 내가 염치가 없다.

내가 유치원 다녔을 때의 사진

어찌 되었던지 중학교에 들어가서

어린이연속극 하느라 방송국을 들락거리기도 하고

그때 출연료를 아버지에게 맡겼는데

선친은 그걸 기억하고 계셨을지...

학교에서 써오라는 가정통신란에

아버지의 직업을 연극인이라고 쓰는 게 싫었는데.....

가난을 밥 먹듯하는 직업도 아닌 직업 연극인이 부끄러웠는데....

아버지는 평생 연극을 사랑하시고 연극을 위해 사신 분.

조부께서 하라는 의학공부는 아니하시고

일본유학을 접고 귀국하여 활동하신 土月會

아버지를 따라 동양극장을 내집 드나들듯이 했고

主流를 이루었던 신파조에 눈물께나 흘렸었던 어린 시절

그래 그런가 아직도 눈물을 흘리는 나.

극본을 앞에 두고 밤새 색연필(청 홍) 그어가며

연출준비를 하시던 아버지

무대에 올려지면 그리도 달라지는 상황에 나는

우러러 존경하던 아버지

그때부터 연극에 매료되어 하마터면 나조차 연극인이 될 뻔했던 과거

서울대학교 예술제때

신영균(치과대학)과 共演한 나(문리대)는

능청스런 상대역에 지지않으려고 안간힘 썼고

벌써 타계한 이낙훈은 미술대학생이었는데.....

그건 그렇다 치고

제1회 연극경연대회서 선친이 연출상을 탄 건

김영수 작인 <血脈>

정말 어린 내 눈에도 명작에 명연기에 훌륭한 무대장치였다.

작고하시고 10년이 흐른 후, 

나는 유고집 <歲歲年年>을 발간하면서 추모의 자리를 마련했었다.

손님을 모시고....

유난히 바람끼가 많았던 아버지, 예술인이어서 그랬을까?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시기 좋아하시고

적적함을 딸과 함께 한강에서 배를 띄웠던 분이셨으니.

공연예술 제1대의 예술인들이라는 부제를 적은

<한국연극이면사>에는 저자 이두현 선생이 대담한 사람만 15명

근대극운동의 선구자인 현철 선생님,

그리고 배우 변기종, 복혜숙, 극작가겸 연출가 이서구 선생

(이서구 선생은 방송극도 많이 쓰셨다.)

배우 서월영, 全玉(최민수 외할머니), 陳娘,이해랑, 장민호

국악인 김연수, 김소희, 박녹주....등

현철 선생은 동대문에서 사셨으며

심부름으로 선생님댁을 찾아가면

화장품을 연구 개발하신다고 하여 진열한 병들이 많았다.

지금 이 순간, 선친은 어떤 모양으로 이승에 계실까?

아니면 좋은 세상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계실까?

아직도 아버지를 그리면 나는 어린애가 된다.

그동안 지내온 얘기를 어버지께 고하고 싶은데

좋은 일, 나쁜 일 모두를...

설날과 추석엔 뻬놓지 않고 아버지께 예를 올린다.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으로 잘 살고 있는 딸의 말년은 아름답습니다.

 지내놓고 보니 옛날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평안을 위한 전조였으니까요.

 계속 딸을 눈여겨봐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