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김정훈 유고집, 성바오로 출판사, 1989

누구나 동경의 대상이 있다. 故김정훈 부제(1947-1977)가 그런 사람이다. 대학교 2학년 폐결핵을 앓아본 경험은, 그를 격하게 공감하게 했다. 진단 결과는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받았다. 메모지에 갈빗대를 대충 그린 의사 선생님은 폐 부위를 새까맣게 칠하고 영어를 흘려 썼다. 보건소에서 약 타는 용도였다. 약 대신 손에 책 한 권 사 들고 창경궁 귀퉁이에 누웠다.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를 읽었다. 벌겋게 눈이 충혈되도록 눈물을 흘리고 나니 어둑한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제 서품을 몇 달 앞두고 인스부르크 어느 산에서 조난하여 돌아오지 않는 몸이 되었다. 이 책은 그의 유고집(遺稿集)이다. 故김수환 추기경은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그가 떠나간 날 함께 등산했던 신부가 들려준 말에 의하면 언젠가 역시 함께 산에 갔을 때, 정상에 오른 정훈이는 백설(白雪) 위에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베드로…’ 이렇게 손가락으로 천천히 글씨를 쓰면서 깊이 생각에 잠기더라는 것이다.”

이 책은 추모의 글과 함께, 일기와 메모, 그리고 편지로 구성되었다. 중간중간에는 그가 스케치한 산맥의 사계절을 담았다. 소천 후 이듬해 1978년에 초판이 나오고 1989년에 나온 것은 중판이다. 중판 값이 2,800원. 격세지감이다. 이토록 오래고 낡은 책을 두서없이 꺼내어 보인다.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도록 바쁜 세상에 여백이 필요하다. 하늘 위로 번지는 풀 향기가 아쉽기는 물론이다. 그래서다. 기독교인이든 그렇지 않든 당신의 내면에 그 여백과 그 향기가 스며들기를 바라며 일독을 권한다. 

그는 가톨릭 신부가 되고자 했다. 동시에 참 인간이 되기를 바랐다. 매일 거듭나는 일상을 살기 위해 애쓴 흔적과 고뇌와 가슴 두근거림은 그가 사제 서품을 받기에 앞서 시편의 성경 구절을 택한 마음을 읽게 해준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시편 8:5) 필경 책을 덮는 순간 당신의 가슴에는 20대의 청춘이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배가 좀 고프고, 걱정거리가 있고, 어려움 속에서라야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1975년 7월 30일 오후 8시 반) 

“청교도적 자세! 순교자적 자세! 이걸로 전부를 살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닌 거다. 결국 모든 구실과 이유는 변명일 뿐이고, 확고하게 사는 것만이 나를 구제하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오직 이 길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그 근본이다. 매일 하루의 시간을 보내는 생활에서 이 모든 것은 얘기될 수 있다”(1973년 1월 27일)

20대의 중후반 일기에 성직의 순수성을 살고자 써내고 노력한 흔적이 맑다. 그 순수의 언어를 꾹꾹 눌러 새긴 일기가 당신에게도 기록되고 있기를 욕심내본다.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가 많다. 일상의 소박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故김정훈 부제는 이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해준다. 그것은 일기이며, 편지이며, 대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공기이며, 물이며, 산이고 바람이다. 나를 되찾아주는 예배의 자리이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생활의 현장이다. ‘나의 백서’에서 그는 고백한다. 

“언젠가는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쓸 필요를 꼭 느꼈고, 늘 잠재의식 속에서 써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나에 대한 백서를 백서답게 쓸 수 있다고는 생각 않는다. 내 자신을 완전히 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각도에서 어떤 부분만을 고찰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두 개의 ‘나’-남이 기대하는 나,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내가 아는 나-두 세계 중 어디에도 안주 못하며, 오늘은 여기에 내일은 저곳으로. 그리스도교적 진리와 내가 알기를 원하는 진리. 왜 두 개의 ‘나’가 있는가? 왜 하나만을 가지려 철저히 노력하지 않는가? 두 세계가 다 ‘내’게 실존적 의미가 있으므로.”

우리가 일상에서 잃어버린 가치들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만의 ‘나의 백서’에서 살아나길 바란다. 어느덧 믿음을 벼르며 경쟁으로 들어가 버린 교회들과 성도들과 목회자들의 정체성이 회복되고 사랑의 군불이 지펴지길 바라는 마음도 물론이다. “고독이 끝 간 데까지, 내 실존의 그 밑바닥에까지 가야만 되는 것이다. 거기 창조가 있고 생명이 있고 하느님이 계시는 것인데, 나는 전혀 거기까지 가질 못하고 있다. 거기까지 단 한 번도 빠져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 무슨 활력을 얻어 초승달의 신비며, 겨울 속 곧은 나목(裸木)을 느낄 수 있었으랴. 그러니 사는 게 영 초점이 없고 예수님은 약간만 고마울 뿐이었다.”

그의 유고집을 낸 동창 신부들은 책 머리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미완성인 채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누군들 완성을 하고 주님께 갈 수 있을까? 그는 예수님께 약간만 고마울 뿐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약간의 고마움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이 책은 순수하고 영롱했던 당신의 처음 믿음 지점으로 데려가 준다. 

유성원 목사 (서초 주님의 몸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