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이기주, 말글터, 2019

감정을 오롯이 글에 담고 싶을 때가 있다. 진심을 전하고 싶을 때다. 그런데 막상 자판에 손을 얹으면 자판과 손가락이 닿아 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내 생각과 무척 동떨어진 문장을 만나기 일쑤다. 내 맘 같지 않은 문장은 길어지게 마련이고 그 길어진 꼬락서니는 사람 속을 긁는다. 연애편지를 쓰던 시절엔 그 증상이 극에 달해 애먼 모국어를 타박했던가? 애당초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지경까지 감정을 키운 내 자신을 나무랐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졸업 작품으로 에세이를 쓰는 계절이 오면 운동장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학생을 종종 본다. 글이 막혔거나 써놓은 글이 영 맘에 들지 않는 모양새다. 자라는 법이 없는 고목처럼 땅에 심어진 모양새다. 일단 그런 꼴이 되면 그 학생이 자신과 분투하여 다시금 자신의 글을 마주하기까지 속으로 응원하며 기다릴 수밖에, 도울 방도가 묘연하다. 그런 꼴을 보기가 쉽지 않은 필자에게 좋은 수가 생겼다. 애당초 그런 꼴이 되지 않도록 돕는 일이다. 일찌감치 <언어의 온도>를 권하는 일이다. 

<언어의 온도>의 저자 이기주 작가는 그의 마음을 글에 잘 담아냈다. 작가는 더 보탤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문장을 쓴다. 처음엔 문장이 좋았는데 점점 그 문장이 담아내는 저자의 마음이 더 좋아졌다. 저자가 책의 제목을 ‘언어의 온도’라고 지은 이유가 책의 모든 페이지에서 발견된다. ‘멋을 내지 않은 멋’이 나는 저자의 문장을 은연중 시샘하였던지, 글을 완성하기까지 많이 고쳐 쓴다는 저자의 말이 반가웠다. 고쳐 써서 저자처럼 쓸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고쳐 쓰겠다. 그런데 저자에게 고쳐 쓰는 일이란 자신의 마음과 글의 거리를 점점 좁혀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정작 저자처럼 쓰기 위해선 저자의 언어의 온도, 즉 마음의 온도를 닮아야 하겠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과 그 온기를 담아내기까지 고쳐 쓰는 자세, 단문 위주의 깔끔한 문장, 모든 것을 닮으라고 학생들에게 강권하고 싶다. 사실 필자가 먼저 닮고 싶다. 

저자는 어찌 보면 일기와 같은 짧은 글에 제목을 붙여 책으로 엮었다. 그런데 어떤 제목의 글도 없어도 괜찮은 글이 없다. 짧아도 충분하다. 저자는 억지스럽지 않은 문장으로 하고 싶은 말이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표현한다. 가독성이 무척 좋아서 오히려 속으로 소리 내서 천천히 읽었다. 대체 어떻게 써야 이렇게 잘 읽히는지 알고 싶은 욕심에서다. 그리고 저자의 언어가 간직한 저자의 온기를 성급히 책장을 넘기는 바람이 흩어버릴까 싶어서다. 

저자가 그림을 그리듯 그려낸 한 장면을 소개하며 마치고 싶다. 

 병상에 있는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인 게 분명했다. 난 바로 뒤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통화 내용을 엿듣게 됐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녀가 남편에게 읊조린 한마디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녀는 꽤 긴 통화를 마치면서 뭔가를 고백하듯 말했다. 
 “그래요. 당신이 곁에 있어 참 다행인 것 같아요. 나도 당신 덕분에 버티고 있나봐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렸다. 한편으론 의문도 들었다. 아니, 환자의 보호자가 환자 덕분에 버틴다니, 무슨 말이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번쩍하고 머리를 스치는 글귀가 있었다. 

 애지욕기생(愛之欲基生)이란 말이 퍼뜩 떠올랐다.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한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생각에 휩싸였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애지욕기생’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닥친 현실은 녹록하지 않지만 남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동력으로 삼아 주어진 삶을 버티고, 아니 이겨내고 있는 게 아닐까. 

 짐작건대, 그녀는 남편에게 틈틈이 전화를 걸어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진심 어린 말로 사랑을 고백할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의 아픔을 어루만질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숭고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확인할 것이다. 
 “당신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라고 속삭이며 ̛ ̛ ̛. (109-110,애지욕기생 중에서)

김국진 목사 (산돌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