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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에 실린 기사입니다.
1월이 시작되면서 야심차게 시작한 MBC 드라마 ‘하얀거탑’. 사실 대대적인 선전에 비해서 그리 좋은 시청률이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입에서 입을 통해 그 재미가 전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얀거탑’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의사와
변호사로 대변되는 ‘전문직’ 종사자들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문직’은 배경으로만 두고 내용은 하나같이
연애드라마였다. 한국 드라마는 삼각관계, 불륜, 그리고 출생의 비밀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도 무리는 아니며, ‘파리의 연인’과 같은 로맨틱
코미디류의 드라마들로 모든 채널들이 채워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때에 방영이 시작된 ‘하얀거탑’은 드라마를 보지 않던 남성들을 TV 앞에
앉혔다는 사실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드라마하면 누가 뭐래도 아줌마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있으며, 30대 이상 남성들은
‘주몽’과 같은 역사드라마(사실 역사를 얼마나 진실을 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만을 간간히 보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그들이 함께 보고 토론할 수
있는 드라마가 생긴 것이다.
‘하얀거탑’은 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 기존의 메디컬 드라마에서 보았던 인간애, 사랑, 연애와 같은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상황,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그대로 행동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비록 의사가 아닌 일반인일지라도 직장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상황들에 동감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전업주부들보다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에게 더욱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 생각되지만, 이 드라마의 원작은 2003년 일본 후지테레비에서 방영된 ‘하얀거탑’(白い巨塔)이며, 이
드라마 역시 마이니치 신문기자 출신인 야마자키 도요코 씨가 1969년 발표한 소설 <하얀거탑>이 원작이다. 2003년 일본에서
방송되었을 당시에도 후지테레비 개국 45주년 기념으로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며 방영되었으며, 일본 드라마 대부분이 10회 내지는 11회에 끝나는
반면 이 드라마는 21회라는 거의 두 배 분량으로 방영되었다. 2004년에는 일본 TV 드라마 아카데미상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캐스팅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탄탄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방영된 ‘하얀거탑’에 그 시작부터 많은 기대를 했다. 하지만 한국판
‘하얀거탑’을 보면서 일본의 실정과는 다른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각색을 하는 과정에서 조금은 무리한 설정을 보게 되어 안타깝다.
일본과 다른 상황, 무리한 설정 안타까워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와는 달리 각 과에 교수는 1명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큰 이변이 없는 한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를 거쳐 교수가 되므로
한 과에 여러 명의 교수가 있다. 이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과장을 하기 때문에, 누가 누구보다 먼저 과장을 한다는 정도가 알력의 대상이 될까?
사실 드라마에서처럼 과장이 되기 위해 뒤로 돈을 쓰거나 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강사-조교수를 거쳐 교수가 되는데, 교수는 그
과에 1명뿐이고, 그 사람이 과장을 맡고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그 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수 밑에서 평생 조교수만 하다가
교수가 다른 학교 사람을 자기 자리에 꽂아버리면 결국은 사표를 내고 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나라의 ‘하얀거탑’에서 전반부를 구성하는 과장
선거는 일본 ‘하얀거탑’에서는 교수 선거의 과정이었다.
외과의 자이젠 고로(장준혁 역)는 교수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반대로 동급생인 내과의 사토미(최도영
역)는 교수가 되는 데는 관심도 없이 환자만을 챙기는 성격이다. 일본 ‘하얀거탑’의 재미는 여기에 있다. 자이젠은 권력욕 때문에 교수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병원의 생리상 교수만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가 교수가 되어 외과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이젠은 위로부터의 변화를 꾀했고, 사토미는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꾀했던 것이다. 결국은 모두 병원의 발전과 의료의 발전을 원했던 인물들이다.
방법이 달랐을 뿐. 하지만 한국 ‘하얀거탑’의 경우에는 이러한 면이 간과되고 단순히 장준혁이 권력에 매달리는 인간상으로 그려진 것이 매우
아쉽다.
일본 ‘하얀거탑’의 경우 외과의인 자이젠 고로(장준혁 역)의 이름에서부터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자이젠이라는 이름은 자신이
외과교수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뒤에서 도와준 장인어른의 성(姓)과 같다. 일본에서는 결혼을 하면 여자가 남자의 성을 따르게 된다. 하지만
가끔 부잣집 외동딸의 경우 데릴사위를 얻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남자가 자신의 성을 버리고 여자 쪽 성을 따르게 되며 이것은 곧 자신의 가문을
버리고 그 집 가문을 잇는 것을 의미한다. 자이젠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이 사람은 부잣집 외동딸에게 데릴사위로 들어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고로(五郎)라는 이름은 다섯째 아들임을 뜻하는 이름이다. 가난한 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명문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최고의
외과의가 된 자이젠 고로. 왠지 그 성격의 배경을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루한 법정 싸움이 끝나고 첫 재판에서 이긴 기쁨도 잠시, 항소심에서 패한 장준혁은 암으로 쓰러졌다. 일본 ‘하얀거탑’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자이젠 고로의 유서와도 같은 편지가 읽혀지던 장면이 떠오른다. 한국 ‘하얀거탑’의 장준혁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간이었기에 이런 감정이
생길지 의문이지만, 일본 ‘하얀거탑’의 자이젠 고로가 자신의 수술엔 잘못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마지막 편지에 동의한다. 환자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최고의 수술을 해준 자이젠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수술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메스를 드는
자이젠과 같은 의사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하얀거탑’은 드라마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조심스럽게 평가하고 싶다. 이러한 드라마가 일본 원작인 것이 못내 아쉽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동안 훌륭한 드라마 한편을 만들기 위해 작가를 키워온 것도 아니고, 단순히 시청률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는
시스템에서는 문제작을 만든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듯싶다. ‘하얀거탑’을 계기로 그저 웃고 지나가는 드라마가 아니라, 함께 보고 함께 토론할
수 있는 그런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주성숙/ 경희대학교 치과대학
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