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오르미나 그레코-로만 원형극장(Teatro Greco-Romano, 3c BC)

1

얼마 전 이태리 시칠리아 자르디니-낙소스(Giardini-Naxos)에서 열린 KMC 유럽지방 신년성회에 다녀왔다. 

자르디니-낙소스는 메시나 광역시에 속한 작은 해안 마을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시칠리아에 건설한 최초의 식민도시 낙소스(Naxos, c.735 BC)를 역사적인 기원으로 한다. 

낙소스, 시라쿠사(Siracusa, c.734 BC), 메시나(Messinac.728 BC) 등은 에게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리스인들이 이오니아해로 진출해 시칠리아 동부 해안에 세운 식민도시로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들과 함께 이들을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라 불렀다.   

기원전 8세기,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라는 지형적 특성상 느슨한 동족의식 가운데 각각의 폴리스들이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이루며 유사시 동맹의 형식으로 결합하던 시대로 해외의 식민도시들 역시 개별성이 강한 폴리스 체제를 이루었다.  

그리스 본토에서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전쟁(Peloponnesian War, 431–404 BC)이 벌어졌을 때, 시칠리아 동부 연안의 폴리스들도 아테네계와 스파르타계 두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당시 스파르타계에 속한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Dionysios I, c.432-367 BC)는 메시나를 위시해 아테네계 도시들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고대도시 낙소스가 철저히 파괴(403 BC) 되어 주민들은 인접한 산악 마을 타오르미나로 이주하였다.       

해발고도 204m의 타우로산(Monte Tauro) 절벽 고지대로 이주한 낙소스 난민들은 50여 년에 걸쳐 선주민들(Siculi)과 함께 그리스식 폴리스 타우로메니온(Tauromenion, 358 BC)을 건설하여 재기하였다.

▲ 타오르미나 산 주세페교회(Chiesa di San Giuseppe, 18c)

▲ 2017년 타오르미나에서 개최된 G7 회의

▲ 2024년 유럽지방 신년성회

                
2

신년성회를 마치는 날 펠로리타니 산줄기(Monti Peloritani)를 굽이굽이 돌아 타우로산 높이 세워진 타오르미나(Taormina)에 오르면서 고향을 떠나 디아스포라 이주민으로 낙소스에서 살다가 또다시 난민의 처지로 이 산비탈을 올랐을 고대인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도시에 들어서며 받은 인상은 한편에는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바다가 있고, 다른 편에는 높은 산줄기로 막혀 있는 그 사이의 공간에 주거가 밀집해 있는 모습에서 도시가 형성될 때 유사시 외부의 침입에 대한 방어기능을 우선으로 하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결과 도시의 경관은 카타니아 문(Porta Catania)과 메시나 문(Porta Messina), 두 개의 성문 사이에 있는 움베르토 거리(Corso Umberto)에 구시가지가 펼쳐져 있는 모습을 지닌다. 
   
이른 오전 시간, 카타니아 문을 지나 도시의 초입에 있는 대성당(Duomo San Nicolò, 13/ 15c)에 들어서면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햇살에 제단의 촛불 연기가 어우러져 바실리카 목조천장에서 자아내던 영롱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는 며칠간의 집회와 회의로 쌓인 고단함을 풀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이때 갖게 된 타오르미나에 대한 좋은 기억이 이 글을 정리하게 된 계기이다. 

▲ 타오르미나 메시나 성문(Porta Messina)

▲ 타오르미나 대성당(Duomo San Nicolò, 13c/15c)

▲ 타오르미나 대성당 내부

▲ 타오르미나 대성당 제단

▲ 타오르미나 대성당 목조천장

중세양식의 시계탑(Torre dell’Orologio)을 통과하면 눈 아래에 자르디니-낙소스 해변이 그리고 눈 위로는 웅장한 활화산 에트나(Etna)를 조망할 수 있는 도시에서 가장 넓은 ‘4월 9일 광장’(Piazza IX Aprile)이 전개된다. 

광장에 세워진 바로크양식의 교회 산 주세페(Chiesa di San Giuseppe, 18c)와 고딕양식으로 지은 산타고스티노(Sant’Agostino, 15c) 예배당은 도시의 품격을 더해주며 지금도 다른 지역에 비해 가톨릭 신앙이 두터운 시칠리아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4월 9일 광장이라는 독특한 명칭은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전쟁 당시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Maria Garibaldi, 1807-1882)의 붉은 셔츠단이 부르봉 왕조 지배하의 시칠리아를 해방하기 위해 1860년 4월 9일, 마살라(Marsala)에 입항하였다는 소식이 와전되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실제로 가리발디의 군대가 도착한 것은 한 달 후였지만 외세의 압제에 시달리던 시칠리아 민중들이 그 당시 얼마나 희망과 환희에 부풀어 있었는지의 역사적인 기억을 광장의 이름이 전해 주고 있다.

▲ 타오르미나 거리풍경

▲ 타오르미나 거리풍경

▲ 타오르미나 산 주세페, 4월 9일 광장

▲ 타오르미나 산타고스티노(Sant’Agostino), 4월 9일 광장

▲ 타오르미나 4월 9일 광장(Piazza IX Aprile)

▲ 타오르미나 4월 9일 광장에서 내려다본 해안

시칠리아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도래하기 전 페니키아 해상무역의 거점이었으며 그리스인들이 동부 해안에 폴리스를 세울 당시에 서부 해안은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음으로 그때부터 이미 외세의 각축장이 되어왔다. 이후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포에니 전쟁(Punic War, 264-146 BC) 후 로마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곧이어 비잔티움의 지배와 아랍의 정복을 경험한다. 
연이어 노르만왕조, 호엔슈타우펜가, 아라곤왕국, 부르봉왕조의 지배 등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겪었다. 

코발트블루의 이솔라 벨라(Isola Bella) 해변을 발아래에 둔 이 아름다운 광장의 이름에 시칠리아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3

고대 폴리스의 아고라에 해당하는 저잣거리를 둘러본 후 드디어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아크로폴리스와도 같이 산허리를 깎아서 만든 그레코-로만 극장(Teatro Greco-Romano) 답사길에 올랐다.     

그레코-로만이라는 명칭은 낙소스에서 이주한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3세기에 건축한 원형극장(Teatro)을 포에니 전쟁 이후 시칠리아의 지배자가 된 로마인들이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에 세 차례에 걸쳐 로마식 경기장(Anfiteatro)으로 개조한 데서 유래한다.        

동일한 공간의 시설을 개축·증축하였기 때문에 건축물을 살펴보면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대조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다.

▲ 타오르미나 그레코-로만 원형극장(Teatro Greco-Romano, 3c BC)

▲ 타오르미나 그레코-로만 원형극장(Teatro Greco-Romano, 3c BC)

▲ 타오르미나 그레코-로만 원형극장(Teatro Greco-Romano, 3c BC)

▲ 타오르미나 그레코-로만 원형극장 유물

▲ 타오르미나 그레코-로만 원형극장 유물

▲ 타오르미나 그레코-로만 원형극장(Teatro Greco-Romano, 3c BC)

      
헬레니즘 시기에 세워진 그리스 원형극장(3c BC)은 관람석(Theatron)의 크기가 직경 109m, 합창단(Khoros)의 연주 공간인 오르케스트라(Orkhestra)의 직경이 35m로 약 54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것은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시라쿠사의 그리스극장(5c BC) 다음의 크기로 난민의 시련을 딛고 일어서고자 했던 당대 타오르미나인들의 비장한 결의가 느껴진다.   

(오르케스트라는 원래 무대와 객석 사이에서 합창단이 연주하던 반원형의 공간을 뜻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연주자들로 이루어진 관현악단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무대 시설(Skene) 너머로는 웅장한 에트나 화산과 스키조 만의 푸른 바다가 관객들의 시야에 들어와 자연적인 풍광이 배경을 이루어 무대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의 서사적 깊이를 더해주었다. 역사와 문화, 자연이 어우러지는 심오하고 아름다운 무대장치인 셈이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그의 ‘이탈리아 기행기’에서 이러한 모습을 대하며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훌륭한 작품(das ungeheuerste Natur- und Kunstwerk)이라고 찬탄하였다.   
     
그런데 시칠리아의 새로운 주인이 된 로마인들은 우선 관람석(Cavea)을 신분에 따라 구분하였으며, 과거 합창단이 공연하던 오르케스트라에 모래를 깔고 그 아래에 지하 시설을 설비해 이곳에서 검투사(Gladiator) 경기와 맹수들을 상대로 인간이 피 흘리며 싸우는 경기(Venationes)가 벌어지는 로마식 투기장으로 그리스극장을 개조하였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코린트 양식 기둥 사이의 벽감들이 조각품으로 장식된 여러 층의 건축물을 세움으로 무대배경을 이루게 하였다. 관객의 시선에 자연의 풍광보다도 건축물이 함유하는 로마제국의 문명과 풍요가 먼저 들어오며 그 위력의 발현인 투기 관람에 집중토록 한 것이다.  
         
로마제국의 투기(鬪技) 문화에 대해 정복 전쟁에 기반한 노예제 사회였던 로마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살인과 유혈, 인간의 고통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는 키케로(Cicero, 106-43 BC) 식의 심리적 이해와 설명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전에는 장엄한 자연을 배경으로 아이스킬로스(Aischylos, 525-455 BC), 소포클레스(Sophokles, 496-406 BC), 에우리피데스(Euripides. 480-406 BC)의 인간 내면과 운명의 심연을 다룬 그리스 비극(Tragoida)이 공연되던 바로 그 자리에서 검투사들의 피가 잘 흡수되도록 모래를 깔고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경기가 행해졌다는 데에서 두 문명의 성격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고대 그리스연극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시기가 그리스 민주주의의 형성 시기와 일치하며 로마제국의 군사주의가 창궐했던 팍스로마나 시기에 인간의 유혈을 관람하는 경기(Arena)가 활성화되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인간의 욕망과 본성, 인간의 근원적인 죄성(罪性)을 여과 없이 드러낸 드라마 현장이 로마의 투기장이었다고 여겨진다. 생각을 좀 더 진전시켜보면 왜 결국 현세적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던 로마제국이 스스로 영혼의 가치를 중시하는 기독교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사회의 종언 이후 그에 대한 반동으로 신앙을 극대화한 중세사회로 진입하였는지를 가늠하기에 이른다.   

▲ 타오르미나 고대극장에서 바라본 에트나화산

▲ 타오르미나 고대극장에서 내려다본 이솔라 벨라(Isola Bella) 해변

4

오늘날 공연장을 의미하는 Theater는 고대 그리스극장의 객석을 뜻하는 테아트론(Theatron)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은 현상 이면의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탐구하고 관찰하듯이 바라보는 그리스어 동사 테아오마이(Theaomai)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객석(theatron)에 앉아 연극을 관람하며(theaomai) 자기 자신과 인간의  삶을 통찰하고 그 본질적인 의미를 질문하였으며 비극적인 주인공의 최후를 바라보며 죄와 욕망으로 오염된 자신을 정화하고 이전보다 나은 새로운 삶을 추구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본토는 물론 식민도시에 극장을 건설해 연극을 관람한 것은 오늘날의 견지에서처럼 문화·예술적인 동기보다는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지적한 것처럼 디오니소스제전(Dionysia)과 연관된 종교적인 카타르시스(Katharsis)가 목적이었다.   

그럼에도 힘겨웠던 난민의 처지에서 타우로 산을 깎아 높은 언덕에 극장을 건설하고 멀리 에트나 화산과 바다를 배경으로 연극을 관람한 그리스인들의 정신세계는 우아하고 고상하게 느껴진다.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은 ‘그리스미술모방론’에서 라오콘군상에 대해 서술하며 그 예술적 특징을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Edle Einfalt, stille Große)에 있다고 규정지으며 그리스미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 타오르미나 고대극장의 아우라가 주는 감동에 대한 표현을 이 말로 갈음한다.                              

임재훈목사
독일 칼스루에벧엘교회 담임
유럽기독교문화예술연구원장     
 

▲ 임재훈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