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큰 어른, 이어령

(<이어령, 80년 생각>, 김민희, 이어령 지음, 위즈덤하우스 출판)

이 책은 이어령의 제자이자 기자인 저자가 이어령 교수와 함께 그의 생 80년을 되짚어보며 어린 시절부터 그의 창조의 씨앗은 무엇이었는지, 창조적 생각은 어디로부터 오는지 대해 그와 나눈 100시간 정도의 인터뷰를 담아낸 책이다. 

어린 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사유하며 자신의 생각으로 기어코 세상을 바꾸는 사람. 좋은 생각이 무궁무진해도 생각만으로 그치는 이가 있고 리스크를 안고서라도 기어이 실행해내는 사람이 있다. 그는 당연히 후자였고, 그는 안될 것 같은 것을 되게 하는 사람,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구현해내는 사람, 그 아이디어로 세상에 한 획을 긋는 사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것은 ‘그 시대에 이게 가능했다고?’ 하는 물음이었다. 보수적이고 획일적인 것이 미덕인 시대에 이렇게나 깨어있는 분의 생각이나 의견이 결론적으로 수용되어졌다는 것과 무수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이고 새로운 도전과 행보들이 결국엔 실제로 모두 구현되었다는 것이 굉장히 놀랍고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저자 김민희는 말한다. “생각과 실천은 다른 얘기다.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구현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니까.”

“사람들은 안 되는 쪽으로만 생각해요. 안 되는 걸 되게 해야지.” - 이어령 교수의 말 중에서. 

그는 여리고 풍부한 예술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실행력까지 좋을 수 있지? 라는 궁금증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지적 호기심과 어머니의 문학적 감수성을 물려받아 그의 안에 이성과 감성이 공존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는 꿈만 꾸지 않았고 꾸는 꿈들을 실현화했다.

“나는 우물을 파는 사람이에요. 갈증을 씻기 위해 우물물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그 갈증으로 우물을 파는 사람, 남이 만든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내는 사람 쪽이지.”

그는 다수가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용기있게 뚜벅뚜벅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수많은 업적 중에 “쌈지마당”이 마음을 울렸다. 그는 문화란, 일상속에 스며있는 작은 감동과 아름다움이라고 이야기했다.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지역의 사람들, 먹고 사는 일에 치여 일상속에서 소소한 감동이나 아름다움을 누릴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 문화를 누리게끔 해주고자 한 이어령 교수. 그는 달동네 사람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문화 공간인 쌈지마당을 기획하고 만들었다.
  
그는 쌈지마당을 이렇게 표현했다. 쌈지마당은 호수의 중심에 던지는 작은 돌멩이 하나와도 같았다고.

어떻게 그 시대에 이런 분이 있었을까? 하는,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이어령 교수는 교육자 집안에 분명히 기득권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가난하고 문화적으로 소외될 수 있는 이들,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그 마음이 참 귀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생명을 귀히 여겼던 이어령 교수, 그의 마음 안에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커다랗구나 라고 느껴졌다.

이어령 교수는 스스로를 천리마(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가 아닌, 천리마를 감별해 내는 백락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정말이지 천재적 재능이 있는 이들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 천재 작가 이상을 재평가하여 <이상 문학상>을 제정하는데 큰 기여를 했을 뿐더러,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화가 이우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소설가 박완서, 최인호, 김승옥 작가, 등 우리나라의 굵직굵직한 예술가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끝까지 후원했으니 말이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기면서 비로소 무언가가 ‘되기’ 시작하지. 그게 진짜 교육이야.”

어떤 이가 가진 달란트를 알아봐 주는 단 한 사람의 어른만 있어도 그 사람은 그 어른의 믿음을 안고 자신 안의 재능을 무궁무진하게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게 그의 존재가 퍽 고맙고 위로가 됐다.

이어령 교수는 한국이 세계에서 국민의 아이큐가 제일 높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 체계는 천재들의 날개를 꺾어 버린다고 표현했다. “천 리는 커녕 백 리도 달려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야 했던 천리마들, 한국의 숨은 피카소, 숨은 아이슈타인이 얼마나 많을까? 미국이 아직도 기회의 땅인 것은 천리마를 알아보고 천리마를 맘껏 달리게 해 주는 사회이기 때문이지.” 

한국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으로 인해 아이들은 타고난 천재성과 창의성조차 잃어버리게 되고 피지 못한 채 져버리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봐왔고 잘 알기에 이어령 교수의 말에 강한 공감이 되었다.

“예술가는 무인도에서 상처를 끌어안고 혼자 괴로워하는 존재야.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마찬가지지.”

예술가들의 고충을 꾀고있던 그. 예술가들 중 어떤 이는 죽고 난 다음에서야 이름을 알리고 죽어서도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람 또한 셀 수 없을 테다. 그 시대 한국의 천리마들을 알아봐 주고 세상에 알리며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이어령 교수. 우리나라에 그가 존재하였음에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 특징은 유년 시절의 상상력과 호기심, 반짝이는 어린아이의 눈동자를 지금까지 잃지 않았다는 거예요. 젊은이들도 어린아이의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고, 일터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일터를 만들고 인생을 바깥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었으면 해요.”

직장이 아닌 평생의 업,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이십대서부터 현재까지 분투해오던 내게, 너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고 말해주시는 것만 같았다.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 저자는 이어령 교수에게 묻는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이어령 교수는 “생명”이라고 답한다. 생명 자체가 목적이고, 찬란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는 어떤 절망의 시대에도 생명의 힘은 놓치지 말아달라 당부한다. 

그의 생 전체의 여정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을 속속들이 들으면서 나 또한 이어령 교수 곁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때로는 전율이 흐렀고, 눈물이 차올랐으며, 마음 안의 뜨거운 것이 일렁였다. 그는 대체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커다란 어른이셨구나 새삼 깨닫는다. 그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나라에 대한, 생명에 대한 큰 사랑을 품은 시대의 어른이 또 나와주길 바란다. 나도 애정을 품고 내 주변의 보물들을 알아봐 주어야지. 그들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들로 이 땅에 작은 기여를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 보아야지 하는 꿈을 꾸어본다.  

김은진 (윌로우리버 연합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