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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 성경을 넘어서 상호평등의 기독교로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오늘날의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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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3월 09일 (금) 00:00:00 [조회수 : 5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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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 성경을 넘어서 상호평등의 기독교로





(*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오늘날의 기독교)
 
상호 평등의 기독교를 위하여
 
매우 기이한 점이 하나 있다. 개신교 구성원의 70퍼센트가 여성이라고 하는데도 개신교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자들 투성이라는 점이다. 왜 개신교의 지도자들은 온통 남정네들이어야만 하는가? 실제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는 여성이 지도자로 나아갈 수 있는 길 자체를 아예 봉쇄해 왔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만큼 뚜렷하다.
 
상호평등에 대한 인식이 다소 일반화 되어 있는 오늘날에서조차도 기독교에선 여전히 성차별을 보이고 있다. 여성안수제도 반대는 아직까지도 기독교의 큰 보수교단들이 내세우고 있으며, 그나마 소수인 진보적인 교단이라고 해도 여전히 여성을 목회현장에 초빙하거나 사역하게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케이스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독교는 이러한 가부장적 행태를 띠어 왔단 말인가.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은 말하길, “성경에 본래 그렇게 쓰여 있다”고 설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기독교는 지금까지조차 성차별을 정당화해왔던 가부장적 기독교로서 이어내려오게 된 것이다.
 
성경 속의 성차별적 구절
 
사실상 여성으로서 성서를 읽을 때 가장 당혹스러운 점은, 기독교 역사를 논하기 이전에 이미 성서 자체 안에서부터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흐름이 발견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는 기존 기독교가 왜 자꾸만 가부장적 체제와 성차별적인 성향을 보여 왔는지에 대한 그 근본적 원인을 밖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믿고 따른다는 성경 안에서부터 성차별은 이미 현존하고 있다.
 
◀ 성경은 특히 차별당하는 여성의 입장에서 볼 경우, 너무나 많고도 분명한 오류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구약성서를 보면 여성은 종종 가문계승의 도구로 자리매김 되기도 하는 구절―창16:1~16, 창 29~30, 삼상 1:2~20, 룻 4:18~20, 룻 4:4~10 등―을 우린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구약시대가 매우 엄격한 가부장적 사회인 점을 감안하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다말의 경우는 참으로 안쓰럽기 그지없다(창 38장). 신명기 25장에는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형의 대를 이어주어야 한다고까지 나온다.
 
성경을 보면, 여성 역시 여전히 남자의 재산목록 가운데 하나로 취급된다. 네 이웃의 소유 안에 소·나귀·남종·여종 뿐 아니라 아내까지 포함되고 있다(출 20:17). 사무엘하 11~13장을 잘 살펴보면,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것은 여인에게 해를 끼친 죄이기보다 남편 우리아에게 속한 것을 침해한 죄로 얘기되고 있다. 신명기 21장 11절에는 전쟁에서 사로잡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도 좋다고 말씀한다. 게다가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는 너희를 위하여 살려두라"(민 31:18)고 한다.
 
또한 똑같은 입장에서 딸이 유산을 상속받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허락되지 않으며 허락되더라도 매우 특별한 경우에 속하고 있다(민 27:8). 여성은 재산목록의 하나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남자들이 여성을 임의로 처분하는 것은 당연히 자연스럽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다른 이에게 잠자리를 같이 하라고 내주거나(창 12:10~20, 20:1), 롯은 소돔사람들에게 처녀인 자기 딸을 주겠다고 한다(창 19:4~9). 한 레위인은 기브아에서 자기 첩을 무뢰배들에게 내주기도 하는데, 매우 서글픈 사실은 그 여자는 밤새 욕보임을 당하고선 결국 죽고 말았다는 점이다(삿 19). 누가 그 여인의 한을 아는가!
 
성경에 따르면 여성의 종속을 정당화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창 3: 16). 가부장적 기독교의 역사에선 여성은 종종 '악의 근원'으로 취급된다. 즉, 죄의 근원은 결국 하와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결혼은 원래 양편이 순결을 지켜야 함에도 성경은 남자보다는 여성의 순결을 더 강조하거나 일부다처제의 모습을 이미 정당화하는 구절을 많이 보여주곤 한다(신 21:15-17). 무적의 용사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서 친아들이 70명이나 된다(삿 8:30).
 
슬프게도 결혼한 여자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고발당하면 그 아버지는 자기 딸이 처녀였음을 증명해야 하고, 입증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아비의 집문 앞에서 친정이 있는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라는 놀라운 규정도 성경에 있다(신 22:13~21). 여기서 결정적 문제는 남자는 여자처럼 순결함을 증명해야 한다거나 총각이 아니었다고 돌로 쳐 죽이라는 그런 규정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성경엔 없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 같은 성경의 말씀은 형평성을 잃은 것이다.
 
성경은 적어도 남자보다 여성을 부정하고 더러운 존재로 묘사하기도 한다(레 12:2~5, 15:19-25). 똑같은 경우인데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이러한 점은 성경 역시 생물학적 차이를 성차별로서 의례화한 사례에 속한다. 또한 성경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도 종종 얘기하곤 한다(전 7:28, 레 21:1, 민 5:11-13, 민 12: 1-15).
 
구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약에 이르러서도 가부장적 한계는 여전할 따름인데, 여성은 사람 수에 포함되지 않고 있다(막 6:44). 사도 바울의 언급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구절이 있다(고전 11:3, 엡 5:21, 고전 11:4~6). 바울은 말하길, 여성은 교회에서는 말할 권리가 없고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며,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한테 물어보라고 얘기한다(고전 14:34~36, 딤전 2:11~12). 적어도 바울에게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여자는 남자의 영광"(고전 11:7)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경은 여성을 아예 왕따시키기도 한다(신 16: 16). 계약의 증표인 할례는 남자에게만 해당한다. 성경 어디에도 여자 제사장 기사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 뿐인가. 예수의 열 두 제자들 가운데 여성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예수의 공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는 언제나 여성과 가까이 있었고(눅 8:1~3, 막 15:41), 여성은 주의 십자가 현장에까지 끝까지 남아 있었을 뿐더러(막 15:40~41), 사실상 부활의 첫 증인이기도 하다(막 16:1~8, 요 20:18). 그런데도 이후의 초기그리스도교의 예수의 부활 증인 명단에선 여성은 슬그머니 빼버린다(고전 15:4~5).
 
이렇듯이 사실상 성경 역시 시대적 상황의 한계를 안고 있다. 솔직히 성차별과 관련해서 성경을 본다면, 성경이라는 경전의 한계는 명백하게도 드러난다고 하겠다. 물론 성경에는 성차별적 전통의 흐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 안에도 여성해방의 맥 역시 도도히 담고 있다(민 27:1~11, 롬 16:1~15, 막 15:40~41, 눅 8:2~3).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성차별>과 <여성해방>이라는 그 두 가지 전통의 맥을 같이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해석자에게 열려 있는 책이라고 하겠다.
 
가부장적인 오늘날의 한국교회 현실
 
솔직히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 집단은 왜 그리도 남자들만 바글대는가. 우리가 '교회공동체'라는 것을 떠올리면 언제나 꼭 남자(목회자)의 카리스마에 휘둘려 있는 임의의 집단이 떠올려진다. 각 교단과 교파의 총회 현장을 가보라. 맨파워(man power)들로 득실득실하잖은가. 한국 기독교 역사 초기에서부터 여성들의 역할과 활약은 교계에 매우 중요한 공헌들을 했었을 뿐더러, 여성이 전체 교인수의 70%를 차지함에도 말이다.
 

   
 
▲ 오늘날 한국교회는 전형적인 남성 주도 사회며, 교계의 중요한 의사결정들은 남성들의 독점으로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뉴스앤조이 이경근
 
   
 
▲ 반면에 애석하게도 한국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그저 대부분 가사노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모 교단총회가 열리는 교회에서 여성교인들이 식사준비를 하는 모습이다.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아직까지도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단도 여전히 많다. 소위 기저귀 찬 여자들은 강대상에 올라가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발언들은 그들 보수 진영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얘기들이다. 즉, 이들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그 근거에는 성경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솔직히 이 같은 현재 시점에서는 적어도 남자와 동등한 능력일 경우, 괜찮은 여성 목회자가 있다면 오히려 인센티브라도 줘서 데려와야 할 만큼 제도적으로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루바삐 여성이 교단 총회장으로 나올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해본다. 오늘의 불공평한 현실에서 볼 때 공평하신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 대해 똑같이 대하실까? 오히려 궁극적인 공평함을 위해서 현재로선 남자보다는 여성을 더 편애하시는 것이 더 공정한 것이잖은가. 왜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더 중요했겠는가.
 
이제는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여성의 한을 풀어주는 기독교로
 
아비의 서원기도로 죽은 입다의 딸의 서글픈 한의 눈물, 여전히 잘 기억하지도, 잘 기념하지도 않고 있는 향유 옥합의 무명 여인(성서는 이를 기념할 것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있다) 등등. 아직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의 한(Han) 많은 눈물을 기억함으로써 앞으로도 끊임없이 여성해방의 전통들을 되살리고 기독교 안의 뿌리 깊은 가부장성부터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21세기의 한국 기독교는 그동안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거나 이를 저질러왔던 잘못된 과오를 철저하게 반성하고 새롭게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모성애적 기독교는 여성해방을 중요시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남성도 여성도 하나님 안에서의 온전한 상호평등을 위해서이며, 현재의 부조리한 가부장적 습성의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단지 여성해방의 맥을 중요시할 따름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바야흐로 문명 전환의 새로운 흐름이 여성성을 꽃피우는 물결로 나아가고 있음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 크리티앙 정강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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