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낙엽을 타고》 (Kuolleet lehdet, 2023)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이것은 30년, 아니 40년 전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만한 사랑이야기이다. 그만큼 주인공들은 첨단을 살아가지 않는다. 데이트 약속을 위해 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 남자에게 건네는 여자, 여자의 이름도 모른 채 쪽지를 잃어버려 그저 기약 없이 만남을 고대하며 극장 앞에서 기다리는 남자, 여자의 집안에는 그 흔한 디지털 기기 하나 보이지 않고 여자는 오직 라디오로만 세상 소식을 듣는다. 예스러워 보이는 것은 첨단기술적인 면에서뿐만이 아니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 모습 역시 지나치게 예스럽긴 마찬가지다. 영화가 묘사한 두 사람의 애정표현은 둘이 처음으로 데이트 약속을 하고 헤어질 때 여자가 어색하게 남자의 볼에 입을 맞추려 하고 남자 역시 어색하게 여자의 입술에 자신의 볼이 닿도록 고개를 숙이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B단조 <비창>의 4악장이 마법 같이 발화된다. 신비롭게 어울리는 장면과 음악의 경이로운 결합이다.

하지만 두 주인공의 사랑은 결코 멜랑콜리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영화의 우리말 제목은 ‘사랑은 낙엽을 타고’라는 식의 매우 낭만적인 정조를 뿜어내고 있지만 이 핀란드 영화의 원제목은 고엽(枯葉), 즉 죽은 나뭇잎이다. 그래서 영화의 영어 제목 역시 ‘Fallen Leaves’다. 두 사람의 삶은 문자 그대로 시들어 떨어진 낙엽 같다. 대형마트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여자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집으로 가져가다 들켜 즉시 해고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고되게 전전긍긍한다. 술 중독자 남자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사람 모두 배고프면 빵을 사주겠다는 말에 자존심을 세울 만한 처지가 아니다. 그런 두 사람이 여자의 집에서 첫 식사를 나눈다. 없는 돈을 쪼개 여자는 남자를 위한 접시와 포크와 나이프를 사고, 남자는 술과 담배 대신 몇 송이의 꽃을 산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두 사람의 대화는 왠지 겉돌고 남자의 중독은 소중한 둘만의 첫 식사를 망친다.

낭만적으로 창작된 우리말 제목의 분위기와 달리 영화는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도시빈곤의 삶을 직시한다. 시종일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현재 우크라이나와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관한 것들이다. 사회적 빈곤과 더불어 전쟁으로 죽음을 맞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소식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참혹하고 냉담한 현실감을 잃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끝내 사랑의 온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랑이 희망이라는, 어찌 보면 실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값싼 구호가 끝내 보는 사람을 설득하는 영화라고 할까?

영화가 보여주는 뭔가 차갑고 이상스런 유머감각이 북유럽식 유머인가 싶어 알아보니 감독인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무표정한 얼굴의 코미디를 뜻하는 데드팬(deadpan) 코미디의 거장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고 한다. 황폐한 도시빈곤의 사랑이야기를 클래식과 세계 각국의 팝을 오가는 다양한 음악적 향신료와 함께 들려준 감독의 영화는 제76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채플린이라는 이름의 강아지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두 주인공의 뒷모습이 담긴 마지막 장면은 자본주의의 착취와 도시빈민의 삶을 냉소적인 풍자와 따스한 유머로 그려낸 찰리 채플린의 명작 《모던 타임즈》(1936)에 대한 명백한 오마주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흐르는 노래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브 몽땅의 고전 샹송 <고엽>(Les Feuilles mortes)의 핀란드어 버전이다. 영화 제목의 우리말 번역이 낭만을 지나치게 섞은 과한 창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니 그마저도 설득되는 기분이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 (아가서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