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은 집에 책이라고는 성경과 요리책 두 권밖에 없는 한 대가족 농장의 막내로 태어난 아일랜드 작가다. 그런 그녀의 작품 『맡겨진 소녀』(2010)를 21세기 최고의 소설 50권에 선정한 <타임스>는 클레어 키건에게 무려 ‘한 세대에 한 명씩만 나오는 작가’라는 찬사를 보냈다. 24년 동안 단 4권의 책밖에 쓰지 않았으나 아일랜드 교과서에까지 그녀의 작품이 실린 클레어 키건의 글쓰기에 대해 그녀의 팬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키건은 간결한 단어로 간결한 문장을 쓰고, 이를 조합해 간결한 장면을 만들어나간다.” 뺄 단어를 하나도 남기지 않는 문장, 설명보다는 단어와 단어의 여백으로 말하는 이 작가의 작품은 그리하여 시와 같은 소설이라고도 불린다.

그녀의 책으로 처음 읽은 소설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0)이었다. 이 책은 한 미혼모 가정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를 딱하게 여긴 주인집 부인의 보살핌으로 잘 자라 단란한 가정을 꾸민 한 석탄상인이 모든 면에서 동네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수녀원의 어두운 사정을 알게 되어 갈등하게 된다는, 그러다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간단한 줄거리의 소설이었다. 매우 짧은 이 소설이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문학에서 만날 것이라 예상치 못 했던 이 뜻밖의 문장 때문이었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이 문장은 그녀의 다른 소설 『맡겨진 소녀』로 넘어가게 만들어주었고, 역시나 짧은 이 담담한 소설은 또 하나의 깊은 울림을 안겨주었다.

《말없는 소녀》는 바로 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소설은 영어로 쓰였지만 영화는 작가와 작품의 배경을 고려하여 제목을 포함 모두 아일랜드어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이 영화의 감상은 아일랜드어가 영어와 얼마나 다른가를 확인하는 색다른 기회이기도 하다. 소설과 영화 모두 먼 친척에게 잠시 위탁된 한 소녀의 찬란한 여름을 다룬다. 위로 세 명의 언니와 아래로 한 명의 남동생이 있는 집안의 천덕꾸러기 소녀는 다시 임신을 하게 된 엄마의 사정에 따라 잠시 엄마의 먼 친척에게로 보내진다. 소녀의 아빠는 무책임하고 경박하다. 그리고 자신의 딸에 대해 지독하게 무심하기까지 하다. 그런 소녀가 단 한 철 머물게 된 남과도 같이 먼 친척 아줌마와 아저씨에게서 난생 처음으로 다정함을 겪는다. 책 뒤표지에 실린 한 줄 카피는 이 소녀의 처지와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사랑과 다정함조차 아플 때가 있다. 태어나 그것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에게는.”

천성적으로 말이 없는 소녀를 예쁘게 본 친척 아저씨는 소녀에게 말한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는 계속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실로 쓸데없고 독이 되는 말만 차고 넘치는 시대에 소녀의 말없음과 이 말없음을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하는 소설가의 말없음은, 그리고 이 말없음을 다시 영상으로 잘 담아낸 영화 역시 모두 다양하게 각자의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맡겨진 소녀’라는 원래 소설의 제목을 ‘말없는 소녀’로 바꾼 영화의 시도는 매우 적절해 보인다. 낯선 아일랜드어로 제작된 이 영화는 제72회 베를린영화제에서 2관왕을 석권했으며 아일랜드 영화 최초로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키건의 두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맡겨진 소녀』은 작고 사소한 친절과 배려가, 지극히 작은 다정함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 역시 엘리야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요란함과 장엄한 가운데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세미한 소리로 말을 거는 신으로 드러내신 적이 있다. 말없음이야말로, 작은 다정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이 아닐까? 모든 것을 이기려는 고함들이 도처에서 날뛰고, 위대함을 쟁취하겠다는 소동들이 난무하는 요즘 이 하나님의 성품이 더욱 절실하게 그립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