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 > 김기석 설교
평화의 전령이 되어
당당뉴스  |  webmaster@dangdang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4년 02월 18일 (일) 16:56:46 [조회수 : 1204]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평화의 전령이 되어
눅 10:1-12
(2024/02/18, 사순절 제1주)

듣기

   
 

[이 일이 있은 뒤에, 주님께서는 다른 일흔[두] 사람을 세우셔서,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둘씩 [둘씩] 앞서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가거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거기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너희는 한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거기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아라.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에게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리고 거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그러나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 거리로 나가서 말하기를, '우리 발에 묻은 너희 고을의 먼지를 너희에게 떨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아라'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

∎ 사순절과 우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기억하는 절기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내일은 봄의 두 번째 절기인 우수(雨水)입니다. 산간에 쌓였던 눈이 녹아 내리고, 비가 내려 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절기입니다. 팍팍한 우리 마음에도 은총의 단비가 내려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깨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거운 겨울옷을 벗는 것처럼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우울감과 속상함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의 활동을 크게 갈릴리 활동과 예루살렘 활동으로 나누곤 합니다. 주님의 갈릴리 사역은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마 4:23)라는 구절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가르치다’, ‘선포하다’, ‘고치다’라는 세 개의 동사가 주님의 사역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다 놀랐습니다.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마 7:29)입니다. 주님은 문자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자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에 주목하셨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 5:38-39)

사람들은 주님의 이런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주님은 또한 지금 우리 삶 속에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된 사람들이 이루는 삶의 아름다움은 밥상 공동체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먹으며 삶을 경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징표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서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어울릴 수 없던 이들이 어울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이 땅에 유입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당신의 몸으로 받아내셨습니다. 병의 원인을 죄로 여기던 시대에 주님은 가없는 사랑으로 그들의 아픔을 품어 안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논쟁과 음모와 박해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작동하고 있는 죄의 현실에 눈을 감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비열함과 모순과 죄성을 드러내십니다. 드러나야 비로소 정화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존재가 바로 세상이 어둠임을 폭로했습니다. 어둠에 속한 이들은 자기들의 실상을 폭로하는 빛을 없애려 합니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요 3:20) 예루살렘을 향한 길이 십자가의 길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길에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십니다. 당신이 부재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 파송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열 두 제자들 파송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주님께서는 다른 일흔[두] 사람을 세우셔서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둘씩 [둘씩] 앞서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눅 10:1-2a). 여기 등장하는 일흔 사람 혹은 일흔 두 사람은 누구일까요? 주님 제자단의 핵심 그룹인 열 두 제자 이외의 다른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70인 혹은 72인은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홍수가 끝난 후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의 후손들이 세상에 퍼져 나가 이룬 여러 민족들의 수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70인의 파송은 땅끝까지 보냄을 받았다는 초대교회의 고백과 상통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을 이루어 파송하십니다. 홀로는 외롭기 때문일까요? 서로 격려하라는 뜻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증언을 유효하게 생각하는 유대의 관습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파송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 곧 추수하는 일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늘 소수의 변화된 사람을 통해 시작되지만 그 일에 동참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큰 흐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세상이 매우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혹한 수탈과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낯선 이들에게 흔쾌히 곁을 내줄 거라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가거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눅 10:3) 여기서 ‘가거라’로 번역된 후파고(hypagō)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을 내려놓다’, ‘아래로 가다’를 뜻합니다. 망설이고 주저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용기를 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돈 자루도 가지고 가지 말고, 음식을 담은 자루도 가지고 가지 말고, 갈아 신을 신도 가지고 가지 말라 이르십니다. 철저하게 취약해지라는 말입니다. 중세에 등장한 탁발수도회 전통은 여기서 유래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일체의 것들이 배제된 상태에 놓일 때, 제자들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가 됩니다. 누군가가 호의를 베풀어 주지 않으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불확실성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무런 안전 보장도 없고,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낙관론이 자리할 여지도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염원하는 이들이 모험가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눅 10:4) 이르십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 성경은 이 대목을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노닥거리거나 잡담하지 말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지시는 제자들이 담보하고 있는 메시지의 긴박성을 보여줍니다.

∎ 평화의 아들
어느 집에 들어갈 때 제자들이 건네야 할 인사는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입니다.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eirēnē)입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고요한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두려움에 의해 잠식되지 않은 상태 말입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이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닫아 걸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건넨 인사말도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 20:19)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들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그 평화는 그 사람에게 내릴 것이고, 없으면 그 평화가 제자들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은 세상에 유입되는 구원에 마음을 연 사람입니다. 타자를 환대하려는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그 집에 머물며 주인이 주는 것을 먹고 마셔야 했습니다. 낯선 사람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이고 부족한 음식을 나눠주는 이들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하나님 나라는 그런 이들을 통해 확장됩니다.

적대감이 만연한 세상에서 낯선 이들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미국과 유럽은 밀려드는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볼 때 무작정 막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을 다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난민들에 대해 적대감과 혐오를 드러내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의 고통 속으로 뛰어들어 어떻게든 도우려고 애쓰는 이들도 있습니다. 쉽게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역지사지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난민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마 18:12). 우리는 대부분 아흔아홉에 속해 있다고 여기기에 부주의했던 양 한 마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의 입장이 되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산세는 험하고 길은 어둡고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공포에 질린 양 한 마리는 목자가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오기를 기다릴 겁니다. 이 이야기는 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임을 우리는 압니다. 다수에 속한 이들은 언제나 소수자들을 비정상이라고 말하거나 낯선 존재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런 이들까지도 포용할 수 있을 때 사회는 건강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산되어 감을 경험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병 고치는 능력이 없다고 스스로 이 소명에서 멀어지면 안 됩니다. 질병을 치유할 능력은 부족해도 사람들의 시린 마음을 사랑으로 덮어줄 수는 있습니다. 외로운 이들의 벗이 되어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조각난 마음을 이어붙여주는 접착제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스테인드글라스’라는 시는 이런 진실을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늦은 오후/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높은 창/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 햇살이/내 앞에 눈부시다/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나 아직 알 수 없으나/스테인드글라스가/조각 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은/이제 알겠다/내가 산산조각난 까닭도/이제 알겠다” 조각난 유리를 모아 형태를 만들고 그 유리에 빛이 비치면 사람들은 그 찬란한 아름다움 앞에서 겸허하게 자기를 돌아보게 마련입니다. 깨지고 상한 마음에는 한 점 빛조차 스며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와 곁이 되어준다면,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사랑으로 보살펴 준다면 그 깨진 마음에 빛이 스며들게 되지 않을까요? 무릇 주님의 길을 걷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 이러합니다.

∎ 조급해하지 말라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에게 늘 호의적이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 고을을 만나거든 거리로 나가 이렇게 말하라 이르십니다. “우리 발에 묻은 너희 고을의 먼지를 너희에게 떨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아라”(눅 10:11) 살다보면 나의 선의를 곡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그런 일로 상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장자는 덕이 높은 사람의 마음씀을 용심약경(用心若鏡)이라는 말로 드러냅니다. 마음을 거울처럼 쓴다는 뜻입니다. 거울은 다가오는 것을 밉다 하여 배척하지 않고, 곱다고 잡으려 하지도 않고, 떠난 뒤에 자취를 남기지 않습니다. 능히 대상을 비춰주면서도 자신은 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이 이루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이룬 것이 없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들려주듯 우리가 뿌리는 씨가 살아있는 씨라면 언젠가 반드시 결실을 맺을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조급한 마음이 모든 것이 망가뜨립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통해 세상의 아픈 것들을 고쳐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사람들에게 삶으로 입증하여 보여줄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당당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20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