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습관>, 도리스 레싱, 문예출판사, 2018)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의 작품 중에 <다른 여자>라는 중편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영국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건장한 남자들은 죄다 전쟁터로 끌려간 뒤, 남은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연애상은 어땠을까.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주인공 로즈에게는 조지라는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결혼식을 앞둔 어느날 로즈는 트럭 사고로 어머니를 잃습니다. 로즈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홀로되신 아버지를 보살펴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립니다. 결국 로즈는 혼란한 마음 속에서 조지에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한 달 뒤, 조지는 로즈에게 차인 반동으로 다른 여자와 결혼해버리고, 얼마 안 되어 2차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조지는 동원령에 따라 임신한 아내를 남기고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차출됩니다.

전쟁이 3년 쯤 흐르면서 건장한 남자들은 죄다 전쟁터로 끌려갔습니다. 그제야 로즈는 조지와 결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전쟁 때문에 남자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니 어쩌면 이미 늦었는지도 몰라. 사람들이 서로 죽여대는 짓을 멈출 때쯤이면 남자가 하나도 없을거야.”

이것은 로즈만의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여성 모두의 걱정이었습니다. 변변치 못한 남자마저 귀했기 때문에 그런 남자들이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일이 흔했습니다. 여자들은 변변치 못한 남자라도 데이트해 줄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감지덕지할 따름이었습니다. 여성에게 둘러싸인 남자들은 갈팡질팡합니다. 전쟁으로 인해 남존여비의 연애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현상은 전후에도 한참 동안 유지됩니다. 

도리스 레싱은 이 소설을 통해 전쟁이 만들어낸 남존여비의 시대상황에 질문을 던집니다. “남존여비 시대에 남성은 행복한가?” 남존여비 시대의 이면에는 수많은 남성의 죽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은 우리 아들들의 피로 국토를 물들이는 일입니다. 불평등의 시대는 모두의 불행을 잉태합니다. 평화를 위해 치르는 어떤 댓가도 전쟁보다는 쌉니다.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은 모두를 불행에서 구하는 일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을 고민하지만, 몇 가지 율법이나 규율로 선과 악을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은 불법이었지만 선이었습니다. 군사 독재시절에 민주화 운동 또한 불법이었지만 선이었습니다. 일제와 독재에 기생하며 꿀 빨던 자들이 함부로 모욕할 수 없는 자기 희생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이 대접받지 못하고 전과자라, 운동권이라 모욕당하는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아직 허약하다는 증거입니다. 독재가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어떤 전과자는 존경과 우대를 받아 마땅한 것이 선과 악을 쉽게 속단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과 가치관이 중첩된 상황을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취할 최선의 자세는 속단하지 않고 조금 더 깊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최근 사정기관과 언론의 여론몰이와 악마화로 유능한 배우 한 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죽음은 그가 처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성은 잠시일 뿐 또다시 선과 악을 속단하고, 누군가를 쉽게 악마화하는 일은 반복됩니다. 언론이 작은 먹잇감 하나를 던지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물어뜯습니다. 이번에는 젊은 축구 선수 하나가 던져진 듯 합니다.

누군가를 악마화하고 돌을 던진다고 해서 내가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양심은 선악을 속단하는 능력이 아니라, 유심히 관찰하고 사려깊게 생각하며 경거망동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선한 양심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정중동(靜中動) 속에서 선한 양심이 만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우동혁 목사 (만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