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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세기2장18절~25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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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년 02월 20일 (화) 22:39:13
최종편집 : 2024년 02월 21일 (수) 02:01:48 [조회수 :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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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세기2장18절~25절

 

 

1. 돕는 배필과 자유 의지

 

①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 (메시지성경)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를 도울 짝을 만들어 주어야겠다!’ 돕는 배필은 이웃과 타인, 동반자와 파트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로 지으셨다.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모든 인생은 예외 없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출생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세상을 떠난다. 아무한테도 도움을 받지 않고 도움도 주지 않고 나 홀로 살겠다는 것은 창조질서에 대한 무지와 오만이다. 사람은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온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실 때 제일 마지막으로 창조하신 것은 ‘가정’이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가정이다.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다. 하나님이 가정을 지으신 목적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다. 행복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가정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②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에게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 (메시지성경)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들의 모든 짐승과 궁중의 모든 새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사람에게로 데려가셔서, 그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본문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 지시와 강요보다 사람과 함께 소통과 협력을 원하신다. 청지기에게 자발성과 자율성을 허락하셨다. 청지기는 단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창조주 하나님께 위임받은 청지기라는 사실이다. ‘그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일컫는 말이 곧 그 이름이 되었다’ 사람에게 생물의 이름을 정하는 결정권을 주셨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자발과 자율, 결정과 책임의 자유의지(自由意志, free will)다. 자유의지는 피조물인 사람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이다. 무엇보다 자발성과 자율성을 통해 의미와 보람,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St. Augustine)”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결정하는 ‘자기주도 학습’이 주는 유익과 맥을 같이한다.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 감정코치(John Gottman)’에 따르면 자녀의 부정적인 감정에 대처하는 네 가지 부모의 유형이 있다. ‘축소 전환형과 억압형, 방임형’과 달리 ‘감정 코치형’은 자녀의 부정적인 감정 표현을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행동의 한계를 설정해주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감정코치를 위해서는 자녀에 대한 신뢰와 존중과 더불어 부모의 헌신과 인내가 요구된다.

 

③ (20절)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 (메시지성경) ‘그 사람이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으나 정작 자신에게 꼭 맞는 짝은 찾지 못했다’ 오늘날 반려견과 반려묘도 있지만 진정한 사랑을 나눌 대상은 사람이지 제아무리 깊은 교감을 나눈 반려 동물도 진정한 반려의 대상일 순 없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부모님이 기대와 축복으로 지어주신 아름다운 이름과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위해 주신 거룩한 직분이 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 목사와 성도 등이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교회’다. 이름에 부끄러운 유명무실한 삶이 아니라 이름값을 하는 명실상부한 삶이길 기도한다.

 

 

2. 남자와 여자, 한 몸

 

① (21절~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이 구절을 ‘남존여비(男尊女卑)’나 ‘부창부수(夫唱婦隨)’ 같은 시대착오적인 성차별로 곡해하면 안 된다. 본문의 전하는 핵심은 ‘남자에게서 취한 갈빗대’가 아니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문장에 있다. 본문이 전하는 본래 메시지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는 이 말씀 속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아담과 하와는 ‘이웃’이다. 요즘 말로 바꾸면 ‘타인(他人)’이다. 타인을 아프게 하면 나 자신이 동일한 아픔을 겪게 되고, 타인에게 기쁨을 주면 나 자신도 동일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진실을 전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의 속뜻은 내가 타인에게 행한 그대로 돌려받게 될 것이라는 변함없는 진리다. 예수께서는 타인과 공존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해라(마 7:12)’ 일명 ‘황금률’이라 일컫는 이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고 지켜야 할 삶의 대원칙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4)

 

②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 ‘한 몸’이라는 단어 속에는 영광도 부끄러움도 함께 받는 ‘공동운명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동고동락(同苦同樂)’이다. 한배를 탄 ‘운명공동체’라는 뜻이다. 가정과 교회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기쁨과 고통을, 또 삶에서 누리는 영광과 수치도 함께 받는다. ‘연합’은 물리적인 결합을 넘어 화학적인 결합이다. 마치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는 것 같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로 뒤바뀌는 질적인 변화다. 둘이 연합하기 위해서 전제조건이 있다. 반드시 ‘부모를 떠나’야만 한다. 단순히 출가외인 같은 차원이 아니라 이전에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떠나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삶의 방식으로의 대전환을 뜻한다. 자신만의 스타일이나 주장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관철시키려 하면 안 된다. 가정과 교회 공동체는 내 목소리를 드러내는 ‘독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소리가 모여 아름답게 조화(Harmony)를 이루는 ‘합창’이기 때문이다.

▶ 남자와 여자는 성별의 구분을 넘어 서로 다른 존재를 뜻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서로 다른 타인과 만나서 함께 살게 하셨을까?’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섭리가 있다. 차이와 다름은 변화와 성숙을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함으로 자신을 성찰하며 변화되고 마침내 성숙하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이 사실을 빨리 깨닫고 차이를 받아들이면 편안해지고 평안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으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아픔과 고통, 갈등과 다툼 속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인생의 쓰라린 절망을 맛보게 된다. 타인과 더불어 살면 책으로 배웠던 인내와 용서, 온유와 겸손, 배려와 존중을 삶으로 배우고 또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풍성한 삶을 만끽하게 된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일 뿐 아니라 인생의 많은 선배들이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통과하면서 몸소 체득한 진솔한 경험담이다.

 

③ (25절)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리라”

▶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거짓 없는 진실’이다. 선의에 거짓말이라는 핑계로 감추거나 속여선 안 되고 서로에게 언제나 진실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 허세로 과장하거나 과시해선 안 되고, 있는 그대로 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가정을 이루고 살면 숨김없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상처는 싸매주고 비밀은 지켜줘야 한다. 가까운 지인에게 남편이나 아내의 치부를 떠벌이면 안 된다. 자신이 마실 우물에 독을 푸는 것처럼 어리석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가정인 아담과 하와가 전하는 메시지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돕는 배필로서 한 몸을 이루고, 조화롭게 연대하는 삶이다. 이는 단지 행복한 가정이나 신앙공동체에만 적용되는 편협한 지혜가 아니다. 세상에서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소중한 삶의 지혜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공동체와 모든 인류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행복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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