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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커피’
조진호  |  jino-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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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년 03월 02일 (토) 02:30:55
최종편집 : 2024년 03월 02일 (토) 02:31:43 [조회수 :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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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커피’ 

우리나라에 직접 로스팅한 드립 커피를 처음 들여온 선구자 중에 박이추란 분이 있습니다. 커피에 대해 먼저 깨우치신 분이니 그분을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박선생님은 1988년 부터 우리나라에서 드립 커피를 시작했습니다. 

혜화동에 자리했던 그의 커피숍이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몰리게 되자 박선생님은 인적이 뜸한 강릉 근처 작은 해변 옆 언덕으로 옮겼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서두르지 않고 손님들에게 자신이 직접 내린 커피를 대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러 강릉으로 몰리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강릉이 커피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박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커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냥 커피’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커피’입니다.” 처음에 저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한 분야의 길을 오래 걸은 명장의 말이었고 그 말의 느낌이 좋아 제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그래도 커피’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처음 커피를 마실 때는 그 맛이 그 맛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다가 저마다 자기만의 취향을 찾아냅니다. 저는 산에 오를 때면 뜨거운 물과 드립백 커피 그리고 컵 두세 개를 가방에 챙깁니다. 산에 올라 내려 먹는 커피, 기왕이면 동행한 사람, 혹은 산에서 만난 누군가와 나누어 먹는 커피가 제일 맛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그 맛을 알아 갈수록 커피의 세계가 넓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알면 알수록 더 다채로워지고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커피 맛을 찾아 여기저기를 다닙니다. 

좋은 커피집을 분별하는 저의 방법이 있습니다. 에스프레소나 에스프레소보다 더 적은 물로 빠르게 추출하는 리스트레토를 먹어보면 됩니다. 에스프레소는 커피의 기본 기본입니다. 물이나 얼음을 넣어서도 안 되고 설탕이나 우유 등 다른 재료를 섞어서도 안 되기 때문에 에스프레소에는 그 집 커피의 본연의 맛과 커피를 대하는 기본자세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때때로 에스프레소 전용 잔도 없는 커피집을 만나면 밥을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한정식집을 차린 것 같아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물론 이 또한 저의 취향일 뿐입니다. 무언가 깊은 세계를 조금 맛보았을 때가 가장 겸손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본질의 깊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좀 있으신 분 중에서는 이 커피 저 커피 다 먹어봐도 종이컵에 타 먹는 노란색 믹스커피가 제일 맛있다고 하는 분이 꽤 많습니다.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취향을 존중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이 있어야 우리는 커피가 주는 진정한 맛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저마다 인생 최고의 커피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까지가 ‘그냥 커피’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래도 커피'는 무엇일까요? 

세상의 모든 커피를 존중하며 '그냥 커피'를 즐기다 보면 맛과 향을 넘어서는 커피 자체가 주는 선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떠한 효용성을 넘어서 그냥 커피 한 잔이 고마워지게 됩니다. 오래된 광고 카피 대로 맛과 향을 떠나 커피 한 잔이 주는 ‘느끼면서 즐기는 삶의 여유’가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내 앞의 잔 속에 커피 한잔이 있다는 사실이, 그 잔을 마주한 그 너머에 누군가, 혹은 무언가 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고맙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래도 커피’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마실 거리가 있지만, 그리고 커피에도 맛의 다양성과 좋고 나쁨이 있지만, 그 모든 조건을 넘어 커피만이 주는 위로와 낭만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다른 거 다 마셔봐도 다시 커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게 바로 ‘그래도 커피’입니다. 

'그래도 커피'....박선생이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이 밀려드는 서울을 떠나 조용한 강릉 바닷가로 커피집을 옮긴 데서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커피집을 하게 되면 때로는 몰려드는 사람들이 버겁기도 하고 사람이 많고 다양하다 보니 그중에는 이런저런 말이나 무례한 태도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바닷가로 도망치듯 떠났는데 거기에도 사람이 몰립니다. 누구보다 커피를 사랑했지만 커피 때문에 많은 상처를 입은 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커피를 내립니다. 커피의 맛과 향, 커피가 주는 그 쉼을 대체할 만한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래도 커피’인것이지요. 

‘그래도 커피’! 그 커피의 장인이 저와 같은 생각으로 그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저는 이제껏 박이추 선생이 내려 준 커피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인파를 떠나 조용한 바닷가에서 커피의 본질에 충실하려 애쓰는 그 장인의 커피를 먹고 싶어서 서너 번 찾아갔는데 한번은 사람이 너무 많아 발길을 돌렸고 다른 때에는 갈 때마다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이익 앞에서는 장인의 고집도 결국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몇 년 전 그 커피집 아래쪽 해변에 같은 상호로 대형 커피점이 오픈한 것을 보고는 더 이상 그의 커피를 맛보러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이제 제게는 어느새 저만의 ‘그래도 커피’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gL-ZkWzeGaY?si=b1JSkg9ZfQyT6q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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