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윌리엄 트레버, 이선혜 옮김, 현대문학, 2015)

 나는 대형서점보다 독립서점을 더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각 독립서점만의 개성있는 북 큐레이션 때문이다. 대형서점에는 주로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거나 판매량이 높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반면 독립서점에는 점장님들의 개성에 따라 책이 진열되거나 점장님들이 추천하고 싶은 책들이 추천 문구와 함께 진열되어 있다. 혹은 직접 점장님에게 물어봐서 책을 추천받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독립서점에는 대형서점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책이나 작가를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윌리엄 트레버는 그렇게 만난 작가 중 한 명이었다. <밤의 서점> 점장님께서 내게 윌리엄 트레버라는 작가를 추천해 주셨고, 나는 <비 온 뒤>라는 단편소설집을 샀다. 찾아보니 이 책은 출간 당시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 8권’에 선정된 베스트셀러였다. 또한 윌리엄 트레버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줌파 라히리를 비롯해 많은 작가와 매체의 극찬을 받는 작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중과 전문가에게 모두 극찬을 받는 작가의 소설은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 나는 기대감에 부푼 채 <비 온 뒤>를 펼쳤다.

 그러나 트레버의 단편소설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이야기는 ‘기-승-전-결’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맥락없이 어느 한 부분만 툭 내던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소설의 주제라든지.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든지, 매력적인 인물이라든지, 이런 것도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 다른 책이면 괜찮을까?’ 싶어서 현대문학에서 나온 다른 단편소설집을 사서 읽어봤지만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윌리엄 트레버의 책들은 내게 큰 흥미를 끌지 못했고 책장 한 켠에 머무는 신세가 되었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집을 다시 꺼내게 된 것은 지난 설 연휴 때였다. 오랜만에 부모님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책장에 꽂혀 있던 트레버의 소설집을 우연히 발견했다. ‘시간도 남는 데 다시 도전해볼까?’라는 생각으로 목차부터 천천히 읽다가 “윌리엄 트레버는 위로다”라는 옮긴이의 말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래서 단편들은 건너뛰고 옮긴이의 말부터 읽었다.

 옮긴이는 윌리엄 트레버가 단편소설을 “누군가의 삶 혹은 인간관계를 들여다보는 눈길”(606)이라고 정의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트레버는 “단편소설이라는 양식을 빌려서 누군가의 인간관계를, 그 관계를 이루고 있는 사람을 확장된 사회라는 큰 틀로부터 분리시켜 섬세한 눈길로 들여다본다”(606)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야 그동안 내가 ‘단편소설’이라는 분야와 트레버라는 작가를 오독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전까지 나는 소설이란 사랑, 연대, 인간의 본질과 같은 심오한 주제들이 담겨 있어야 했고,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메시지가 분명해야 했고, 이야기의 전개는 명확하게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윌리엄 트레버를 비롯한 단편소설들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트레버의 소설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내 관점을 버리고 “누군가의 삶 혹은 인간관계를 들여다보는 눈길”로 천천히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삶과 인간관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우선 내 생각이나 사회의 잣대와 규범 등을 버려야 했다. 소설 속 인물의 행동과 감정을 내가 판단하거나 규정하면서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생각, 감정, 행동을 온전히 그 사람의 입장에서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소설을 읽다 보니 소설 속 인물들과 동화되었고, 그 순간부터 트레버의 소설은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 세계는 마치 잎사귀마다 투명한 아침이슬이 맺혀있는 호숫가를 걷는 것과 같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때에서야 비로소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러냈다. 또한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은 글자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윌리엄 트레버 작품의 매력은 단순히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완전히 동화되어 이전까지는 느낄 수 없던 어떠한 충만함을 만끽하는 것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너무나도 추상적이니 <그 시절의 연인들>이라는 단편을 예로 들면 좋을 것 같다. 

 <그 시절의 여인들>의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40살 유부남 노먼 브릿과 28살 마리는 서로 사랑에 빠진다. 그들의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져 서로 결혼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먼의 와이프 힐다와 이혼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이혼 비용이 들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노먼은 힐다와 이혼을 결심하고 마리와 함께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러나 그들은 곧 현실적인 어려움들에 부딪치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결국 마리는 18개월 뒤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노먼은 다시 힐다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힐다는 노먼에게 자기도 이미 이전부터 다른 남자들을 만났다고 말한다.

 소설의 스토리만 요약해서 본다면 이 소설은 3류 연애소설 혹은 불륜소설에 불과할지 모른다. 특히 노먼 브릿이라는 인물은 사회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부도덕한 인물이자 실패자이다. 그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으며 그의 삶은 완전히 파탄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먼 브릿’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1960년대는 지나갔지만 그 떠난 자리에는 마리와 나눈 사랑의 경이로움이 남았다. 그가 마리와의 관계를 털어놓았을 때 힐다가 드러낸 멸시도, 킬번의 방 두 개짜리 더러운 아파트도, 전혀 즐겁지 못했던 리딩에서의 생활도 마리와의 사랑이 선물한 경이로움을 퇴색시키지 못했다. ... 이따금 그의 귓가에는 어렴풋한 음악 속에 섞인 현악기를 퉁기는 소리와 비틀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틀스는 엘리너 럭비를 비롯해 그 당시의 여러 인물들을 찬양한 것처럼 목욕탕에서의 사랑을 찬미하고 있었다.” (467-468)

 소설에 동화되지 못한 채 겉으로만 본 사람들은 노먼 브릿의 생각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말과 생각은 궤변이며 자기 위로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에 완전히 동화된 자는 노먼 브릿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이해는 할 수 있고 그의 삶이 철저히 실패한 삶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윌리엄 트레버의 작품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구경꾼으로서 이야기를 지켜보며 배우와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작품의 배우가 되어 이야기를 경험해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윌리엄 트레버의 작품을 경험한다면, 소설을 읽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속에서 어떠한 따스함과 위로를, 더 나아가 자신의 현실도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소설들을 한 번 읽어보시길. 윌리엄 트레버의 눈길로 타인에게 건너갔다가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시길. 그 건너감과 건너옴 사이에는 이미 많은 것이 변해버렸음을 느끼시기를.

김윤형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