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미 토울스)

마지막 장을 넘길 때 대장정을 마친 듯이 뿌듯한 책이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서부터,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르마조프씨네 형제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니나> 같은 대작들이 그렇습니다. 소설을 허구라 폄하하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대단함이 있습니다. 격동하는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탐구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의 내면을 추적하고, 나의 방향과 위치는 어디쯤인지 숙고하게 합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소설도 긴 호흡으로 도전해볼만 합니다. 에이미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는 출간되자마자 고전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입니다. 흥미진진한 전개에 생각보다 빨리 읽히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볼세비키 혁명의 격동기에 목숨은 건졌으나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에 연금된 채 살아야하는 알렉산드로 로스토프 백작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해 겨울, 하노이 레닌 공원 근처 허름한 호텔방에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아련한 감정이 떠오릅니다. 관광객과 하노이 시민들, 그리고 양복 입은 관료들로 가득한 거리를 걸으며 ‘품격있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곱씹어보았습니다.

로스토프 백작은 볼셰비키 혁명 격동기에 혁명에 동조하는 시를 쓴 이유로 구제를 받습니다. 혁명 정부는 다만 메트로폴 호텔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사실 로스토프가 썼다는 시는 자신의 작품이 아닙니다. 젊은 지식인이었던 친구가 쓴 시입니다. 로스토프는 친구가 그 시를 발표하면 차르 정권에 위협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안전을 보장받는 자기 이름으로 대신 발표합니다. 이 일로 혁명 정부는 로스토프가 자기들이 감명받은 시의 작가인줄 알고 살려줍니다.

백작이라 하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메트로폴 호텔에 연금되었을 때 백작의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습니다. 그는 호텔 다락에서 기거하고 1층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평생을 보냅니다. 그 곳에서 늙어가는 동안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호텔 직원들 뿐만 아니라, 정보기관 요원이나, 젊은 혁명주의자, 그리고 그의 딸. 백작은 젊은 혁명주의자가 혁명 완수를 위해 타지로 떠나간 사이 그 딸의 보호자요 가정교사가 됩니다.

어찌보면 혁명주의자들은 백작의 적이었습니다. 적백내전에서 혁명주의자와 귀족은 적군과 백군으로 갈라져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백작은 젊은 혁명주의자들을 악의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따뜻하기까지 합니다. 백작은 담담하게 생각합니다. 시대는 변하는 것이고, 변해야 한다고. 

민중 혁명을 사유화하는 스탈린 독재와 공산당의 역행 속에서 변화와 인간을 대하는 백작의 품격은 더욱 빛납니다. 한 소녀의 삶 속에서 은은하게.

하노이 거리에서 오토바이 물결이 점령한 횡단보도를 건널까 말까 고민하던 중에, 품격은 변화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더랬습니다.

며칠 전, 번역자인 이동원 목사님께 <탁사 최병헌의 연설초집>을 선물받았습니다. 받자마자 몇 편의 연설문을 읽으며 얼마나 배움에 열의가 있고, 변화에 민감한 분이었나를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침탈당하는 민족의 선봉에 서서 불의에 항거하고, 계몽에 앞장서던 당시, 그리스도인은 배움에 열의가 있었고 변화에 뒤쳐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교회를 보면 민족이 나아가야할 방향이 보였고, 사람들은 민족을 위하는 교회, 민주주의와 인권에 앞장서는 교회라 인정했습니다. 교회는 늘 탄압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인의 언어와 삶에는 품격이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더욱 더 민주적이며, 더욱 더 과학적이고, 더욱 더 다양성을 존중하며, 더욱 더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독재자를 찬양하거나, 과학적 사고를 배격하거나, 다양성과 소수자를 혐오하는 목소리는 발붙일 수 없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동물 학대가 처벌받고 동물 복지까지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도도한 변화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위치에 있으며,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품격은 그럴듯한 옷차림과 말투가 이나라, 변화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에이미 토울스의 교훈 앞에서, 신앙인의 품격은 어디에 있나하는 깊은 시름에 잠깁니다.

우동혁 목사 (만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