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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세계관, 바이블 유니버스의 시작” 창세기 1장 1절~5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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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년 01월 10일 (수) 03:30:21
최종편집 : 2024년 01월 10일 (수) 03:32:24 [조회수 :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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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세계관, 바이블 유니버스의 시작” 창세기 1장 1절~5절

 

 

0. 유리병 속에 담긴 편지

 

▶ 창세기를 읽을 때 많은 이들이 오해한다.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인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창세기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창세기를 신화적인 창조 설화나 진화론과 같은 과학적인 눈으로 읽어 내려고 애를 쓴다. 안타깝지만 이런 관점으로는 창세기가 전하는 온전한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는 창조 설화도, 과학책이나 역사책도 아닌 까닭이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심, 곧 창조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 창세기 1장은 우주의 기원과 지구의 기원, 생명의 기원, 현생 인류의 기원과 같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창세기는 인류가 오래도록 품어왔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다. 창세기의 유일한 목적은 위와 같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전하는 데 있다. 창세기의 관심은 ‘하나님은 누구신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은 어떻게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지’에 관한 신앙의 문제, 곧 삶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창세기는 마치 ‘유리병 속에 담긴 편지’와 같다. 우주의 기원, 만물의 기원, 인류의 기원이라는 유리병 속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과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상 속에서 인류가 진정한 행복을 이룰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오롯이 전한다.

▶ 이런 맥락에서 보면 창세기의 주제는 ‘천지창조(天地創造)’ 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인생극장(人生劇場)’에 더 가깝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처음 살았던 사람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人生歷程)’의 기록이다. 실제로 창세기를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총 50장 가운데 천지 만물과 사람의 창조를 다룬 것은 단 한 장뿐이고, 나머지 49장은 아담에서 노아까지, 아브라함에서 이삭까지, 야곱에서 요셉까지의 수많은 인생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에서 경험한 사건과 삶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 창세기가 전하는 세계관 전쟁

 

①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장은 성경적 세계관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이다. 한마디로 ‘바이블 유니버스(Bible Universe)’다. 온 세상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한 말씀이다. 창세기 1장 1절은 바이블 유니버스를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인 세계관(世界觀)은, 무엇이 세상을 다스리는가에 관한 통찰이다. 세계관이 묻는 근본 질문들이 있다. ‘우주의 궁극적 실재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역사와 문화, 사회와 국가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계관을 하나로 정의할 수 있는 정답은 없다. 다양한 견해에 따른 선택이 있을 뿐이다. 다만 세계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들이 있다. 세계관에 따라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결정하는 ‘가치관(價値觀)’이 형성된다. 어떤 세계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주와 자연, 인간과 사회, 윤리와 도덕에 대한 삶의 행태(life style)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인생관(人生觀)’이라 부른다. 한마디로 세계관에 의해 형성된 가치관과 인생관에 따라 삶과 미래가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세계관은 돈을 대하는 태도인 ‘물질관(物質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 유사 이래 세계관은 크게 ‘무신론(無神論)’과 ‘유신론(有神論)’으로 구분되어 왔다. 무신론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물질의 파생물로 보는 ‘유물론(唯物論)’과 모든 존재가 마음과 생각의 산출물로 보는 ‘유심론(唯心論)’으로 구분된다. 유사 이래 세계관은 크게 ‘무신론(無神論)’과 ‘유신론(有神論)’으로 구분되어 왔다. 무신론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물질의 파생물로 보는 ‘유물론(唯物論)’과 모든 존재가 마음과 생각의 산출물로 보는 ‘유심론(唯心論)’으로 구분된다. 유신론은 모든 만물 속에서 신이 내제되어있다는 ‘범신론(汎神論)’과 세상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세상만물을 창조했다는 ‘창조론(創造論)’으로 구분된다. 무신론적 세계관은 우연에 의지하고, 유신론적 세계관은 신의 섭리에 기반을 둔다. 대표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인 진화론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다다익선과 승자독식을 추구하는데 배금주의(mammonism), 물질만능주의(materialism)가 여기에 해당된다. 창세기는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인(무신론적 세계관으로 유물론과 유심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창조신앙이 전하는 유신론적 세계관을 확립하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다. 필자가 창세기를 강해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무신론적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전하기 위함이다.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주와 만물의 기원이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이다. ‘우리 교회 예배당을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믿음의 고백과 일맥상통한다. 내 공로나 내 업적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고백이다. 이와 달리 예배당을 내가 지었다고 여기는 이들은 자신의 공덕을 내세우며 주님의 교회를 제멋대로 주도하려고 한다.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는 대부분 이런 교만에서 비롯된다. 유물론적 세계관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오만방자로 기고만장하며 무한 경쟁과 무한 성장으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안하무인과 경거망동을 일삼는다. 이와 달리 창조신앙은 아직 인간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겸비한 태도를 견지하며 인간의 오만과 탐욕을 경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세계관을 가지고 산다. 세계관은 양립 불가로 중립적 입장은 없다. 그런 이유로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세상에서는 서로 다른 세계관들이 충돌하고 대립해왔다.

▶ 풍요와 번영의 우상 바알 VS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신앙, 폭력을 신봉하는 고대 제국주의 열강들 VS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신앙, 가이사 아구스도의 로마제국 VS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 우리가 주목할 점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물질의 소유와 분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샴쌍둥이’다. 사회주의, 전체주의(독재), 민주주의도 모두 인간중심주의를 신봉한다는 점에서 하나다. 이와 달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리스도의 통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사상들과 선명한 대척점에 서있다. 중요한 점은 앞서 열거한 모든 사조(思潮, ideologie)와 신앙은 무엇이 세계를 다스리는지에 관한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세계관의 대립과 갈등, 일명 세계관 전쟁을 가리켜 성경은 ‘영적 전쟁’이라고 부른다. 창세기는 바로 이러한 세계관 전쟁, 즉 영적 전쟁을 기록한 책이다.

 

 

2. 혼돈과 공허, 암흑과 절망의 세상

 

①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암흑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 (메시지성경) ‘땅은 아무 것도 없는 늪, 끝없이 깊은 공허,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창조 이전의 세상,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모습을 묘사한다. 하나님이 없는 삶의 결론이 혼돈, 공허, 어둠이다. 세상이 혼돈해서 무질서하고 삶의 미래가 암흑으로 희망이 없는 까닭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메시지성경) ‘하나님의 영은 물의 심연 위에 새처럼 내려앉으셨다’ 하나님의 영이 땅에 임재하심으로 나타난 변화를 증언한다. 왜 세상이 혼돈하고 암흑인가? 왜 인생이 공허하고 절망스러운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혼돈과 공허, 암흑과 깊은 절망 중에 있는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혼돈한 것이 조화로운 질서를 이루게 되고 공허한 것이 의미를 찾게 되고 암흑 같은 현실이 빛으로 가득 차게 된다. 태초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 없는 세상과 삶은 여전히 혼돈하고 공허하며 암흑이 깊음 위에 있다.

▶ 성경적 세계관은 ‘우주, 만물, 인간, 역사’의 목적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뜻이다. 창조신앙은 천지 만물을 비롯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단언한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다.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세상을 관리하는 사명을 맡은 청지기다.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질서에 따라 유지 보존되어야 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존재하기 때문에 창조에서 심판까지의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 있다. 창세기는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 하나님이 세계와 인생의 주관자시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창세기를 읽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통해 인생의 참된 목적과 근원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참된 인생을 살아간 이들의 진솔한 삶의 기록이다.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초대한다.

 

3. 로고스, 세상을 밝히는 빛

 

① (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심에 빛이 있었고”

▶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구절을 반복하며 강조한다. 요한복음의 서두에 기록된 태초에 말씀, 곧 로고스와 일맥상통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세상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로 창조되었다는 말이고 하나님이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창조하신 것이 빛이다. 혼돈과 공허, 암흑으로 가득 찬 세상에 빛을 주셨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히시는 분이시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2~4)” 그 빛은 예수그리스도시다. 태초에 말씀이신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 세상의 빛이시다. 창조의 전 과정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즉 하나님의 목적과 의지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모든 만물이 주님의 뜻 안에서 살 때 비로소 참된 가치를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생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비로소 참된 가치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② (4절)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 세상이 하나님의 빛으로 비로소 ‘토브(טוֹב, good)’ 선하고 아름답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는 대목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메시지성경)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창조되었다. 그분 없이 창조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존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삶을 유지하는 빛이었다. 그 생명의 빛이 어둠을 뚫고 타올랐으니, 어둠은 그 빛을 끌 수 없었다(요 1:3~5).” 어거스틴의 통찰대로 ‘어둠은 빛의 부재(不在)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다. 빛이 오면 어둠은 사라진다. 불평은 감사 없음이다. 감사하면 불평은 사라진다. 다툼은 사랑 없음이다. 사랑하면 다툼은 사라진다. 염려는 기도 없음이다. 기도하면 염려는 사라진다. 두려움은 믿음 없음이다.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주목할 점은 1장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29번 나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모든 문장의 주어다. 하나님이 주인공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나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온 세상과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나타낸다.

 

③ (5절)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어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본문에 기록된 낮과 밤은 하루를 24시간으로 구분하는 현대적 기준과 다른 의미를 전하고 있다. 왜냐하면 해와 달, 별의 창조가 14절~19절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지를 증거 한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은 아침에서 저녁으로가 아니라 ‘저녁에서 아침으로’다. 하나님의 역사는 어둠에서 빛으로 진행된다. 하나님은 어두운 밤을 밝은 낮으로, 어둠을 빛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첫째 날은 하루 24시간이 아니라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벧후 3:8)’ 하나님의 특별한 시간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첫 머리에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신앙을 고백한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관자로 고백하는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믿음 위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 문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면서도 내 뜻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전 지구적 기후 위기는 창조 신앙의 부재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유물론적 세계관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더 심각한 비극은 창조 질서를 지키고 보존해야 할 사명을 맡은 교회의 모습이다. 주님이 머리 되신 교회마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승자독식과 다다익선을 추구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물들어 타락해 버린 현실이다. 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는 금권선거를 자행하며 하나님의 결정권을 묻는 제비뽑기 선거를 조롱한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교만으로 다수의 폭력을 앞세우는 다수결을 만고불변의 법칙으로 여긴다. 이와 같은 행태의 원조가 바로 구약 시대의 우상숭배다. 세계관 전쟁은 시공을 넘어 계속되고 있다. ‘바알이냐, 여호와냐? 제국의 지배냐 그리스도의 통치냐?’를 판가름하는 영적 전쟁이다.

▶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면, 인구 절벽 등으로 인한 교인 숫자 감소가 한국교회의 위기라는 주장에 부화뇌동할 이유가 없다. 교인 수 감소는 지난 반세기 동안 유물론적 세계관에 경도되었던 한국교회의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한계가 드러난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위기의 본질은 노아의 홍수와 바벨론 포수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돌이키는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회초리를 자각하지 못하는 데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진실을 성찰하는 거듭남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시대적 과제는 이전에 헛된 영광을 재현하거나 복구하는 데 있지 않고 기독교가 잃어버린 태초의 빛, 그리스도인이 잃어버린 소금의 맛을 회복하는 데 있다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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