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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스토리] 어머니의 절규나의 가족사...두 사람의 슬픈 과거..전쟁이 가져온 운명
김동학  |  lovekorea04@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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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2월 07일 (수) 00:00:00 [조회수 : 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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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아야진에서 지낸 나는 이제 팔순을 훨씬 넘긴 어머니와 함께 지내며 마치 어린 날 들었던 동화를 듣듯이 지나간 과거를 영화처럼 보는 즐거움에 빠졌다. 6,25 전후의 남과 북 어머니는 안동김씨 가문의 예의바른 규수로 20대에 엄씨를 만나 혼인을 했고 슬하에 3명(2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런데 남편은 6.25직전 당시 고성군 죽왕면의 면당 서기가 되어 좌익 혹은 인민공산당으로 앞장섰단다. 친아버지는 끝까지 그 일을 즐거워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는 남편이 하는 일을 도울 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 결국 여맹위원회에 가입했고 한국전쟁전 1년간 그 일을 마지못해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좌우대립이 심했고 그 사상 노선에 따라 유,불리가 확실했으며 심지어 남편이 당을 좇아 월북한 후 방첩대와 마을 주민들로부터 심한 고문과 박해를 받아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시게 되었다. 운명적인 만남 남편을 빨갱이로 둔 덕분에 어머니는 30도 안되는 나이에 막내 아들인 **형을 업은 채 전기고문을 받았고 그 고통은 마치 살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고 나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 피해를 보상받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 울컥 치밀었지만 어머니의 증언은 계속된다.... 그 후 어머니는 세 남매를 데리고 고향인 문암지역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 그 사이에 나중에 나를 낳게 한 아버지 김씨를 만나게 되는데. 화려한 여성 편력의 아버지 내 아버지는 정확히 현내면 마차진리...통일전망대가 수 킬로밖에 안 떨어진 민통선(민간인통제구역) 가까운 마을에서 태어났다. 25세때 백부(큰 아버지)의 소개로 가까운 동네의 여성과 혼인한 뒤 가정형편이 더 나았던 그 분이 집으로 간 뒤 오지 않아 결국 혼인이 깨어졌다. 그 후 흥남 비료 공장으로 들어갔고(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런 과정이 있었는데..나는 어렸을 적 이 이야기를 들었고..지금 어머니때문에 다시 재구성이 가능해졌다) 거기서 가까운 서평양에서 기생 출신인 유(柳)씨를 만나(당시28세) 그 분과 가까워지고 그 분은 아버지를 따라 마차진까지 왔지만 아버지의 도박 근성때문에 마침내 포기하고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그 때 두 분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고... 두 사람을 갈라놓은 전쟁 그 후 흥남에서 비료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아버지는 33세에 인민군으로 차출되어 한국전에 투입되었고. 그 사이에 어머니는 불리한 전세에 따라 월북한 형들의 아버지인 엄씨까닭에 고문을 받고.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에 따라 거제도에서 나와 다시 고향에 정착했다. 6.25이후 고성군의 편제는 이제 자유 민주주의의 한국에 속하고 있었고. 아직 재가하지 않은 어머니(당시32세 가량)-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4살 차이-와 만나게 되는데 아버지는 아무 것도 없었고 어머니는 전 남편 명의의 땅이 있으므로 그 땅을 경작하며 겨우 살림을 이끌어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려운 보리고개, 두 가족의 수난사 나는 우리 집의 맨 막내로 태어났으니 어머니가 40세에 날 낳았는데 때가 64년이니 보리고개가 있었고, 형들은 이미 성장해 다 집을 떠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양아버지가 된 내 아버지는 전 남편의 아들인 두 분의 형님들을 잘 해 주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댓가로 형들은 스스로 사는 법을 배웠고 이미 돌아가신 큰 누님--내가 초등학교5학년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어린 조카와 함께 사망-은 별도로 하고도 제일 윗 형은 17세때 이발 기술을 배워 남의 집에서 시작 지금까지 그 직을 가지고 있다. 작은 형은 불만도 많았고 별다른 직업이 없었지만 토목등을 배워 건축일도 하고 농사도 지으면서 참 어렵게 어려서부터 남의 집 머슴으로 살면서도 이제까지 꿋꿋하게 살고 있다. 이런 가족의 수난사 뒷편에는 한국전쟁과 좌우 이념의 대립이라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전쟁이 안 일어났거나 형의 버지가 월북을 포기하고 전향했으면 난 태어나지 못했다. 만약 내 아버지가 처음 결혼한 재옥이라는 분과 잘 살았거나 유씨 부인과 잘되었더라면 또 전쟁이 안 일어나 지금의 내 어머니-김옥희-를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이 세상에 없다. 참 신기하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고도 오묘한 섭리가 느껴진다. 이런 나의 가족사이기에 이제 하늘나라를 가까이 두고 계신 어머니를 보면서 꼭 어딘가에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고 있다. 미공개된 사건들 일제 시대에 일본의 징용으로 갔던 아버지의 이야기, 거제도에서 오줌을 받아 먹으며 견딘 인민군 포로생활, 평생 기호 1번(여당) 후보만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끈질긴 나라 사랑(?), 형들의 감추어진 수난사,어머니의 말못할 절규..... 불과 수 년전 나와 함께 통일전망대에서 고성(장전)을 바라보면서 그 바닷가에서 멱을 감던 곳이 내 고향이란 말을 하실 때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나의 다하지 못한 이 민족 사랑이야기는 다음기회로 넘기자....(바울) 내게 큰 눌림이 예수 안에서 있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 또 내가 내 동족을 위해서 그리스도께 끊어질지라도 내 양심이 내가 어떻게 이 민족을 사랑하는지 증거한다는 바울의 고백이 내 고백이고 내 어머니의 고백일 거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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