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힘

(<김대중의 말>, 정진백 엮음, 태학사, 2024)

  <김대중의 말>은 김대중 생애 100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말 모음집이다. 엮은이 정진백은 고등학생 시절인 1971년 4월,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연설회’를 보고 전율한 후 평생 그의 행로를 따랐다고 한다. 2009년 대통령 소천 후, 그는 자발적으로 나서서 다양한 분야의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최근 화제가 된 영화 ‘길 위의 김대중’ 역시 그가 벌인 일이다. 영화는 탄생 100년을 맞아 생애의 전반부(1924-1987)를 조명하고 있는데, <김대중의 말>을 다큐멘타리로 엮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김대중은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던 정치인이고, 자신의 행동을 언어로 양식화한 사상가였다. 

  <김대중의 말>은 1953년 정치 입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 127꼭지에 이르는 글과 말은 연설, 강연, 성명, 법정 진술, 옥중서신, 인터뷰 등에서 엄선한 말들로 <김대중 전집>과 <김대중 대통령 연설문집>을 1차 자료로 하고 있다. 엮은이는 김대중의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며, 그 말씀을 귀감(龜鑑)과 사표(師表)로 여기며 살아왔다고 회고한다. 이 시대에 더욱 말의 소중함이 느껴지는 것은 정치인의 언어를 ‘말 그대로’ 믿지 못하는 세태 때문이고, 정치인의 삶 또한 ‘말 그대로’ 신의의 지키지 않는 풍조 때문이다.  

  <김대중의 말>은 2009년 6월 27일자로 끝난다. 마지막 꼭지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추천사였다. 마지막 말을 예견했을까? 몹시 비장하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474쪽). 두 전직 대통령의 말들은 공통분모가 같다. ‘행동하는 양심’과 ‘각성하는 시민’이 그것이다. 우리 시대는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두 전직 대통령의 언어를 국가무형문화재처럼 유산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2000년 6월 13일, 김 대통령은 공군1호기를 타고 역사적인 평양방문을 했다. 독일에서 TV 뉴스로 지켜보았는데, 그때 두 정상의 첫마디 말을 생생히 기억한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일상적인 ‘반갑다’는 정상의 언어였다. 날마다 되풀이하는 ‘반갑다’는 화해의 인사이고, 샬롬의 언어였다. 사실 김대중의 언어는 정치적 수사나 언어적 기교를 부리지 않기에, 단순하고 명료하다. 평생 민주주의, 서민 경제, 남북평화를 붙잡고 살면서 언로를 열고, 대중에게 호소하며, 반대자들을 설득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전히 회자되는 명언인 ‘서생적(書生的) 문제 의식과 상인적(商人的) 현실 감각’은 지금은 폐간된 <사목>(司牧)에 실린 ‘김대중 나의 고백’에서 맨 처음 한 말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서생적 문제 의식을 갖는 순수성과 더불어 상인적 현실 감각을 갖는 실체적인 두 가지가 하나로 조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298쪽). 

  김대중은 정치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라고 이해하였고, 국민을 현명하게 여겨 그들로부터 지혜를 구했던 애민주의자였다. 감동적인 웅변, 용기있는 말, 지혜로운 언어, 실천적인 약속, 진심 어린 화해는 정치인 김대중은 물론, 인간 김대중의 참 모습이다. 김대중의 금언(金言)은 자신의 일생을 통해 증명해낸 ‘진짜’ 말들이기에 더욱 값지다.      

  특히 김대중의 신앙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담금질하였기에 경이롭다. <김대중의 말> 곳곳에서 ‘하나님’, ‘믿음’, ‘사랑’이란 키워드가 존재하는 배경이다. 그는 아내의 종교인 감리교에 대한 이해 역시 깊었다. 2002년 2월, 미국 조시 부시 대통령이 방한하였다. 당시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여 한-미 관계가 몹시 삐걱거리던 때였다.

  청와대 만찬 도중 김 대통령은 분위기를 풀려고 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신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감리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미 파악하고 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자신은 가톨릭이고, 내 아내가 감리교인이라고 말했다. 이때 부시는 자기와 종교가 같다며 특별한 관심을 보였는데, 김 대통령은 이때 감리교에 대해 평소 생각을 역설하였다.

  “존 웨슬리가 창시한 감리교는 시민들에게 정신적 위안과 안정을 주었습니다. 당시 성공회는 왕족과 귀족의 종교로서 사교 그룹과 비슷했으나 대중들의 고통은 외면했습니다. 성공회가 외면한 사람들을 감리교가 품어준 것입니다. 감리교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보호하고 희망으로 이끌었습니다. 감리교가 영국 사회를 구원한 것입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부시의 표정과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옥중에서 보낸 편지들을 묶은 <김대중 옥중서신>(1984, 청사)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장로 부부의 신앙을 잘 보여준다. 정치 테러 등 죽음의 위협을 여러 차례 겪어온 정치인 부부는 신앙의 힘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많은 정치인이 겉치레로 종교를 가졌지만, 김대중은 자신의 신앙을 지지자를 확장하려는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심이 죽음의 위협조차 이겨낼 수 있는 힘이었음을 고백한다. 
   
  “긴 인생이었다.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들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김대중의 일기 중. 2009.1.15.).

  김대중 탄생 100년을 맞아 출간한 또 하나의 책이 있다. 자전적 에세이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김영사)이다. 대통령 도전에 두 번째 실패한 후 영국으로 건너가 저간의 심경을 담았던 베스트셀러이다. 저자는 수없이 고통을 겪고 실패를 했지만 결국 오똑이처럼 일어섰다. 그러면서 날마다 넘어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비방을 전한다. 

  “오늘은 결코 어제가 아니다. 내일은 결코 오늘이 아니다. 세상은 반드시 변한다. 내일은 오늘의 고통이 감소되기도 하고 축복으로 변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니 참는 데까지 참아야 한다. 참는 것이 축복이다”(333쪽). 

  김대중의 말들은 대단한 명언이 아니다. 다만 일상의 금언이고, 일용할 양식과 같다. 그래서 오늘과 내일 되풀이하여 명심해야 할 진실이 되었다.

  “양심은 우리 마음의 가장 은밀한 골방이며, 우리가 하느님과 단독으로 대하는 지성소입니다”(173쪽, 청주교도소에서 아내 이희호 여사에게 보냔 옥중서신, 1981.3.19.).

송병구 목사 (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